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20 삶과 믿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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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성령께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은?
주일 오전 11시 예배만이 아니라 삶의 전부가 예배이다. 따라서 예배는 우리 삶의 모든 순간과 요소, 모든 생각과 감정,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다. 삶의 전부가 예배일 뿐 아니라 진정한 예배는 오직 성령께서 일으키신다. 성령께 활짝 열려 있는 자들만이 삶의 전부를 예배로 바꿀 수 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요 4:23).
예수님은 주일예배를 염두에 두지 않으셨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만 생각하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성경이 예배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예배가 삶의 전부에 적용되는 것을 아셨다. 성령께 활짝 열려 있는 자들에게는 삶의 전부가 예배이다.
우리의 일은 우리 자신, 곧 하나님이 계획하신 사람을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의 몸과 우리 자신을 제단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예배로 드리라고 촉구할 때 품었던 큰 개념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롬 12:1
우리의 참되고 적절한 예배는 매일 우리 몸의 모든 부분,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드리는 것이다. 우리의 온 삶이 예배 행위이다. 이 사실에 열려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제안하시고 하나님만이 가능하게 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진정한 예배는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 자신을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복음을 믿고 자신의 삶과 인격적 존재 전체로 하나님의 아들과 그분의 일에, 성령의 능력으로 반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께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이는 온 종일 우리 자신,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이다.
당신에게 호소한다. 바로 지금이 당신이 성령께 더욱더 열려 있어야 할 때가 아닌가? 자신에게 “나는 무엇이든 생각하고 말하며, 행할 때 성령께 열려 있는가?”라고 묻는 태도를 길러야 할 때이다. 자신을 활짝 연 채 이 기도를 드리기를 바란다.
주님, 성령께 나를 엽니다. 제게 오셔서 제 안에 거하시고, 제게 말씀하시어 제가 그리스도를 더 닮게 하소서. 주님, 제게 나 자신을 열 용기를 주소서. 주님, 성령께 나를 엽니다. 오소서, 성령님.
– 스캇 맥나이트 『성령께 나를 열다』
카드 스토리 / 기대
– 이용규『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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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너는 왜 그 사람들을 너의 기준으로 대하느냐?
나는 가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서울 때가 있다. 특히 신앙적인 열심이 특별한 분들을 볼 때마다 더욱 그러한 감정을 느낀다. 아무 조건 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구원받고 난 이후에는 철저히 외모로, 드러난 겉모습으로 사람을 대한다.
나보다 못하면 어깨를 으쓱대고, 나보다 잘하면 지독한 열등감에 빠진다. 아무 조건 없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왜 우리는 수많은 조건으로 사람을 평가하는가?
주의 ‘긍휼’을 힘입어 하루하루 산다고 고백하면서, 주의 긍휼을 경험하고 난 이후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집행한다. 주의 긍휼을 힘입고 하루하루의 삶이 감사하다 하면서 왜 우리는 타인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평가하며 사람을 대하는가?
‘말씀’에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면서, 말씀으로 다른 이를 판단하며 정죄한다. 주의 말씀은 사람을 살리고 회복시키는 영이 아닌가. 그런데 왜 우리는 말씀으로 그 사람을 재단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못 느끼는가!
‘기도’를 통해 주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기도한 후에는 기도의 영성으로 다른 이의 영성을 함부로 평가해버린다. 기도는 다른 이의 영성과 삶에 이러쿵저러쿵 말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라고 허락하신 주의 선물이 아니던가!
‘선교’를 열심히 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선교한 후에는 다른 사역자들의 열매 유무를 자기 나름의 기준으로 미주알고주알 하며 입에 올린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떤 때는 불신자들보다 더 무섭고 교제가 꺼려질 때가 있다. 여기에 언급된 무서운 사람은 타인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더 가슴 시리게 아프고 괴롭다.
오늘도 주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난 지금까지 너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는데, 너는 왜 그 사람을 너의 기준과 생각으로 대하느냐?”
-최요나,『너는 나의 영광을 짖밟았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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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를 매일 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전에 먼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밭으로 비유하셨습니다. 봄철에 식물을 심어놓고 5,6월이 되면 식물이 가장 잘 자랄 때입니다. 경험해 본 사람은 물을 주고 비료를 주는 것만으로는 결코 충분치 않다는 것을 잘 알 것입니다. 문제는 잡초입니다.
심은 적이 없는데도 자라나는 것이 바로 잡초입니다. 잡초 제거를 소홀히 하면 심은 식물보다 잡초가 더 빨리 자랍니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잠재의식에는 여전히 악한 쓴 뿌리와 좋지 못한 습관과 잘못된 믿음들이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잡초는 저절로 끊임없이 자라 조금만 방심하면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반면에 우리가 심은 식물은 열심히 가꾸고 돌봐야 잘 자랄 수 있습니다. 생명의 씨앗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타락한 존재로 태어나 마귀의 성품을 나타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힘들거나 어려울 때는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해결되면 자연스럽게 감사도, 기도도 잊어버립니다.
그러면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자신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여기저기 잡초가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상황이 어렵거나 힘들 때는 마음 밭에 잡초가 잘 생겨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시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일정한 시간을 떼어놓고 기도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일하는 중에도 늘 주님과 교제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동안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셨습니다.
또한 기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행하는 노동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그분의 뜻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우리의 통로를 열어드리는 위대하고 거룩한 특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의 모든 다스리는 권세를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기도하는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 손기철 『하나님의 하루』
교회와 사역
작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교회들이 작다고 해서 우울해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종종 그랬고, 나도 여전히 그럴 때가 있지만 예수님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으신다.
있다. 일주일 내내 주일을 위해 준비하고, 기도하고, 연구했다. 예배 전 상황을 분주히 살핀 후 당혹스러울 정도로 적은 숫자의 신자들이 참석한 상태에서 예배가 시작되었다. 예배가 끝난 후에는 필요한 것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고, 지난 주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불평을 인내심 있게 다시 들어주면서 다시 살펴 보기로 약속했다.
그 날은 무척 힘들고 피곤했다. 그러나 목회자는 혼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말에 교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다 알고 계신다. 그분은 누가 예배에 나왔고, 누가 나오지 않았는지를 아신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반적인 작은 교회 목회자들과는 달리 교회의 크기에 괘념치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나 다른 목회자들의 교회가 아닌 그분의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상관없이 구원받는 사람이 있을 때면 기뻐하신다. 또 우리가 충실함을 계속 유지할 때는 기뻐하시고,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는 함께 슬퍼하신다. 우리가 또다시 충실한 태도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이번 주일을 준비할 때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목회자의 감정이나 교인들의 숫자와 상관없이 충실하기만 하면 기꺼이 상을 베풀어 주신다.
– 칼 베이더스 『작고 강한 교회』
교회에서 배운 것
기억해주고 함께해주는 것.
그리고 잊지 않고 기도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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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삶을 예배로 – 진짜 온라인
온라인 세계가 진짜인지, 오프라인 세계가 진짜인지 헷갈리는 게임중독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여기에서 진짜는 오프라인입니다. 그런데 오프라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좋지 않습니다. 살아있지 않은 ‘죽은 선’ 같습니다. 지난날 한국교회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아니 저부터, 우리 모습이 그랬습니다. 선은 있는데 주님과 연결되지 않은… 교회와 교회와의 단절, 세상과 교회의 단절. 그래서 나는 너와 나뉘고, 우리는 ‘끼리’가 되어 우리와 그들이 나뉜 공간들. 돌아보니 여전히 온라인인지 오프라인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
우리가 주일에 모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을 기뻐하고 구약의 안식일, 즉 창조의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을 주일로 승화시켜 드림으로써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자기 개혁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제 그 날은 “나는 이기적 사람이 아니라 나만큼 너를 사랑하고 원하는” 사랑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 날 우리는 다시 말씀으로 ‘온-라인’ 되어, 번쩍이는 말씀의 신호를 붙들고 세상으로 나가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어야합니다.
‘온라인 예배’라는 키워드가 대세가 된 요즘, 그동안 우리는 과연 예배를 드리는 것일까 돌아봅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야 하고,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 우리 모습이 있는지. 예배의 형식과 효율적 시간관리, 적당한 감동만 있는 끊어진 예배는 아닌지. 지금 드리는 온라인 예배는 정말 주님께 ‘On-Line’된 것일까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온라인 예배에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온라인 예배는 교회로, 그리고 세상으로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온라인 예배는 연결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호에 의해 어마어마한 정보들이 주고받으며 화면에 영상과 음성 글씨들이 올라갑니다. 서로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놀랍게도 인사를 주고 받고 작은 모니터 안에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멈춰서서는 안 됩니다. ‘온라인 예배‘를 통해 우리가 끊어진 교회들과 서로 이어져야 합니다. 온라인 예배 시스템에 대한 고민이 많은 어려운 교회들이 있습니다. 대형교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하면 다시 모이게 할까, 성도들을 흩어지지 않게 할까의 고민이 아닌, 교역자와 성도들을 흩어 미자립 교회들을 도와 예배를 함께 만들어나가면 좋겠습니다. 규모가 작은 교회는 예배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오히려 지금 이 시기에 온라인 교회 시스템을 통해, 단점이었던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온라인 예배’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입니다. 그 분은 성전보다 크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정신은 사람을 살리는 겁니다. 사람을 위해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존재하는 예배가 온라인 예배를 통해 살아나야 합니다.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을 통해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오히려 회복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모임은 너무 중요한 가치입니다. 당연히 모이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모이기에도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쁨으로 만날 것입니다. 그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이라는 시간은 우리가 교회를 바라보며 믿음을 잃어가는 젊은 세대들의 영혼을 위하여 무얼 포기할 수 있는가를 먼저 고민하고 내놓아야 할 시점입니다.
모이는 예배가 가진 모임의 경건성, 교제의 중요성, 공동체성, 회중 예배의 존재 가치를 다시 되새기고, 이 고통을 지나가는 우리의 삶이 주님께 다시 연결, 즉 “온라인”되어 삶의 예배가 죽어버린 지난 날들을 철저히 회개하는 우리가 되십시다. 온라인이건 오프라인이건 어떤 예배건, 그 예배가 삶의 예배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류한승 목사
교회와 사역
미국의 현 사태를 둔 “자비를 위한 기도문”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결코 변함이 없으신 자비의 하나님. 우리는 세계적인 유행병 가운데 있습니다. 이 나라에서만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난 3개월 동안 4천만 명의 미국인이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불안하고 우울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 분리되어 슬퍼합니다. 우리는 모임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사역은 불확실합니다. 우리는 정상이 언제 돌아올지, 그동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백인 경찰관이 조지 플로이드 목을 무릎으로 눌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은 받은 흑인을 살해한 반면 다른 3명의 경찰관은 이러한 불의를 막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흑인 공동체에서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과 고통은 이 사건 하나만으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수십 개의 대도시가 무의미한 파괴와 폭력으로 찢어졌습니다. 사업이 소실되고 가게가 파괴되었습니다. 생명이 위협당하거나 잃어버렸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은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지요? 우리는 무엇을 바꿔야 합니까? 우리 생각과 목적이 아니라 선함과 평화와 화해가 이뤄지도록 이번 사태에 대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필요한 개혁이 지혜, 힘, 성실, 은혜를 통해 이뤄지게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는 정치, 종교 및 시민 지도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겸손하고 정직하고, 자기희생과 용기와 동정심을 가지도록 변화하고 회개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울었습니다. 진리가 불법을 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백성이 하나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사랑의 모범이 되어, 피곤하고 다툼이 가득 찬 세상을 위한 구원의 메시지로 떠오르기를 바랍니다. 받을 자격 없는 우리에게 평화와 건강과 안전을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필요한 개혁과 부흥을 주시옵소서.
– 케빈 디영 목사 / 리폼드 신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