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22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10/30/2022)

진정한 안식 – 쉬어도, 피곤한 그대에게
어제까지 잘 쉬었나요?
그런데, 쉬고 나서 마음이 천근 만근 무거워졌나요?

아니면 쉼을 덛고 세상을 향해 발을 내디뎠나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 건 그저 쉬는 것일 뿐,
주께로 나아가는 게
진정한 안식입니다.
우리에게 쉼은
다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입니다.

참된 안식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일 때만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렸다면
새로운 힘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 이사야 40장 31절

피곤한 오늘을 버티게 해준 말씀입니다.

>>> 삶과 신앙 (10/23/2022)

“예수 믿으면 천국 갑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는 말만 믿으면 못 갑니다.
오직 예수 믿어야 천국 갑니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천국 갈수 있다는 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만나 보셨습니까? 만나지 않은 예수 믿을 수 없습니다.

진실하게 응답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천국의 확신은
학습되어져서 세뇌되어 진 것입니까?
아니면 그를 만나 믿게 된 것입니까?

당신은 십자가의 예수를 만나보았습니까?”
 — 허성근 목사 —



예배는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 목적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찬양과 경배를 받기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드리는 거룩한 예배를 통하여 우리를 만나주시고, 또한 예배를 통하여 우리에게 회복과 은혜와 축복과 거룩함과 사명을 주신다.

나의 예배는 어떠한가?
남들이 하니까, 주일이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니까, 안 하면 찜찜하니까…
고작 이런 정도의 이유로 예배를 드린다면, 자기만족을 위한 미신행위와 별반 다를 게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일들이 예배 보다 우선순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과 교통하며, 그 분의 뜻을 알기 위한 진정한 예배가 없다면, 세상과 구분되려는 우리의 믿음과 절제는 오히려 더 미련한 것이 될 것이며, 우리는 세상사람들 보다 더 불쌍한 존재가 될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전15: 19)

또한, 찬양은 우리를 성령의 임재 가운데로 깊이 들어가게 한다.
찬양은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지키는 방패인 동시에 마귀를 공격하여 무찌르는 칼이기도 하다.
찬양은 영적으로 탈진해 맥이 빠질 때, 새로운 영적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하나님은 찬송 가운데 우리에게 임하실 것이다. 찬송하며 기도하라. 기도가 새로운 힘을 받게 되고, 우리의 삶이 예배가 된다.

>>> 삶과 신앙 (10/16/2022)

“요즘 다 그래요.”
사람의 체온은 36.5도다.

40도까지 올라가는 불볕더위에도, 영하 20도의 강추위에도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체온은 36.5도다. 이 36.5도를 지켜내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살아 있는 것은 끊임없이 환경과 상황에 저항하며 충돌하고 부딪친다. 상황과 환경에 나를 맡기지 않고 저항해서 지켜내는 것이 생명의 정체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가, 살았으나 죽은 자인가?

자신이 시대적 상황과 처지, 형편 속에서 믿음으로 저항하며 지켜내고 있는지, 아니면 시대의 상황과 대세, 유행, 흐름 속에 나를 맡겨 동화되어가고 있는지 살펴보라. 이것이 내 믿음과 우리 시대의 영성을 점검할 수 있는 체크리스트다.

급작스러운 폭우로 강물이 흙탕물이 되어 범람할 때, 밑동째 뽑힌 아름드리 통나무가 둥둥 떠내려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무리 크고 무거워도 생명력이 없으면 저항하지 못하고 휩쓸려 떠내려갈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엄청난 물줄기 속에서도 물고기들은 떠내려가지 않았다. 손가락 두 마디 크기밖에 안 되는 새끼 송사리도 그 세찬 물살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너무나도 놀라운 생명의 현장이었다.

크기나 무게로만 보면 몇만 배는 더 크고 무거운 통나무도 죽은 것은 저항 없이 그저 휩쓸려 떠내려가지만, 코딱지만한 심장이 팔딱팔딱 뛰고 있는 한 송사리는 절대 물살에 휩쓸려 가지 않는다. 그 세찬 물살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몸이 찢어져라 고통스러워도 견딘다.

교회와 신앙도 마찬가지다.

떠내려가지 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충돌하고 버텨내는 것이 살아 있는 신앙이다. 크기와 숫자, 신앙의 연수와 대수가 내 믿음의 강건함을 자랑하는 증거가 아니다. 교회가 아무리 커도, 신앙생활 아무리 잘하는 것 같아도 시대의 탁류와 조류에 저항하지 못한 채 힘없이 떠내려가며 “요즘 다 그래요”라고 하는 것은 밑동 잘린 통나무처럼 죽은 신앙이다.

하지만 교회가 작고 초라해 보여도, 세상의 가치로든 신앙의 연수로든 자랑할 것 없는 내 모습일지라도오염된 이 시대의 문화와 시대의 대세에 끊임없이 저항하며 맞서고 충돌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생명력 있는 교회요 살아 있는 신앙이다.

망하는 시대와 공동체에서 가장 많이 들려오는 소리는 “요즘 다 그래요”, “요즘 애들 다 그래요”, “요즘 교회 다 그래요”, “요즘 예배 다 그래요”다.

뭐가 다 그런가. 아무리 시대가 다 그렇고, 요즘 애들이 다 그렇고, 요즘 예배가 다 그렇고, 요즘 교회가 다 그렇다 할지라도 아닌 것은 아니다.

아무리 다들 그러니 그냥 인정하고 대충 넘어가자고 해도, 아닌 것은 죽어도 아닌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대로만,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아가려는 몸부림이 있어야 진정 살아 있는 신앙이고 진정한 목사요 성도다.
 — 안호성, 『좋은 것보다 위대한 것을 선택하라』 —


주님. 뿌리지 않고 빨리 거두려고만 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주님과의 시간 없이, 사역에 나서지 않게 하소서. 아주 작은 일에도, 누군가와 만나 대화하기 전에도 늘 주님께 집중하며 기도하며 마음을 받게 하소서.

아주 급박한 순간이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님의 마음을 구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의지할 때 주님께서 일하실 수 있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 이정한 작가 —

>>> 삶과 신앙 (10/9/2022)

보이는 것이 행동을 지배한다.
마귀는 세상을 통해 우리에게 상업적이고 본능적인 시각을 주입하나 우리는 근본적인 것을 보는 삶으로 회귀해야 함을 명심하자.

시대가 속이고 마귀가 유혹하는 대로 좋아 보이는 것을 보려 하지 말고 진정 좋은 것을 봐야 한다. 하늘의 신령한 복인가, 아니면 마귀의 간사한 유혹인가를 통찰력 있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대에 마귀는 뿔 달리고 송곳니 드러낸 무서운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이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오기 때문에 속기 쉽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놔두고, 허락하지 않으신 선악과를 자꾸 쳐다보게 한다.

그래서 좋아 보이는 것을 우리에게 자꾸 제공하며 “이것이 이 시대 승리의 공식이고 스펙”이라고 유혹한다. 원래 독버섯이 화려한 법이다. 그 화려함에 빠져서 손대면 죽는다. 그래서 독버섯처럼 좋아 보이는 것은 위험한데도, 그것을 자꾸 보다 보면 보암직해서 홀딱 빠질 때가 있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홀딱 빠져서 자꾸 그것을 보고 내 자녀와 다음세대에게도 보여준다. 선악과를 보고 있으면 반드시 먹게 된다. 보는 것이 행동을 지배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마시멜로 시험’이라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마시멜로를 주고 5분을 견디고 참은 아이들에게는 두 개를 주기로 약속한다. 실험을 시작하자 어떤 아이들은 마시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참았고 어떤 아이들은 “먹지 마” 하는 순간 등을 돌리거나 시선을 다른 곳에 두어 마시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런데 마시멜로를 계속 쳐다보던 아이들은 결국 마시멜로를 먹어버렸고,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아이들은 모두 성공했다.

성공한 아이들은 유혹을 바라보며 견디고 참은 것이 아니라 아예 쳐다보지도 않은 것이다.

담배를 끊으려 할 때도 “내가 너를 기필코 끊겠다. 담배야, 내가 너를 이긴다” 하며 쳐다보면 반드시 실패한다. 담배를 끊기로 했으면 새우깡도, 빼빼로도 먹지 말아야 한다. “내가 반드시 너하고 싸워 이기겠다” 하고 유혹과 죄악을 마주 보면 이기기 어렵다.

유혹은 쳐다보지 않아야 이길 수 있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은 보지 말아야 한다.

좋아 보이는 것에서 눈을 돌려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큰 떡’은 무엇일까? 정답은 ‘남의 떡’이란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늘의 신령한 복이 있는데 그 떡이 너무 익숙하고 가까이에 있다 보면 작아 보이곤 한다. 반면, 하나님이 내게 손대지 말고 보지도 말라고 하신 세상의 떡, 남의 떡은 아주 크고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진짜 생명의 떡, 하늘의 신령한 복은 예수님밖에 없다. 생명의 떡이 소박하고 평범해 보이고 익숙하다 못해 물리고 질리게 느껴질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이다.

오늘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결국 내 삶이 되고, 내 자녀들의 인생이 됨을 명심하여 이제 다시는 아담과 하와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바란다.
— 안호성, 『좋은 것보다 위대한 것을 선택하라』 —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10

>>> 삶과 신앙 (10/2/2022)

하나님께 인생을 맡기는 것이 두렵다면?
아담과 하와는 결국 마귀가 하는 말대로 했다가 에덴동산의 축복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마귀가 똑같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통한다는 사실입니다.

마귀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세상 중에 어디가 더 매력적입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하나님은 아주 까다로운 분이셔. 이래라저래라 요구하시는 것만 많고, 재미있는 일, 욕심나는 일은 다 하지 말라고 하셔.

힘들고 어려운 일만 하라고 하시지’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목자처럼 여겨지나요?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좋은 분이라고 정말 믿으시나요? 아니면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는 건 어렵고 얽매여 사는 삶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미 마귀에게 반 이상 마음을 빼앗긴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을 통해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봐!
본능에 충실해. 재미있게 살아! 마음껏 즐겨!’

그 속삭임에 우리 마음이 흔들립니다.
예수님만 붙잡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을 마귀에게 활짝 열어주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주님이 약속하신 놀라운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마음대로 살고 싶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주님이 저에게 애통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어떠신지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인생을 다 맡기는 것은 두렵고, 마귀가 세상에서 부르는 소리는 얼마나 달콤하게 들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목자 삼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번 마음대로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목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는 불안의 뿌리입니다. 이것이 원죄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양이 목자 앞에서 이렇게 묻는다면 어떻습니까?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

당신을 따라가면 정말 푸른 풀밭과 물가가 나오나요?”

세상은 갈 데도 많고, 자유롭게 살 수도 있는데 목자만 따라 살아야 하는지 갈등하는 양이 있다면 그 양은 이미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꼭 그와 같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사 53:6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큰 죄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죄입니다. 여호수아가 너무 답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쳤습니다.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여호수아 24:15

왜 불안할까요?
왜 주님이 친밀하게 인도하시는 경험이 없을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기회를 안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못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짜 목자로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주님이 해결해주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어려움이 생겨도 주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기 방법과 자기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발버둥 칩니다.

그것은 목자 없는 양입니다.

예수님이 내 목자임을 믿으면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지 않습니다. 양이 할 일은 언제나 목자이신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십자가 복음은 “내가 예수와 같이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말은, 모든 판단과 결정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능히 건지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 유기성, 『예수님은 나의 선한 목자이신가』 —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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