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22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7/31/2022)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전도를 하다 보면 “이해가 안 돼서 못 믿겠어. 하나님 보여주면 믿지”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머리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이다.
이게 맞는 말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일까? 믿음을 통해서 이해에 이르는 것일까? 요즘엔 주소만 알면 내비게이션으로 정확히 찾아갈 수 있지만, 예전에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꼭 팩스로 미리 약도를 받았었다. 약도를 보고 따라갔다. 길을 잘 모르지만, 약도가 맞는지 안 맞는지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믿고 가는 것이다. 가보니까 맞다. 그러면 그다음에 갈 때는 믿고 가는 게 아니라 알고 가는 게 된다.
많은 사람이 이해를 통해서 믿음에 이르는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먼저 믿고 이해가 되는 것이다. 약도를 받아들고 믿으려 하지 않고 ‘모르는 길인데 이 길이 맞을까?’ 의심하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유한한 인간이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창세기 6장은 노아의 이야기다. 노아 하면 생각나는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의인’.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칭하셨다(창 6:9). 그러면 노아에겐 죄가 없었을까? 실수가 없었을까? 아니다. 우리가 잘 알지 않은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잠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노아를 의인이라 하셨을까?
행함으로만 보면 세상에 온전한 의인은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로마서의 말씀이 맞다. 그러니 노아가 행함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의인이었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뭘 보고 그렇게 좋으셔서 “노아는 참 좋아, 의인이야. 내 마음에 들어”라고 말씀하셨을까?
하나 밖에 없다. 노아는 하나님을 믿었다. 믿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았다. 이해가 되든 안 되든, 상식에 맞든 맞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성경을 보니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다 준행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노아 입장이라면 어땠을까? 하나님께서 뜬금없이 “이 세상에 죄가 가득 차서 내가 홍수로 다 쓸어버릴 거야. 그러니 너는 가서 방주를 지어”라고 말씀하신다면 쉽게 믿어졌을까? 그런데 노아는 그 말씀에 토 달지 않고 순종해서 방주를 지었고 구원을 얻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그냥 따르면 되는 것 아닌가? 노아처럼 그냥 방주를 지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쉽지 않다.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범죄하고 타락하여 우리의 생각, 가치관, 인생관 곧 하나님이 본래 우리에게 심어주신 형상이 망가졌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세상 식이 있다. 세상의 길이 있고, 세상의 꾀와 요령이 있다. 그것은 만만치 않다. 대단하고 힘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길로 간다. 다들 그 길로 가는데 나만 다른 길로 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딴 길이시지 않은가? 우리에게 편하고 익숙한 세상의 꾀와 법과 식과 요령을 거부하고 홀로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집하면서 산다는 건 쉽지 않다.
내비게이션에 따라 운전하다 보면 재미있는 생각이 든다. ‘내가 생전 보지도 못한 이 사람 말도 믿고 다니는데 하나님을 못 믿을까? 하나님의 말씀을 못 믿을까?’ 그리고 하나님께 이야기한다. “하나님, 그냥 말씀하세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게요. 가라고 하시면 가고, 서라고 하시면 서겠습니다.” 그게 믿음의 생활인 줄을 믿는다. 그러면 언제나 우리의 삶 속에 구원의 방주가 지어지는 줄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별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노아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그 마음을 기뻐하시고 의인이라고 칭해주시는 분이시다.
— 김동호, 『날마다 기막힌 기벽: 힘든 세상에서 천국 살기』 —
이런저런 힘든 일들이 많아 잠이 안 옵니까?
먼저, 복잡한 마음 그대로 주님께 드리세요.
“주님 불안하고 복잡한 내 마음 드려요.
주님 제 마음을 지켜주세요.”
그리고 걱정되는 것들.
하나님께 다. 말씀드리세요.
그러면 주님께서 오셔서 복잡한 마음과 상황을 다스려주실 거예요.
걱정되는 일이 생길 때, 기억하세요.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 최은경 작가 —
>>> 삶과 신앙 (7/24/2022)
모든 사람이 나보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 – 잠언 14:30
나는 뒷마당 데크에 나와 앉아, 유리잔 속의 얼음들이 작은 소용돌이를 일으킬 때까지 줄무늬 빨대로 아이스티를 힘껏 젓고 있었다. 그러나 휘젓고 있는 것은 내 정오의 음료만이 아니었다. 내 감정들도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휴대폰으로 소셜 미디어 포스트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손으로 화면을 넘길수록 내 마음은 더 깊이 가라앉았다.
나는 방금 한 아이의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고, 남편과 긴장감 가득한 언쟁을 한 데다, 하필 그날 입은 꽉 끼는 청바지가 한때 너무 헐렁해서 지역 중고 상점에 기부하려던 바지였다는 사실 때문에 이미 우울한 상태였다.
“휴.”
한숨이 나왔다.
휴대폰의 화면들을 넘겨다보니, 이런 생각만 들었다.
와, 진짜 멋지다. 이 사람들은 모든 걸 가진 듯해.’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휴대폰 화면을 넘긴다.
‘와, 정말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두었구나.’
화면을 가볍게 두드린다.
‘온화한 미소를 짓는 남편과 멋진 저녁식사를 하네. 정말 행복해 보인다.’
스크롤을 내린다.
‘오, 정말 멋져. 체육관에서 운동하는 사진이네. 운동에 엄청 많은 시간을 들이나 봐. 게다가 몸과 식욕도 도와주겠지. 나도 내일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해야겠다. 아니면 다음 주 월요일? 오, 나 지금 뭐라는 거야? 난 절대 저렇게 되지 못할 거야.’
바로 이거다.
소셜 미디어를 보다 보면 우리는 ‘보이는 것’에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 언제나 모든 사람이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 잠언의 핵심 구절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평온한 마음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를 썩게 하느니라”(잠 14:30).
‘시기’란, 처음에 한 ‘정말 멋지다’라는 생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격렬하고 열성적인 ‘질투’를 의미한다. 또한 ‘썩게 한다’는 단어는 ‘부패시킨다’라는 의미다. 이 구절에서는 어떤 사람의 생명력의 비유적인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에 묘사된 음울한 장면을 오래 생각하진 말자. 이 구절의 나머지 절반은 어떠한가?
‘평온한 마음’은 말 그대로 건전하고, 온전하며, 건강하고, 치유된 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감정적, 영적으로 건강한 마음을 갖는 비결은 시기심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불쌍한 나’의 사고방식과 싸운다. 감사하는 마음은 시기심을 내쫓고,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완전한 평안 속에 정착시킨다. 이다음에 휴대폰으로 사진들을 보면서 ‘보이는 것’에 무너지려 할 때면, 잠시 또는 일주일 동안 로그아웃 하고 우리가 받은 많은 복들을 세어보기 시작하자.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지 말자. 그러면 참된 만족이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갖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미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저는 하나님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캐런 이먼 & 루스 슈벤크, 『내 영혼 안정시키기』 —
>>> 삶과 신앙 (7/17/2022)
주님 근처에만 가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 살전 5:16-18
크리스천 중에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에서 미션 임파서블, 즉 불가능한 임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짜 불가능한 임무를 주신 걸까요?
많은 사람이 이럴 때 기뻐하고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되었을 때, 내가 목표하는 것을 이루었을 때, 돈을 많이 벌었을 때 등등. 혹시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삶을 살고 계시나요?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생기지만 내가 바라지 않은 일도 생기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예수는 믿는데 기쁨이 없어서》라는 책을 쓴 마이크 메이슨은 평생 경계성 우울증을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마이크 메이슨은 “사람이 항상 즐거울 수는 없지요”라고 말하며 기뻐하지 못할 이유가 세상에는 너무도 많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는 또 “못 할 것도 없지요”라고 말하며 기쁨은 근육과도 같아서 쓸수록 강해진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항상 기쁘게 사는 비결은 한마디로 “주 안에서”입니다. 그가 반복했던 실수는 기쁨을 어떻게든 내가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쁨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가 기쁨이라는 사실을 드디어 깨닫습니다.
“기쁨을 원한다면 그것을 위해 의지적으로 맹렬히 싸워야 합니다. 영적 전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므로 우리는 그것을 즐기는 편이 낫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싸우는 일은 버거운 의무가 아니라 기쁨과 직결되는 최고의 특권입니다. 전사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승리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싸움 자체의 즐거움을 알기를 원하십니다.”
마이크 메이슨은 그 선한 싸움 속에 풍요로운 기쁨이 예비되어 있으며, 우리가 그 싸움을 통해 삶의 경이와 감사를 누릴 때 바로 그 기쁨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2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사도 바울이 여전히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어찌 되었습니까? 주님을 영접하고 경험했던 그 구원의 감격의 기쁨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였다고 하지만 얼굴은 무표정하고 마음속에는 사랑이 아니라 메마른 감정만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 시 16:11
주님 근처에만 가도 기쁨이 넘치고 행복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일이 내 마음대로 다 안 되더라도,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더라도,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기쁜 것입니다.
내가 죄를 용서받았고 구원의 확신이 있으며 비록 지금은 이 세상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곧 천국에서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잊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시간 동안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기뻐합니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고후 6:10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즐거움은 세상의 조건에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은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기쁨의 기도와 감사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라는 말씀은 오늘 내 앞에 있는 현실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고, 힘들고 어려운 문제가 여전히 내 삶에 있더라도 그것에 상관없이 기뻐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쉬울까요?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을 훈련해야 합니다.
내 기대와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더라도 가장 먼저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어떤 최악의 상황을 만나더라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읊조립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할 때 마귀가 좌절합니다.
이런 믿음과 감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을 진짜 믿으신다면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홀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 차길영, 『자녀의 꿈을 돕는 부모의 기도』 —
내가 주연! 다른 사람들은 조연?
아니죠. 주님만 나타내기!
>>> 삶과 신앙 (7/10/2022)
문제가 생기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 하나님께서는 모세라는 지도자를 보내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광야로 이끄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은혜를 받았어도 이후 거칠고 험난한 광야생활에 지쳐 온갖 불평을 늘어놓았다. “애굽에 살던 때가 좋았지. 그땐 비록 노예였지만 집도 있었고 고기도 먹었고 부추도 먹었지”라는 말들을 뱉곤 했다.
살다 보면 우리도 그럴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만 보자면 예수 믿기 전엔 이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 ‘하나님은 왜 우리를 예수 믿게 해서 고달픈 삶을 살게 하시나?’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수 믿어봐야 달라지는 것이 없네’라며 지나온 애굽 땅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게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 버린 것인 줄도 모른 채 말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려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의 광야 행진은 별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은 분명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가나안을 주시려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광야 생활을 하게 하셨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애굽의 종노릇하던 옛사람의 잔재를 벗고, 오직 선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새사람이 되어 가나안에 입성하도록 하셨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만약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천국이 없다면, 우리는 이 땅을 사는 동안 굳이 누구의 지배를 받으며 사느냐에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마귀의 종노릇을 하며 애굽에서 산다 한들 마귀가 우리에게 더 좋은 것들을 준다면 그걸 받아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다.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난다면 말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생이 들의 꽃처럼 잠시 피었다 지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말씀한다. 이 세상의 삶은 잠시이고 죽음 이후 진짜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히 9:27
어쩌면 우리 영혼은 이와 같은 심판이 있음을 알기에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라도 맞이하게 될 그 죽음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 담대하게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기를 원하신다. 악한 영들의 정죄 앞에서 “내가 죄인인 건 맞지만 예수님의 보혈로 의로움을 입었어”, “예수님이 내 죗값을 다 치르셨어”라고 담대히 외치며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그 천국 안으로 들어가길 바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날이 오기 전에 우리가 우리의 죗값을 치르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며 이 거친 광야 길을 힘차게 걷길 바라고 또 바라신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거친 여정을 이끄는 모세를 인격적으로 만나주시며 그 길에 동행하셨다.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 출 33:11
마음이 통하고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는 친구와 교제할 때만큼 좋은 때가 어디 있을까.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런 친구와 만나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고 나면 속이 뻥 뚫리고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와 같은 친구가 되어주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라고 그렇게 안 해주실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그와 같은 친구가 되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친구가 되어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이어가길 하나님께서도 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께 와서 우리 마음의 아픔과 슬픔도 나누고, 불안과 불안정한 생각도 나누고, 아둔한 지식도 나누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할 때 그분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과 아름다운 성품과 믿음의 의지를 우리에게 불어넣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과 평생 동행하는 사람들이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의 인격을 닮은 새사람으로 변화 받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여러분은 옛사람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 골 3:9,10 새번역
수년 전 어느 날, 나는 마침내 꿈속에서도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는 은혜를 누렸다. 그 순간을 통해 나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연합이야말로 세상 어떤 악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도임을 알게 되었다.
내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다 동원해 하나님께 나를 던지는 순간, 그분은 그 넓고 깊고 따뜻한 인격으로 나를 품으시고 나를 새롭게 하셨다. 내 평생 절대로 풀지 못할 거라 여겼던 문제도 그 순간 스르르 풀리게 하셨다.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죽음에 대한 마지막 날의 공포와 두려움도 걷어주셨다. 언제 죽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 품에 안기는 진정한 삶의 시작임을 그때 이후 꿈 속에서도 믿게 하셨다.
그 뒤로 내 인생길에는 내 친구가 되어주시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문제가 생기면 절친에게 전화하듯 하나님께 나아가 미주알고주알 내 마음과 생각을 풀어놓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는 그 시간이야말로 참된 교제이자 사귐이요 안식의 시간임을 알 수 있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라는 고백이 왜 나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예배당이나 골방에서만이 아니라 혼자 운전하거나 산책할 때도 내 생각과 감정을 털어놓으며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 풀어가곤 한다. 그러면 나를 엄습하던 어두운 그림자가 어느새 걷히고 하나님의 온화한 빛이 나를 에워싸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야말로 어둠의 진영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능력의 기도요 영적인 기도임을 때마다 알게 되는 것이다.
— 한근영, 『나는 기도하기로 했다』 —
>>> 삶과 신앙 (7/3/2022)
내가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꾸기 시작하면…
많은 사람이 꿈을 꿉니다.
그런데 우리의 꿈이 실은 나만의 야망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꿈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루어 달라고 조릅니다. 우리가 스스로 먼저 꿈을 정하고 ‘하나님, 제 꿈을 꼭 이루어주세요’라고 기도하는데,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도 있고 안 들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꿈을 이루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을 때 한 명 한 명마다 꿈이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꿈을 망각한 채 나만의 세상적인 꿈을 꿉니다. 세상의 성공과 세상의 만족과 세상이 주는 것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하나님이 나를 만드실 때 어떤 꿈을 꾸셨는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어떤 꿈을 꾸어야 합니까?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꿈을 반드시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그 꿈을 나의 꿈으로 품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것이 그 꿈은 하나님이 반드시 직접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하나님께 꿈을 받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꿈을 꾸다가 그 꿈이 깨지면 너무 괴로워서 그럴 때마다 ‘하나님 살아 계신 것 맞아요?’라고 투덜댑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세상적인 꿈이 깨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짜 좋은 것을 주고 싶으셔서 우리의 세상적인 꿈을 깨뜨리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꿈이 깨지고 하나님과 내가 같은 꿈을 꾸기 시작하면, 그다음부터 우리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는 다 잘하지 않습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말을 다들 알 것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우리의 초점을 너무나 많이 흐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찾아서 집중하면 반드시 성과가 나고, 성과를 내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신다는 것을 마귀들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를 자꾸 꼬여냅니다. 우리가 달란트를 찾아내는 것을 방해하고 달란트에 집중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기 달란트를 모르면 신문 보고, 인터넷 보고, TV 보고 누구는 뭐해서 대박 났고, 누구는 어디서 성공했다는 얘기에 홀려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서 삶을 허비하고 맙니다. 각자 자신의 달란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여 자기 달란트가 무엇인지 응답받길 바랍니다.
특히 부모들은 부모의 관점에서 성공의 길로 달려가도록 자녀를 재촉할 것이 아니라, 자녀의 달란트가 무엇인지 알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녀가 자신의 달란트를 일찍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 차길영, 『자녀의 꿈을 돕는 부모의 기도』 —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돕고 싶으셔도
도우실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