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020 삶과 믿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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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모여야 하는 이유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하다.
사도적 성회, 즉 교회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뚜렷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 출석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교회 출석이 문제가 된다면 무엇인가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신앙인의 모임이 너무 지루한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많은 이유를 붙인다. 그러나 사실 원인은 딱 하나인데, 그것은 우리의 심령이 냉랭해졌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제까지 항상 해왔던 것은 함께 모여서 예배하고, 기도하며, 과거의 은혜를 추억하고, 미래의 은혜를 기대하며, 성경의 뜻을 살피고, 거룩한 찬송가를 부르며, 간증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때부터 지금까지 해온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신자들의 모임에 강하게 끌리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교회는 성회, 즉 하나님의 교회인데 우리가 모임을 갖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리가 모이는 것은 단지 습관적인 행사가 아니다. 차마 거부할 수 없는 관습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교회에 모이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본성은 함께 모이는 것이다.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행 4:23)라는 말은 하나님 백성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물론 죄인들의 특징을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가는데,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이다.

정글의 동물들은 물을 마시러 가는 웅덩이에서 모두 모인다. 서로 생사를 걸고 싸우지만 이 물웅덩이에만 오면 이상하게도 휴전이 성립된다. 물이 있는 곳이라면 모두 모이는 것이 그것들의 습성이다. 하나님의 백성도 물 웅덩이에서 모인다. 그곳에 생명의 샘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본성이다. 양치기들은 무리에 합류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양이 생기면 그 양이 병들었다고 판단한다. 병든 양은 혼자 수풀 뒤에서 방황하다가 죽지만, 건강한 양은 다른 양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를 좋아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또 다른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해두지만, 다른 신앙인들이 내게 필요 없다고 느낄 때야 말로 그들이 정말로 내게 필요한 때이다. 개인으로서의 신앙인에게는 신앙 모임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신앙인에게 말씀하실 수 없는 것을 신앙인 모임에 말씀하실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집단에게 말씀하실 수 없는 것을 외롭게 기도하는 개인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

만일 당신의 신앙이 설교자의 설교에 의존해야 한다면, 당신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영혼의 샘물까지 연결된 개인적 파이프가 당신에게 없다 할지라도, 당신에게 목회자가 없다 할지라도, 지난 1년 동안 설교를 듣지 못했다 할지라도, 당신이 직접 그 샘물에 갈 수 있다면 당신에게는 닻(뿌리)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생수를 받아 마실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와 반대되는 경우도 성립된다. 이와 반대되는 경우란, 하나님께서 홀로 있는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없는 것을 교회 안에서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산 위로 불러서 그에게 말씀하신 다음에 그를 다시 그분의 백성이 모인 곳으로 보내실 수 있다. 하지만 산 위에서 그에게 말씀하실 수 없었던 것을 그분의 백성이 모인 곳에서 그에게 말씀하실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개인기도를 해야 하지만, 우리의 개인기도는 공중기도에 의해 수정되고 균형 잡혀야 한다. 우리는 혼자 성경을 읽어야 하지만, 또 공중집회의 성경강론도 들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도 정기적으로 회당에 가셨다.

초대교인들은 목숨을 거는 위험을 감수하고도 만났다. 그러므로 모임에 나가라. 주님이 그분의 방법으로 인도하심으로 당신은 진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분이 모임에 나가셨으므로 우리도 나가야 한다. 그분은 두세 사람이 모이면 특별한 복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셨다(마 18:20).
–『하나님은 굶주린 영혼을 먹이신다』 A.W.토저

교회와 사역

오순절로도 불리는 성령강림절의 유래와 의미
오늘은 성령강림절이다. 예수님의 부활 후 50일째 되는 날로서, 이날 모인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행 2:1)이다. 흔히 기독교에서 성령강림절은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3대 절기로 꼽히며 ‘교회의 탄생일’로 기념되고 있다.

성령강림절은 유대교의 3대 절기인 ‘오순절(五旬節, Pentecost)’과 같은 날이다(레 23:9-11). 오순절은 유월절, 수장절과 함께 구약 3대 절기인 ‘칠칠절(출23:14-17)’에 대한 헬라식 표현으로,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는 무교절 다음 날부터 계산해 50일째 되는 날에 행해지는 감사절기를 이른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고 하셨다. 제자들은 순종해 한 곳에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오순절을 맞아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기도하던 중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또한 성령강림절은 교회의 확장과 성장을 도모하는 날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성령의 역사와 인도와 충만을 기도하게 된다. 성령강림절 이후 강림절(성탄절 4주 전 주일, 대강절, Advent)까지의 주일들은 ‘오순절 후 주일들’로 불린다.

‘성령’은 하나님, 예수님과 더불어 삼위(三位)의 한 분이다. 소요리문답 6문에는 “삼위는 하나님이시며 본체는 하나요 권능과 영광은 동등하시다”고 명시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령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적절하다. 특히, 기도나 찬양 시간에 성령을 직접 부를 때는 분명하게 ‘성령님’이란 인격적인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
— 크리스챤 투데이 201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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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온라인 예배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1)

1. 공간보다 시간이다
예배의 중요성은 어떤 공간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은 공간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그 안에 하나님이 아닌 자기를 채워 넣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예배당으로서의 공간적 의미는 채워져 있긴 하나, 텅 비어있는 샘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이 예배의 공간을 물을 때 “예배할 때는 곧 이 때니”, 그러나 주님은 ‘시간’이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그 시간이 공간을 압도해야 합니다.
어떤 시간을 주님께 보냈는가에 따라 공간은 재창조되게 마련입니다. 내게 주어진 젊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기로 결정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은 어디에서 살아도 천국의 삶을 삽니다.
반면 공간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늘 화려해 보이는 것에 자신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화려한 공간일수록, 그곳은 우리를 시간에 눈 멀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급성장하고 대형화해 버린 한국교회가 그동안 공간 만들기에 눈 멀어, 자신에게 부여된 수없이 많은 시간을 놓쳤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금은 그래서 ‘지금’입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 많은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이 아니면, 공간에 눈 멀어 시간을 버렸던 우리들을 돌아볼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아니면, 내가 멈춰 서 있는 그 공간이 예배의 장소가 될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아니면, 교회가 세상의 생명을 위해 자신을 포기할 줄 아는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온라인 예배는 더 집중해야 한다
온라인 강의는 이제 쉽게 접할 수 있는 컨텐츠입니다. 하지만 인터넷 공부가 훨씬 어렵습니다. 그만큼 집중하기가 힘듭니다. 공부도 그러한데, 예배가 온라인이면 우리는 당연히 생각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이 다가오기 전부터 이전 예배당 공간을 향했던 자신의 준비 시간만큼 철저히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사모함 없는 예배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과 같습니다. 예배에 방해되는 것들은 먼저 정리해 두어야 합니다. 엄연히 예배 시간입니다. 핸드폰이 울리고 문자가 오면 보고 답장을 하고, 친구들이 오면 인사 나눈다면 하나님 살아있는 메시지가 마음에 들어올 리 만무합니다.
작은 공간에서 함께 찬양하고 말씀을 들어도 기억 못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편안한 곳에서 익숙한 사람들과 환경에서 아무도 없는 그 공간 안에서 과연 집중해서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합니다. 따라서 온라인 예배를 드리시는 분들이나 온라인 예배를 인도하는 인도자들이 모두 고민해야 할 것은, 편안함에 익숙해져 과연 다시 모이는 예배가 시작될 때 내가 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 류한승 목사 (생명샘 교회)

묵상

기도를 위한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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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

하나님 손에 맡깁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이 실수 하지 않게 보호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그들이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의 삶이 편안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삶의 도전들에 용감하게 대처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들이 연약할 때 함께 해주시고 늘 해를 당하지 않게 지켜주시고 항상 주님의 사랑 안에 보호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자녀들로부터 배울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이 격동의 시기를 보내면서 그 아이들과 가장 잘 지내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우리에게 민감함과 인내심을 주시고 힘들고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그들을 지탱해줄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그들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가게 하시고 관대하고 강하고 사려 깊은 성인으로 자라가게 하소서.
하나님, 우리 아이들이 우리와 다른 취향과 생각을 갖고 있을 때 우리가 말하지 말아야 할 때를 알려주옵소서.
우리가 그들에게 무엇을 허용할지에 대해 그들과 우리의 의견이 다를 때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과잉 보호하지도 말고 무책임하지도 않게 하소서.
또한 그들이 우리에게서 멀어질 때 그들의 자유를 기꺼이 인정해주고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늘 그 자리에 있어줄 수 있게 도와주옵소서.   / 안젤라 애쉬원,『천개의 기도』

삶과 신앙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 예레미야28:1-17
오랜시간 Lock Down 속에 있으면서 사람들이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날마다 발표되는 수치들도 어느정도 내려가는 것 같고… 아직 책임자들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조하지만 이제 평범한 사람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저는 자가격리 속에서 일상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그 분의 음성을 듣습니다. 한국교회는 역사상 처음으로 예배를 모여서 들일 수 없다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일 때 교회입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사건을 통하여 교회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는 이 시간을 그저 허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 세계 교회는 예배를 모이지 못하는 것에서 무언가 배워야 합니다. 왜 주께서 이런일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는지 냉철하게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유다 왕국 멸망 직전에 하나냐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곧 원수가 물러가고 해방이 온다고 예언한 반면, 예레미야는 “아니다! 우리는 멸망하여 바벨론으로 잡혀가 70년의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명예를 부숴 버렸지만 반대로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1년 안에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배우고 변해야 합니다. 지금은 수정할 때가 아니고 U-Turn해야할 때입니다. 교회 건물과 프로그램, 혹은 교회 내의 한 두명의 수퍼스타는 교회의 본질이 아님을 다시 명심해야 할 때입니다. 천국과 지옥,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의 목적입니다. 교회는 shopping mall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가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도 예수가 없다면 그 교회는 예수의 적일 뿐입니다.

우리 삶과 교회의 본질과 목적으로 회귀하지 않은 채 그냥 이렇게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 몽골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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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달 띄우는 마음의 카드


모든 것을 희생하시고 섬기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존재만으로 우리의 기쁨이 되는 아들, 딸에게 감사하며


서로 아끼고 헌신하는 신앙의 형제, 자매에게 감사합시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요한복음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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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카툰



세상을 살아가며 매마름과 분주함 속에
삶의 길을 걷지만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과 그 길을 걸을 수 있어
나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이 고백이 오늘도 나를 세운다.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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