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21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4/25/2021)

“부모는 저절로 되지 않는다. 부모도 배워야 한다!”
부모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많이 듣고 알아서일까? 성경에서 부모와 어떻게 동행하셨고, 부모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자자손손 알리는 말씀을 보면 ‘아, 내가 아는 그 말씀이구나. 그렇지. 예수 믿는 부모라면 그래야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부모들이 어떻게 시간을 사용하고, 어디에 돈을 쓰고, 무엇을 위해 애타게 기도하는지 알면 말씀을 알면서도 살아내지 못하는 우리의 민낯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분의 자녀를 키우는 청지기이지만, 자기 자신과 자녀를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부모의 끈질긴 노력과 훈련과 몸부림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자녀를 맡은 우리는 부모의 사명을 다하고자 얼마나 몸부림쳤던가! 어떤 몸부림을 치고 있는가! 성경을 읽다 보면 “부모의 삶이 이러하면 네 자녀는 이러하리라”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많다. 부모로서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말씀들이다.

그러다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라는 말씀을 읽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모인 내가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릴 때 하나님께서도 나의 소중한 자녀들을 잊어버리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이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았다’고 생각하는 부모들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잊지는 않았지만, 혹 잊은 것처럼 살지는 않았는가. 부모의 삶은 반드시 그 자녀에게 영향을 미친다.

부모 교육은 크게 ‘부모 자신을 교육하는’ 부모 교육과 ‘자녀를 기르는 방법을 교육하는’ 부모 교육으로 나뉜다.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전자가 되어 있지 않은데 후자를 교육하는 것은 그릇이 제대로 준비되지도 않았는데 중요한 것을 쏟아붓는 것과 같다. 부모는 자녀를 교육하기 전에 또는 적어도 자녀를 교육할 때 자신이 먼저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 받은 뜻과 고귀한 자녀들의 은사와 장점을 살피지 않고 살려내지도 못한 채 공부만 강요하고, 대학만 가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처럼 아이들을 몰아세우더니 아이들이 대학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나는 누구인가?’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아이들을 본다. 그래서 요즘 청년들은 대학에 가서 늦은 사춘기를 겪는다. 어린 10대가 아닌 20대에 사춘기를 겪는 자녀들의 일탈은 훨씬 다양하고 파괴적이다. 그 일을 겪어본 부모들은 그런 고생이 없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자녀들의 참 주인이자 부모는 하나님이시다. 부모는 참 부모이신 하나님의 대리자요 양부모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위탁 부모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자녀에 매인 삶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매인 삶을 사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녀의 교육과 미래를 염려하다가 세상에 매여버린 고단한 삶을 살기 위해 부모가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매여 그 사랑을 자녀에게 전하며 ‘동역과 상속의 삶’을 살기 위해 부모가 된 것이다.
– 박인경, 『부모 면허』

>>> 삶과 신앙 (4/18/2021)

너는 내려놓으라, 내가 채워주리라!”
당신이 내려놓으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2005년 북경 코스타에서 내가 간증을 마쳤을 때, 한 자매가 다가와 물었다. “어떻게 해야 선교사님처럼 하나님 말씀을 들으며 살 수 있지요?” 한마디로 설명하기 쉽지 않았으나 딱 한 가지만 설명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원하세요. 주님은 ‘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우리의 안테나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소리를 잡기에는 너무 약해서 들을 수 없는 거예요.

안테나를 세우는 방법을 한 가지만 말한다면 ‘주님, 제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듣고 순종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백 퍼센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 없이는 음성을 듣고 분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하나님, 일단 말씀해보세요. 들어보고 좋으면 그대로 하고요. 제 생각이 더 나으면 그때 봐서 절충하지요’라는 자세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요. 우리가 인생의 백지수표에 서명해서 주님께 넘겨드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뜻을 듣고 분별하는 걸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묻지 않는 이유는 그분으로부터 들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며, 듣지 못하는 이유는 순종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 계획표를 백지인 채로 하나님께 넘겨드리기를 주저한다. 대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작성한 계획표를 보시고 결재해주시길 바란다. 마치 사장실 문 앞에서 결재 서류를 들고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직원들처럼…. 우리가 인생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우리에게 거짓말을 한다.

“하나님께 네 인생을 거는 순간부터 너는 망하는 거야.”
“인생의 재미를 보는 건 이제 끝이야.”
“네가 하고 싶은 모든 일에서 손을 털어야 해.”
“너, 하나님이 다 내려놓고 아프리카 오지로 선교하러 가라면 어쩔 거니?”

세상의 주인 노릇을 하는 사단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지라고, 꼭 붙들고 있으라고 유혹한다. 내려놓으면 모두 잃는다고 속삭인다. 하나님께 내려놓는 순간,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고 하며 후히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려놓으라고 하신다. 우리가 내려놓을 때 그것이 진정한 우리 것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더 좋은 걸 주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내려놓을 때 주어지는 가장 좋은 건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강’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는 단지 두 주인을 섬겨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뜻이 아니라 둘을 섬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 둘 다 누리고 싶어 하는 건, 하나님을 잡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세상을 잡고 있는 것이다. 양쪽에 걸쳐 있는 사람은 결정적인 순간에 필연적으로 십자가가 아닌 세상을 택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려놓음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자기가 죽고,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과정 중에 꼭 거쳐야 할 단계이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가치관과 유혹을 내려놓을 때, 예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다.
– 이용규 『내려놓음』

>>> 삶과 신앙 (4/11/2021)

처음 마음을 회복하려면…
“하나님, 저만 당신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도 저를 믿고 계시는군요. 하나님을 만나 주체할 수 없이 뜨거웠던 그 처음 마음, 그 마음 다시 회복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겠습니다. 사망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바라보겠습니다.”

콩고에서 사역 중 감옥에 끌려가 죽음의 공포와 여성으로서의 수치까지 겪은 영국 선교사 헬렌 로스비어의 이 고백과 기도는 사실은 아래와 같은 원망에서 역전된 것이었다.
‘하나님, 저는 감사할 수 없어요. 저와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 이곳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는데 제 동료들은 순교했고, 저는 성폭행을 당했어요. 하나님 같으면 감사할 수 있으시겠어요? 저는 감사할 수 없어요.’”

헬렌 로즈비어는 말한다. “그 말을 했는데 다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어요. ‘그럼 헬렌, 내가 너를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있겠니?’”

그는 그 말을 듣고 나서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고백했다며 자신이 깨달은 바를 말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도 자신을 믿고 계신다는 사실에 너무 놀랐다고.

그는 절박한 상황에서의 절대 감사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말하며 고린도후서 4장의 말씀을 인용한다.

…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처음 마음을 회복하려면 하나님이 당신을 믿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절박한 상황에서의 절대 감사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가능하다.

우리가 절망이라는 고난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사망을 이겨내신 부활의 주님을 묵상해야 한다.

옥한흠 목사님은 생전에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했다. 우리가 그 어떤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살아계심과 그분의 부활을 믿으면 이겨낼 수 있다. 그래서 고난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주님의 뜻을 구하는 것도 맞지만 최종적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최후 승리를 선포해야 한다.
– 이용규, 김상철 『부활-죽음의 두려움이 영원한 소망으로 비뀌는 시간』 일부 내용 재구성

>>> 삶과 신앙 (4/4/2021)

부활을 맞아…
“부활이며, 생명이 되시는” 주닙의 능력과 소망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소망의 달 4월. 첫 주일 예배를 부활절 감사로 드립니다.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며 구주 예수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말씀을 더 깊게 묵상하여, 다시 오실 예수님을 더 간절히 소망함으로
더욱 힘차게 믿음의 길을 걸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믿음의 기도를 응답 받고 간절한 소망들이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수고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활의 주님, 다시 오실 우리 주님을 바라보며
김성배 목사 올림

당신은 안 죽어요 : 부활과 하나님나라

부활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진리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서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라는 말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좀 힘들고 어렵더라도 절망하거나 낙심할 필요는 없다. 부활의 날에 우리의 모든 삶은 생명으로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조금 성공하고 출세했다고 해서 함부로 안심하면 안 된다. 이 세상에서의 삶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회복과 부흥, 부활의 능력
첫째, 생명으로의 회복이다.
부활을 통해 모든 죽음이 생명으로 회복된다. 죄로 말미암아 이 땅에 죽음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 모든 슬픈 죽음이 부활의 날에 생명으로 회복될 것이다.

둘째, 아름다움으로의 회복이다.
요한계시록 21장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죄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삶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과 그 사람의 삶이 아름답게 회복되리라는 것이다. 부활의 날에 우리는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게 되고 모두 아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내 속에는 내가 원치 않는 ‘나’가 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데,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나’가 내 안에 있다. 그러나 부활의 날에 그런 ‘나’는 다 없어지고 정말 마음에 드는 ‘나’로 회복될 것이다.

셋째, 완전함으로의 회복이다.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세상은 불완전한 세상이다. 그래서 세상에서의 삶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그러나 부활은 그런 인간의 모든 불완전함을 완전함으로 회복시킨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눈물도, 애통함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완전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부활의 능력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부활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날과 시한은 우리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부활의 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미래가 될 테지만, 그 부활의 능력은 후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살아 있는 지금부터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수를 바르게, 그리고 온전히 믿으면 이 땅에서도 우리는 부활의 능력을 덧입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 부활의 능력은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회복과 부흥으로 우리 삶에 나타나게 된다.

나는 내가 온전한 믿음을 통해 부활의 축복을 얻게 된다면, 현세와 내세에서 분명히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런 능력과 축복은 목회자로서 나의 목회뿐만 아니라 가정과 자녀 양육에도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사모해야 한다.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모든 삶을 주관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하기 바란다.
 김동호 목사, 『크리스천 베이직』에서


– 김상진 작가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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