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20 삶과 믿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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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정말 안전하니?
예배당과 현실의 삶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데도, 골치 아픈 이야기라고 여기며 직면하지 않으려고 하는 바로 당신에게 주님이 다가와 물으신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지금 있는 그 자리가 안전하니? 내가 진정 원하는 자리니?’
이렇게 물으실 때 당당하고 확신 있게 하나님 앞에 당신의 낯을 들어 말할 수 있는가?  ‘네, 주님. 저는 안전한 곳에 있어요.’
정말인가? 지금 살고 있는 삶 정도면 괜찮은가?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에서 주님을 만나도 괜찮은가?  남과 비교하여 이 정도 열심이면 괜찮은가? 우리 교회가 그래도 다른 교회보다는 건전하다고 자부하면 위안이 되는가? 내 모습이면 정말 충분하고 안전한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 아직도 붙들고 있는 죄,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고 있는 불순종의 자리가 위기의 자리이며 위험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죄와 불순종의 자리는 어떤 신학으로 변명해도, 죄를 붙들고 놓지 않으면 거룩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없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21)
값 싼 복음주의가 회개 없는 용서를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죄를 떠나지 않고도 축복과 성공과 번영을 약속하여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믿게 만든다. 진리를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믿는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기억하라. “거기는 결코 안전한 자리가 아니다! 위험한 자리다.”
죄를 잘라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믿으면,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리에 설 수 없다.
– 김용의, 『진리가 결론되게 하라』

교회와 사역

무엇이 나를 이 자리에 있게하는걸까?
우리의 삶의 여러 자리들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여러 일들을 겪으며,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있는걸까 “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봅니다.
“ 무엇 때문에 나를 이 자리에 있게 하신걸까 “
처음 생각은 고민이고, 걱정이며, 한탄이지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생각은 설렘과 기대로 바뀝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리..
그 자리에서 주님의 뜻을 구할 때
주님은 그 자리에 서있는 우리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그 역사하심 속에 나를 들어 사용하심을 감사하며,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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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암 투병 후 시작한 김동호 목사의 유튜브 ‘날마다 기막힌 새벽’ 첫 이야기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_창세기 2:1-3

늘 읽던 말씀인데 새롭게 들어오는 의미가 있다. 다가왔던 단어는 한 글자였다. ‘다.’ 1절의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에서 ‘다’라는 단어가 아주 생생하고 벅차게 내 마음에 들어왔다.

한 글자에 불과한 이 단어 속에 어마어마한 천지 만물이 담겨 있다. 천하 만물이 ‘다’라는 단어 안에 들어 있다. 하나님이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다 내가 만들었어. 내가 다 했어.”

나는 사도신경의 신앙고백이 참 좋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전능하신 하나님, 다 이루신 창조주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라는 고백처럼 우리에게 큰 힘과 위로와 능력이 되는 말씀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있는가? 우리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이 한 글자 ‘다’라는 말을 절대로 쓸 수 없는 존재이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유한함이다. 그 빈틈과 모자람 사이로 온갖 세상의 문제, 개인적인 문제들이 스며들어온다.

댐에 자그마한 틈 하나만 생겨도 결국 무너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아닐까? 그 틈, 모자람 사이로 들어오는 온갖 문제와 한계가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 틈을 어떻게 메꿀 수 있을까? 붙으면 된다. 그 ‘다’에 가서 붙으면 된다. 하나님께 붙으면 된다. 하나님께 붙으면 살고 떨어지면 죽는다.

암만 묵상하면 죽는다. 암의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잊으면, 하나님과의 틈이 생기면 죽는다. 사람인데 어떻게 삶 속에 큰물처럼 차오르는 근심, 걱정, 불안, 원망, 우울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그 틈 사이로 하나님의 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채워놓아야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꼭 붙잡고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살 수 있다. 예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을 붙잡아야 산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게 다 마귀가 하는 일 아닌가?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삼키려고 돌아다니고 있다. 나도 암에 걸렸고, 암에 걸린 분들도 많지만 암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지 못한다.

그러나 암에 사로잡혀서 벗어나지 못하면, 그리고 근심, 걱정, 불안, 원망, 우울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면, 결국 암이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를 갈라놓게 된다. 그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연약하기에 걱정스런 마음이 안 생길 수는 없지만, 그때마다 정신 바짝 차려야 산다.

졸면 죽는다. 하나님을 놓치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어려울수록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말씀을 사모하며 찬송 열심히 부르고 소리 질러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다시 붙잡아서 힘들고 어려운 삶, 우리의 부족함과 빈틈 속으로 스며들어온 모든 죽음과 걱정과 사망의 그림자들을 물리치고 이겨 살 수 있는 승리의 한 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김동호 목사, 『날마다 기막힌 새벽: 힘든 세상에서 천국 살기』

교회와 사역

중보기도에 관한 흥미로운 실험
기도하면 정말 하나님께서 일하실까? 우리가 기도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래서 그들(ITM, Iverna Tompkins Ministries)은 이런 실험을 해보았다.

그들은 각자 1년 동안 그 지역의 130명의 목회자 중 한명을 위해 매일 15분씩 중보하기로 약속했다. 그후 그들은 이렇게 발표했다. “무려 89퍼센트의 목회자가 중보기도로 그들의 삶과 사역의 효율성에 긍정적 변화가 나타났다.”

그런데 한편, 이 조사는 리더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임을 강조했다. 분명한 것은 기도가 많아 질수록 사역의 효과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기도가 있는 곳에 특별한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사단은 이런 기도의 능력을 잘 알기 때문에 기도를 못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을 성공적으로 해 왔다.

“목사님은 늘 하나님과 가깝기 때문에 기도할 필요가 없고 내가 기도가 필요하지.”
“그리고 내 기도는 힘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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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사역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된다는 것은 새로운 방향성 또는 영적 은사를 받는다는 뜻이다. 각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러한 방향성을 ‘영적 은사’라고 한다. 나는 이것을 ‘성령께서 촉발하시는 은사’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한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쌓아두거나 유명해지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은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은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지 않을 때, 성령께서 촉발하신 은사는 실재하지 않는다.

첫째, 다양한 은사와 사역과 하나님의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더라도 모두 하나이자 동일한 성령에게서 비롯된다(고전 12:4-6). 성령께서 촉발하신 은사들은 모두 한 분이신 참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

둘째, 모든 그리스도인은 은사를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받는다(고전 12:7). 우리 몸의 모든  지체가 다 필요하듯이 우리 각자에게 은사가 있으므로 우리 모두가 다 필요하다. 가장 건강하고 활기찬 교회는 각 구성원의 은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용되고 각 구성원이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도록 권장받는 교회이다.

셋째, 가장 중요하게도 은사는 공동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고전 12:7).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것은 은사를 통해 개인이 자라게 하심이다. 그 은사로 유명해지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교회의 유익을 위함이며, 바울의 말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속한 교회의 사역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우리가 성령께 열려 있을 때 삶의 방향이 완전히 새로워진다. 옛 자아에서 새 자아로 옮겨간다. 그리스도의 몸에 기여하는 지체가 되고, 타인 지향적이 된다.

하나님은 내가 속한 교회에서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시는가?

바울은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심은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고전 12:25). 우리는 성령께서 촉발하신 은사를 사용할 때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서로를 향한다.

당신은 성령께서 당신을 위해 계획하신 새로운 방향에 열려 있는가? 당신은 당신을 교훈하려고 성령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신 은사에 열려 있는가? 성령께서 촉발하신 은사가 잘 작동하려면 성령께서 촉발하신 열매도 필요하다.
– 스캇 맥나이트『성령께 나를 열다』

삶과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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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많은 목회자와 사람들이 사람들의 평가에 웃고 웁니다. 심지어 사람의 평가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슬프며 절망하며 고통스럽습니까? 주위 사람들의 평판 때문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속히 영적으로 깨어나야 합니다.

이전 세대 사람들은 정직하게 일해서 가족을 부양하거나 조용히 주위 사람들에게 기여하는 것만으로 삶의 의미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전에 없이 많은 사람이 대단한 사람으로 주목받기를 갈망합니다.

하다못해 페이스북에서 많은 ‘좋아요’를 받거나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 많은 팔로워를 얻거나 높은 유튜브 조회 수를 얻기를 원합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노골적으로 말하든 속으로 말하든 “나를 주목해줘!”라고 말합니다.

저도 사람의 평판에 목을 매고 살았습니다. 그것은 저를 고통스럽게 몰아갔고 마음의 허전함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인정은 중독과 같아서 아무리 많이 받아도 더 받고 싶고, 받을수록 오히려 더 공허해집니다. 제가 사람의 평판이라는 덫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였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이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면서 진정한 기쁨과 자유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 기자가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레이엄은 대답했습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아프리카 어딘가의 정글에서 철저히 무명인으로 살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명성과 하늘에서의 명성은 전혀 다릅니다. 이 땅에서 위대한 업적으로 널리 인정을 받지 않아도 하나님의 기준에서는 진정으로 위대한 인생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얼마든지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죽고 예수로 살며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름답고도 사랑스러우며 생수의 강을 주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게 됩니다. 그것이 가장 위대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 유기성 목사 –

성화 묵상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예수님을 지키겠노라 다짐하고 자신했던 그였지만.
그 상황이 얼마나 다급했으면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을까.
나는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와 다른 선택을 할까.
사실 베드로의 배반은 나의 삶에서 특별한 게 아니다.
베드로의 표정은 하늘을 향해 가슴치며 안타까운 눈물의 회개를 보여준다.
세번의 닭 울음 소리에 깨달은 자신의 나약함. 큰 소리쳤던 교만함.
바로 나. 날마다 회개한다.
EL Greco “회개하는 베드로 –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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