2월 2019 삶과 믿음 모음

>>> 교회와사역

스파트폰 사용을 위한 조언  — 문제는 공예배
시대의 발전성경책을 누구든지 쉽게 가질 수 있게 된 것의 소중함을 잊은 많은 사람들이 성경책을 들고 가는 것을 번거롭게 여기던 즈음, 스마트폰의 보급은 또 다른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애플리케이션만 깔면 성경책과 찬송책을 읽고 들을 수 있다 보니 굳이 무거운 성경책과 찬송책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됐다.한편으로는언제 어디서든 성경책과 찬송책을 볼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이나태블릿PC로성경과찬송을봐도될까당연히 봐도 된다. 봐선 안 될 이유가 없다. 보는 것 자체가 나쁠 순 없다. 거부감은 문화적인 차이의 문제일 뿐이다. 문제는 공예배 때도 가능하냐 하는 것이다. 스마트폰과태블릿 PC에 있는 성경찬송 애플리케이션 외의 다양한 기능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경을 보다가 포털사이트에 들어가서 뉴스를 볼 수도 있다. 찬송을 부르다가 카카오톡이나 문자메시지를 확인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심지어 설교가 따분하다며 게임을 할 수도 있다.

 공예배때의바른태도우리는공예배 때의 바른 태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스마트폰과태블릿PC의 다른 여러 기능 때문에 예배 외의 다른 유혹에 노출될 수 있다면 제어와 절제가 필수이다. 공예배에 관한 모범은 “예배 시간에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해야 하며 예배를 방해하는 모든 행위를 삼가야 한다.”는 정신이 기본이다. 즉, 예배 시간에는 오직 예배 그 자체에만 집중해야 한다. 기도 시간에는 기도해야 하고, 찬송 시간에는 찬송해야 하며, 설교 시간에는 모든 감각기관을 설교자에게로 향해야 한다.이런 점에서 스마트폰이나태블릿 PC이 예배에 전적으로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며, 예배를 방해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결국 예배의 경건함을 깨뜨릴 위험이 있다.

모두다함께드리는시간이런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각자 스스로 제어하게 하면 되지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하기 힘들다. 자기가 능동적으로 하는 포털사이트 확인, 게임 등은 절제 가능할지 몰라도, 누군가가 보내오는 메시지, 여러 가지 소식을 알려주는 알림 등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는 점에서이다. 더욱이,공예배는 다양한 계층과 다양한 사람이 함께 모여 드리는 시간이며,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또한 설교자에게 불편을 줄 수도 있다. 회중석에 앉은 성도가스마트폰과태블릿PC로 성경을 볼 때, 성경 외에 다른 것을 보는지 아닌지 정확하게 알기 어렵고 혹여나 다른 것을 본다면 설교자에게 큰 방해가 된다.

성경 찾기 훈련또 한 가지 예배의 교육적 효과도 생각해야 한다. 설교 본문을 찾고 설교 중 인용되는 본문을 찾는 것은, 성경을 찾는 훈련이기도 하다. 많은 교인들이 고작 주일 하루 교회에서 성경을 살펴보는 경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성경을 찾는 방법과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함부로 정죄하는 것을 조심해야 함아주 부득이한 상황으로 스마트폰이나태블릿PC로 성경책과 찬송책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에, 함부로 정죄하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깜박하고 들고 오지 않았거나, 아직 이런 문화적 차이를 잘 몰라서 그럴 수 있기 때문이다.문명의 이기를 잘 활용해 개인적으로 스마트폰이나태블릿PC를 이용해서 성경책과 찬송가를 사용할 수 있다. 지하철에서나 집에서 읽고 묵상하는데 사용한다면 충분히 권장할 일이다. 하지만 공예배에서는 절제가 필요하다.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므로(고전 6:12; 10:23), 때로는 연약한 이들을 고려하여 조금은 수고를 행하는 것이 좋겠다
손재익 목사, [특강 예배모법 특강] 저자 –

묵상 에세이

영화 [극한 집업’ 단상 – 잃어 버린 나의 사명을 찾아서
작은 우리 교회를 섬기면서 항상 경계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성장’의 논리’에 현혹되는 것이다. 대신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소망한다. 헌신과 사역이 피로감을 주지 않고 오히려 몸과 영혼의 안식이 되기를 꿈꾼다. 왜냐하면, 때로 바쁜 사역에 매몰되어 본래의 목적을 잃어 버리고, 교회의 몸 된 주님이 아니라 교회 혹은 맡은 사역 자체가 목적이 될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본래의 목적은 사라지고 열심을 내고 있다면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어쩌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장 어리석은 자임에 다름 아닐까. 사역의 목적은 사라지고 일 자체가 나를 자로 잡지 않아야, 나의 헌신 속에 주님이 주시는 참되 쉼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교회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이리라.

한국 영화 [극한 직업]을 봤다. 형사 영화라 액션을 기대했었는데 반전이었다. 고달픈 형사들의 삶이 드러나는 시나리오가 유치하지 않은 유머 코드로 잘 버무려져 있다. 쉴 새 없이 웃었다. 성과가 없어 해체 위기에 처한 마약반 형사들이 ‘대박’인 마약조직을 잡으려고 잠복 근무를 하다가 얼떨결에 치킨집을 인수해 잠복지로 삼는다. 퇴직금까지 넣은 고반장(배우 유승룡)은 미련스럽게 보인다. 의리로 따른 부하 형사들도 그렇다 .

그런데, 아니 이럴수가. 수원 왕갈비 양념을 적용한 치킨이 엄청난 대박이 나버리니 범인을 잡으려 잠복하던 치킨집은 손님이 넘쳐난다. 형사들은 닭을 잡고, 양파를 까며, 서빙을 한다. 고반장은 빨래만 넣어 주던 Gucci 백에 진짜 Gucci 가방과 현금 다발을 주며 돈의 맛에 길들여지려 한다. 그러니 한 형사(배우 이동휘)가 항변한다. “치킨 장사하려고 범인 잡는 건지, 범인 잡으려고 치킨집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이 와중에 마약 조직은 대박난치킨집을 프랜차이즈로 이용해 전국적인 유통망을 넓히려 한다. 위기의 순간에 이들은 자신의 사명에 다시 목숨을 걸고 범죄조직에 대항하고 수괴(배우 신하균)을 잡는다. 수 많은 죽음의 순간에도 살아 ‘좀비’라는 별명을 가진 고반장은 외친다. “소상공인은 다 목숨 걸고 일해!”

범인을 잡는 사명을 다시 찾은 그의 외침은, 돈맛에 길들여지거나 고된 도전을 회피하며 적당하게 살고 있는 내 모습을 건드린다. 하나님을 믿는 사명이 내 속이 깊이 뿌리 밖은 건지, 살면서 괜찮아 보이는 크리스챤으로 행세하면서 하나님은 뒷전에 있는 건 아닌지. 섬김의 교회를 위한 나의 애씀이 하나님을 위한 건지 교회의 설립 멤버로서의 자존심을 위한 건지. 내가 바쁘게 교회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은 사라지고 그 일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닌지. 주님이 섬김의 교회에 주신 사명은 그저 현란한 수사에 불과한 건 아닌지.

사울도 목숨 걸고 예수를 따르는 자를 핍박할 때 자기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바울로 변했을 때의 사명과는 천지 차이가 아닌가. 그래, 목숨 걸고 올바른 사명을 쫓아야 하는데. 두렵네. 그래도 피곤하고 낙심되고 때론 시험이 들 때, 내가 하나님의 도구로 올바로 쓰이기를 간구한다면 이기리라. 또, 교회 이름이 섬김의 교회인 것도 다시 감사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섬기는 사명을 잊지 않게 하니까 말이다.

섬김의 교회 가족 모두가 하나님을 위해 올바로 쓰일 때 사역이 피곤이 아니라 안식이 되기를 꿈꾼다. 우리의 생업조차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올바로 쓰이기를 기도하는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래야 범인을 잡는 게 목적이지라고 목소리 높이다가도 손님이 들어오니 한 순간에 ‘수원 왕갈비 치킨’을 외치는 사명을 잠시 잊은 잠복 근무 형사들이 우리의 모습이 안될 것이다.

>>> 교회와 사역

미래 크리스천 리더십,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 인정에서”
오늘날 한국교회와 대한민국 위기, 교회 리더들 책임 / 미래 크리스천 리더십,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데부터 / 교회, 사명 위해 권능 받는 곳,  그 자체가 목표여선 안 돼 / 달라질 수 있는 길, 오로지 하나님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나는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던 2017년이 아쉬웠다. 한국교회가 내부 문제와 외부 비판들로 너무 위축돼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 같아서이다.이번 3·1절 100주년은 우리에게 한국교회에 주어진 특별한 기회다.많은 역사가들이 3·1운동은 기독교가 없었다면 안 됐을 거라고 말한다. 참여한 사람들도 기독교인들이 많았지만, 비록 작았지만 당시 전국적 네트워크가 있었던 곳도 교회뿐이었기 때문이다.당시 일본 경찰에 잡혔던 분 대다수가 크리스천 리더들이었고, 특히 지방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거의 목회자들이었다. 이에 3·1운동에 깃든 기독교 정신을 되살려, 위축돼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 에게 도전과 새 힘을 주는 무브먼트를 소망한다.

사실, 부담스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한국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받고 있는 도전이나 위기의 시작은 교회 리더들로부터 시작됐다는 점이다. 한국교회는 회복되어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며 바로 세워 나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대로라면, 역부족이다. 대신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했던 점들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우리의 바람들을 터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단적으로 말해, 우리 스스로가 한국교회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공격에 대한 방어에만 급급할 뿐, 전략도 없다.

리더들이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다. 오늘날 문제들이 대부분 어느 정도 힘을 가진 교회나 목회자들 문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정말 그렇게 잘못 됐다면, 이런 교회를 만들 수 있었겠냐’고. 또 말한다. ‘뭔가 있으니 저런 교회를 할 수 있지, 다 잘 하고 그것 하나가 문제 아니냐’고.하지만 착하고 선하고 좋은 일 많이 해도, 예수 안 믿으면 구원 못 받듯이 99%를 잘 해도 핵심적인 1%가 안 됐다면 헛되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그 교회다움의 1%가 무엇일까? 다른 모든 것들을 잘 하더라도, 하나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다 무너지고 만다. 그런 문제의식이 없어 안타깝다. 결국, 하나님의 주인 되심, 로드십(Lordship)의 문제이다.

미래 크리스천 리더십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3·1운동 역시 기독교가 영향을 끼쳤지만, 이를 주도했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쓰셨음을 신뢰해야 한다.‘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말해야 한다.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만한 통로로서의 교회나 리더로서의 삶이 형성되고 있는가? 한국교회의 문제는 로드십에 있다.

물론, 크리스천 리더십은 주님의 종이 되는 데 있다. 각자의 생각이나 이념, 주장을 들고 나오면 안 될 것이다. 목사로서 가져야 할 태도 역시 ‘종’이 맞다. 하지만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목사는 동시에 ‘리더’이다.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시지 않았나.리더로서 가져야 할 태도가 ‘종의 자세’인 것이다. 종이 끌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리더들에게 교회를 맡기셨고, 그 리더십의 태도가 ‘서번트십(servant-ship)’이어야 한다.그런 지적이 일리 있는 이유는, 많은 교회들에서 목사들이 다 주인 행세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점을 문제로조차 인정하지도 않는 게 더 큰 문제가 된다. 목회자는 성도들 앞에서 순종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고 말씀에 따라 성도들을 섬겨야 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로드십을 따라야 한다. 교회의 미래를 위해 다함께 모여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  ‘크리스찬 리더십 컨퍼런스’ 여는 박태남 목사 [크리스천 투데이2.6 인터뷰 기사 정리] –

묵상에세이

“생사의 길목을 지켜보며”
제 올캐 유현진 성도는 결혼 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가 남동생과 결혼하면서 시부모의 교회에 다니게 됐어요. 피아노를 전공했던 그는 점차 열심히 교회를 출석하면서 교회에서 반주를 하게 됐었죠. 성당을 다닐 때는 성모 마리아와 신부를 통해 주님께 나오는 것 같았지만 교회에서 믿음이 성장하며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 직접 하나님께 나아 가는 은혜를 감사하게 느꼈다고 합니다. 지난 얘기를 듣는 저도 그런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을 떠나 혼자 병실의 올캐를 만나러 갈 때 사실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에 가야한다는 마음을 하나님이강하게 주셨습니다. 가쁜 호흡의 고통 속에서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으로 매달리는 올캐를 보며 그의 영혼 구원을 위해 계획하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제 40도 안된 그의 병고를 보는 가족이 주의 사랑 안에서 약해지지 않도록 저를 쓰심에도 감사합니다. 오늘도 제게 말씀을 읽고 기도해 달라는 올캐 옆에서 제가 도리어 회개하게 되고 주님의 구속을 되새기게 됩니다. 그리고 다함께 기도합니다.“생명의 주되신 하나님, 힘을 주세요.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감당할 수 없이 받았지만 더 큰 은혜 속에 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는 온 가족과 제가 되게 해주세요.”

매일 올캐 유현진 성도의 손을 잡고 말씀과 묵상으로 간구합니다. 남편보다더 오히려 저에게 의지하는 올캐를 보며 그런 시간과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생사의 갈림길을 지켜보면서 힘들어 하실 정홍렬 목사님께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기를 간구하게 됐구요. 동시에 육체적 고통 앞에 너무나 나약한 인간의 나약함에 지나온 저의 교만함과 안일함을 회개하게 됐어요.

허무한 인생. 귀중히 여기는 돈과 명예, 그 무엇도 생명의 소중함 보다 위에 있지 않은데 헛된 삶을 살지 않아야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건강과 시간이 주어질 때 더욱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예배하며 주변의 죽어가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애쓰기를 결단합니다. 또한 정연미 사모님이 정목사님의 위태로운 건강상태에도 불구하고 저와 올캐를오히려 염려해주시고 기도해주시는 걸 보면서 굳건한 믿음의 덕목을 배웁니다. 나 역시 그처럼 믿음의 본이 되고 어머니같이 품는 믿음으로 성장하기를 기도합니다.

>>> 교회와 사역

우리는 어떤 교회를 지향하는가? 혹시 나도 모르게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대한 압박감 혹은 실패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작으면서도 교회다울 수 있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려는 고민의 일환으로 앞으로 칼 베이더스, 『작고 강한 교회』 (생명의 말씀사, 2018)의 내용을 소개한다.

왜 우리 교회는 이토록 독특한가? 
우리는 내 교회의 독특한 특성을 통해 배우고 유익을 얻을 수 있으며 큰 교회와 다른 규모 때문에 사역의 우선 순위가 달라짐과 관계, 문화, 역사가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관계
작은교회는 관계에 의해 살고 죽는다. 위대한 비전과 과정에도 불구하고 그 성패는 교회 안에서 인격적인 관계가 얼마나 잘 이뤄지는지 여부에 달려있다. 관계는 성장에도 영향을 크게 미친다. 친밀한 관계(예수님과의 관계, 교우간의 관계, 복음 전도 대상자와의 관계)가 모든 교회에 중요하나 작은 교회에서는 특히 더 중요하다.

문화
교회의 정체성을 결정하거나 어떤 일을 결정하거나 거부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전제와 현실을 포함한다. 교회 문화는 씨 뿌리는 비유를 적용할 수 있다. 너무 배타적이라 새 아이디어가 뚫고 들어갈 수 없는지, 쉽게 새 아이디어를 반가와 하지만 장기적으로 정착하지 못하는지, 끊임없는 행사와 프로그램이라는 ‘잡초’ 때문에 새 아이디어가 고사하는지, 아니면 간절한 열망과 수용적 자세로 인내심의 문화를 갖추고 있는지 말이다.

이처럼 교회의 문화는 위대한 교회의 사명과 비전과 전략의 성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큰 교회나 새로운 교회에서 교회의 문화를 주도하는 세력은 목회자와 따르는 교인인 반면, 작고 오래된 교회에서는 교인들과 교회의 역사가 문화를 주도하기 쉽다. 오랜 문화가 새로운 아이디어나 목회자가 원하는 변화에 영향을 미친다. 그 문화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해당하는 이들조차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교회 지도자들이 입으로는 “젊은 부부의 가정들을 더 많이 인도해야 합니다.”,“새로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회를 개선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기꺼이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행동으로는 그것을 거부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교인들은 겉으로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이웃과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표면 아래에는 여러 유해한 요소가 있다: 감추어진 죄, 완고한 태도, 율법주의, 타협 등. 그런 그릇된 문화는 목회적 약속 파기, 신뢰의 상실, 해결되지 않은 갈등과 같은 요인들이 오래 동안 누적된 결과이다. 현명한 목회자라면 토양을 뒤집어 그런 문화의 실체를 드러내도록 해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런 부정적 요인들이 계속 숨어서 목회자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나아가 교회를 통해하나님이 이루고자 하시는일을 가로막을 것이다. 올바른 문화가 형성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사역도 뿌리를 내릴 수 없다.

역사
교회를 개척한 경우 그때부터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다. 옛 추억에 잠겨 있는 완고한 교회에서 비전있는 새로운 사역을 추진하기를 원한다면 무작정 앞으로만 끌고가기 보다 그 교회의 기초를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용감한 교회의 설립자들이 기울였던 헌신과 본래 의도를 아는 게 필요하다. 교회는 비전을 거부하는 자들, 현실에 안주하는 자들에 의해 설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비전에 영감을 시대에 맞게 창의적으로 적절히 적용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주: 섬김의 교회 개척의 기억이 축복이도록 우리의 믿음과 사역이 좋은 토양이 되야겠다.)

사람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지난 몇 년간 교회의 리더십 분야와 기업계에서 인기 있는 말 가운데 하나는 “올바른 사람들을 버스에 태워라.”였다. 이는 기술, 감정적 균형, 관계 지수와 같은 것이 올바로 갖춘 이들과 일을 함께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마디로 작은 교회에서는 효과적이지 않은 개념이다. 작은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자원으로만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올바른 사람들’이나 ‘그릇된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사람들, 우리의 자원, 우리의 선택만이 존재할 뿐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보라.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을 선택하셨지만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올바른 선택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함께 일하셨다. 작은 교회의 목회자와 사역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올바른 사람들’이란 원리를 교회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다. 교회는 사람들을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교회에서 사람들은 자원이 아닌 목적 그 자체이다. 그들은 목회자를 목적지까지 실어다주는 버스가 아니다. 그들 자체가 목적지이다. 교회는 예수님을 경배하고 그분의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

이제 교회의 건강과 성장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나누어 볼 때가 됐다.

묵상 에세이

프로와 매너리즘
한 가지 일을 오래 한 사람 중 어떤 사람은 그 분야에서 프로가 되고 어떤 사람은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그 이유를 ‘김미경의 아트스피치’라는 책에선 ‘신선도’의 문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신선도를 유지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가면 그 분야에서 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신선도는 다른 말로 하면 초심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신선도, 초심을 잃어버리면 교회를 오래 다닌 것이 오히려 신앙의 매너리즘에 빠지는 원인이 됩니다.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예배드리고 아무 감동 없이 입으로만 찬양을 부르게 됩니다. 설교를 들어도 다 아는 내용이라고 여겨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반면 신앙에도 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처음 인격적으로 만났던 감격의 신선도를 늘 유지하고 신앙고백의 초심을 품고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더 깊은 말씀의 은혜를 누리고 더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며 더 높은 믿음으로 나아가는 신앙의 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우시고 성실하심이 크신 하나님(애 3:22~23)의 자녀답게 성장하는 신앙의 프로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손석일 목사 –

>>> 교회와 사역

우리는 어떤 교회를 지향하는가? 혹시 나도 모르게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대한 압박감 혹은 실패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작으면서도 교회다울 수 있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려는 고민의 일환으로 앞으로 칼 베이더스,『작고 강한 교회』(생명의 말씀사, 2018)의 내용을 소개한다.

왜 우리 교회는 이토록 독특한가?

첫째, 교회가 작을수록 독특한 면이 커진다.
교인 수가 50명의 교회 간에는 비슷한 점보다 다른 점이 많다. 그 이유는 서로 다른 교인 50명의의 사람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이다. 한 가정이 떠나면 특정 사역이 중단되기도 하고, 어떤 이가 안나 오면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반면, 교회가 크면 개인들이나 그들의 인격적 특성이나 언행이 교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줄어든다. 전체적 군중심리가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이것이 큰 교회들이 리더십 운영 원리를 쉽게 공유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은 특이한 교인을 다룸과 동시에 자원 부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등 다룰 문제들이 상이하다.

둘째, 다른 교회들과의 공통점을 알면 상이점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우리 교회는 다르다.’라는 것이 공통점을 무시하는 핑계가 되면 안된다. 교회 리더십의 공통분모를 충분히 숙지해야 자신의 교회의 독특한 측면을 잘 인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자기 교회의 독특한 특성을 통해 배우고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어느 누구와도 공통점이 없는 역사와 문화와 인격적 특성이 존재하기에 교회 리더십의 우선순위가 달라짐을 알아야 한다.

규모가 다르면 우선 순위도 다르다.

  • 큰 교회는 비전, 과정, 프그램에 우선순위를 둔다.

교회가 클수록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자칫 비전을 망각하기 쉽다. 따라서, 비전과 사명을 자주 강조하고 상기시켜야 한다. 그 비전을 실천하는 과정이 중요하며 교인의 열정을 독려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그래야 과정이 원활해지기 때문이다. 그에 맞게 올바른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이 필요하다. 강의와 교재를 결정하고 홍보해야 한다. 목회자가 일일이 주관할 수 없을수록 중요해진다.

  • 작은 교회는 관계, 문화, 역사에 우선순위를 둔다.

비전, 과정, 프로그램이 작은 교회에서도 중요하지만 실천하는 방식은 크게 다르다. 작은 교회가 과정과 프로그램을 크게 강조하면 비인격적이고 통제에 초점을 두는 인상을 심어주기 쉽다. 비전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다보면 혹은 괜스레 거창한 척하는 느낌이 들게 만들 수 있다. 큰 교회에서 안정감을 주는 체계가 작은 교회에서는 마치 기업 같은 냉랭한 분위기를 조장해 작은 교회를 찾는 대다수가 원하는 ‘인격적 관계’을 축소하는 느낌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작을수록 관계, 문화, 역사를 우선시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작은 교회일 수록 친밀한 관계는 중요하다. 작은 교회일수록 숨겨진 완고한 태도의 문화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용하지 못하기 쉽다. 교회의 기억과 자체 역사가 역동성 있게 발휘되도록 애쓰지 않으면 새롭게 창조적인 사역을 하지 못하고 정체되기 쉽다.

묵상 에세이

세상에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잠자는 사자의 코털, 입 벌린 악어의 이빨, 아버지의 퇴직금 등이지요.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 중에는 동창회에 다녀온 아내의 심기도 있습니다. 처음 들으면 생뚱맞다 싶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오랜만에 모여 친구들이 사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많은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요. 힘들고 어렵게 사는 친구 이야기에 감사하기보다 잘사는 친구 이야기를 들으며 스스로 초라하게 여기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기 위해서는 두 가지 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내 삶의 고유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유일무이한 존재입니다.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다른 하나는, 다른 이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말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를 하나님의 의도하신 모습으로 본다는 뜻이다.”

다가오는 설 명절,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의도하신 모습으로 볼 수 있다면 모두가 사랑스럽지 않을까요.
– 한희철 목사 (정릉감리교회) –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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