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21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6/27/2021)
하나님, 저를 깨뜨려주세요!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위해 시련을 사용하실 수 있다.
몇 년 전, 브루스 윌킨슨이 《야베스의 기도》(The Prayer of Jabez)라는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했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두 구절에 초점을 두었다. 당신이 이 야베스라는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 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는 성경에 딱 세 번 언급되었고 따라서 우리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가 귀중한 자(대상 4:9)였다고 듣지만, 야베스라는 이름은 사실 “그가 고통을 초래한다”라는 뜻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낳을 때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은 것이다(9절).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그의 어머니가 그런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보아, 그를 낳는 과정이 유난히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믿는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야베스가 이 특별한 기도를 드린 이유일 것이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10절).
하나님은 이 간구를 들어주셨다고 한다.
나는 윌킨슨의 책을 읽을 때 이 기도의 단순함에 감명을 받았다. 내게 복을 주소서. 나의 지역을 넓히소서.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소서.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것은 우리 모두가 드리기 원하는 기도의 유형이다. 그렇지 않은가? 내게 복을 주소서(내가 원하는 것을 더 많이 주소서). 나를 보호해주소서(내가 원치 않는 일을 피하게 하소서). 참 이해하기 쉽지 않은가?
내가 여러 가지 버전으로 이 기도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하는 동안, 나는 그것의 한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 기도는 성경적이고 유용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안전하고 편안하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다소 근시안적이고, 심지어 이기적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내가 환난을 당하지 않고 근심이 없게 해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누가 고난을 원하는가? 누가 싸우길 원하는가? 하지만 나는 차라리 “하나님, 제가 성장하지 않게 해주소서. 제가 더 강해지지 않게 해주소서. 제가 주님을 더 신뢰하지 않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시련은 즐겁지도 않고 견디기 쉽지도 않지만, 하나님은 종종 그분의 목적을 위해 시련을 사용하실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는 하나님이 고난을 사용하셔서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할 만큼 담대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오직 시련으로부터 보호해달라고만 기도한다면 자신에게서 미래의 성숙함을 빼앗는 것이다. “주여, 저에게 근심이 없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는 옳은 것처럼 느껴지며, 종종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갈망이고 가장 큰 우선순위라면 시련이 만들어내는 인내를 놓칠 것이다.
“하나님, 제가 환난을 벗어나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처럼 보이며, 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더 성숙해지도록 돕고 우리를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이끄는 것은 삶의 도전들이다.
안전과 축복을 구하는 기도도 좋지만, 당신이 더 많은 것을 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 하늘로부터 오는 힘, 흔들리지 않는 믿음, 아버지와의 진정한 친밀감을 갈망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단지 하나님께 당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당신의 생명을 보호해주시고 더 많은 것을 달라고 구하는 대신, 하나님께 당신을 깨뜨려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이다.
– 크레이그 그로쉘 『위험한 기도』
>>> 삶과 신앙 (6/20/2021)
아빠도 한 입만 먹을 수 있을까
나는 아빠다. 나에게는 딸이 둘 있다. 둘 다 너무 예뻐서 간혹 넋을 놓고 보곤 한다. 네 살 된 아이가 과자를 먹고 있으면 나는 가끔 이렇게 요청한다. “아빠 한 입만.”
아이는 사랑하는 아빠와 맛있는 과자 사이에서 한참 고민한다. 그러다가 용기를 끌어모아 아주 작은 조각을 하나 골라 건네준다.
아빠는 생각한다.
‘과자는 내가 사준 건데. 하나를 건네도 여전히 수십 개가 남는데. 아니, 봉지째 주더라도 또 사줄 텐데. 별것 아닌 일로 고민하는 이 사랑스러운 모습을 좀 봐!’
작은 손으로 간신히 과자 한 조각을 건네는 아이의 모습이 귀여워서 아빠는 웃으며 또 요청한다. “한 입만~.”
우리는 헌금이나 구제를 할 때 종종 아이 같은 모습을 보인다. 아까워서 망설인다. 그럴 때는 다음 3가지 측면을 생각하자.
첫째, 하나님은 가난하지 않으시다. 일단, 우리가 얼마를 내든 그것은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닌 액수다.
둘째, 나는 일부를 드리는 것이다. 십일조를 예로 든다면, 드리고 나서도 90퍼센트가 남는다.
셋째, 드리지 않은 것도 하나님의 것이다. 즉, 드리지 않은 90퍼센트 역시 내 것이 아니라 창조주께 받은 것이다. 다만 위탁 관리 중이다. 처음부터 내 것은 전혀 없었다 (욥 1:21). 이렇게 보면 무엇을 드린다는 것 자체가 거만한 말이 되고 만다. 원래 전부 하나님의 소유였으니 말이다.
우리의 아빠는 창조주시다 (롬 8:15). 나의 건강, 시간, 에너지, 경험, 부동산, 동산, 가족 등, 우리가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어떤 것이든 실상은 그분에게서 온 선물이다 (욥 41:11). 어느 것 하나 받지 않은 것이 전혀 없다 (고전 4:7).
우리가 그분께 ‘받은 것’을 계속 헤아려보라. 점점 더 놀라게 될 것이다. 우리가 직·간접적으로 사용하는 모든 것이 받은 것들이다. 그중 가장 가치 있는 한 가지를 떠올려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 요 3:16
그리스도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 일단, 그분은 인간이 값을 치르고 구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시다 (행 8:18-20). 그분보다 더 가치 있는 재화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은 하나님 사랑의 증거가 되신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롬 5:8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죽게 하시기까지 하신 사랑이다. 크리스천은 정말, 다 가졌다.
– 송준기,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었다』
>>> 삶과 신앙 (6/13/2021)
당신은 누구에게 인정 받고 싶은가?
하나님 v. 사람
사울이 다윗과 같이 쓰임 받지 못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사울의 관심이 사람들의 평판, 인정, 인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무엘상 15장에 나오는 사울의 불순종에 관한 기사를 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중 가장 좋은 짐승을 죽이지 않고 보존한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운 걸 후회하시는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전쟁 공로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운다.
사무엘의 질책에 직면했을 때 사울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삼상 15:24)라고 고백한다. 이 말이 변명이든 실제이든 그는 자신의 왕위를 지탱해주는 기둥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휘하 사람들의 인정과 추종이라고 믿었고, 믿는 대로 행했다.
그가 장로들과 백성의 인기를 추종하는 한 하나님께서는 그를 인정하실 수 없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는 사무엘의 선언을 듣고 사무엘에게 사정한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삼상 15:30).
하나님이 버리시는 순간에도 그의 관심은 백성 앞에서의 체면이었다. 하나님이 그를 버리실지라도 백성의 인기만은 버릴 수 없었다. 백성이 그를 왕으로 인정하면 왕 노릇을 계속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불순종의 사건 이후에도 사울은 여전히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에 그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아니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여 질투하고 죽이려고 한 이유도 다윗이 자신보다 백성으로부터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우리는 세상의 인정을 추구하는 삶이 영적 지도자를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잘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사울의 모습을 제거하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신다. 그들에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시련과 아픔을 겪게 하시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우리가 마음을 열고 주님의 메스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의 내적 자아는 사울의 모습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영적으로 가장 핵심적이고 궁극적인 악이 ‘교만’이라고 설명한다. 교만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이며,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의식을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또한 우리의 영적 지도자를 판단하는 건 우리에게 위임된 책임과 권한을 넘어서는 위험한 일이기에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루실 영역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종의 모습으로 낮아져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신 그리스도의 모습과 본성이 우리 안에 얼마나 자라고 있는가이다.
– [리커버 에디션] 내려놓음, 이용규
>>> 삶과 신앙 (6/6/2021)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어.’라는 마음이 들때…
야심차게 어떤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는데, 주님이 짚어주신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어’ 하는 마음의 동기로, 그 일을 하고 있었더라고요. 회개하며 만들던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주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동기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나를 높이고자 했던 사울왕처럼 될 뿐이지요.
예수님은 돌을 떡으로 만드실 수 있었음에도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뭔가를 보여주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순종으로 본을 보이셨습니다. 늘 마음을 살펴달라는 기도가 중요함을 느낍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이렇습니다. 저의 동기를 깨끗케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제 멋대로 망쳐버릴 것 같습니다.
주님. 주님이 목자 되셔서 저를 인도해주세요’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어.’ 하는 마음이 들때, 조심해야 합니다. 멈추고 주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면, 주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해버리는 것은, 무대뽀이지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음>의 이용규 선교사님 말씀을 되뇌어봅니다.
“그 일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하나님의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다.”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어요
이화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