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용어 바르게 사용하기

지금까지 교회와 그리스도인 사이에 사용된 언어 중에는 비성서적 혹은 비기독교적 배경의 낱말이나 용어들이 많이 있었다. 한국어의 잘못된 사용으로 인한 영향도 많이 있다. 때로는 언어의 표현과 사용이 우리의 생각에 스며들기도 하며, 그것이 습관이 되어 신앙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기독교적 용어가 아닌 타종교 또는 미신과 주술적용어들을 무심코 사용하는 것은 간단히 넘기거나 관습으로 묵인할 문제는 아니다.

이에 섬김의 교회 교육위원회에서 올바른 신앙적 용어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하의 내용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산하 총회교육부 「기독교용어 연구위원회」에서 연구하여 2003년 발표한 [변경된새로운 기독교 용어]에서 일부 발췌한 것이다. 언어적 습관은 단숨에 고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개인별로 고쳐야 될 사항이 다를 것이므로, 먼저 그런 변화가 우리 개인신앙의 성숙에 필요한 부분임을 인정하고 훈련해야 한다. 나아가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Ⅰ.기도와 관련된 용어

1. 당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은총으로..”, “하나님 아버지, 당신께서 세우신 이 교회를..”<
이와 같이 하나님을 ‘당신’이라 부르는 것을 종종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만일 어느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당신이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말은 의당 다음과 같이 고쳐서 말해야 한다. “아버지,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이것을 샀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우리말 2인칭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당신’은 다만 3인칭에서는 극존대어로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3인칭이 될 수 없고 우리 간구를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에 해당되므로 ‘당신’이란 호칭은 안 된다.(제86회 / 2001년)

2.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 ⇒ 기도 드립니다(기도합니다)
기도를 끝낼 때 ‘기도하였습니다’ 혹은 ‘기도드렸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와 같이 동사 ‘기도하다’의 시제를 현재형으로 써야 하는데 요즈음 이를 ‘기도하였습니다’, ‘기도 드렸습니다’와 같이 과거형을 쓰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는 것을 본다. 이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5분이나 10분전에 기도를 시작했으므로 간구 한 모든 말들은 문법적으로는 이미 과거 또는 현재완료가 되므로 동사 ‘기도하다’의 과거형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각도에서 볼 때 바람직하지 않다. 기도(祈禱)는 글자 그대로 그 핵심이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간구다. 간구의 내용은 소원이며 소원은 미래 지향적이다. 이러한 미래 지향적인 소원을, 즉 우리의 바람을 ‘기도하였습니다’로 끝낼 수는 없다. 기도의 핵심인 간구의 내용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끝내는 것이 옳다.(제86회 / 2001년)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 주님. 하나님 아버지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것은 어법상의 문제가 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2인칭에는 존칭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호격 조사 ‘-아’나 ‘-야’가 붙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친구 사이나 아랫사람에게는 “복동아.”, “철수야.”와 같이 부를 수 있지만 손윗사람에게는 호격 조사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시여.”, “할아버님이시여.”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이시여’를 붙여서는 안되고 그저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 (제86회 / 2001년)

4. 우리 성도님들이 ⇒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聽者)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바른 표현이 못된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 형님이 가셨어요.”, “아버지. 누님이 오셨어요.”라는 문장을 살펴보자. 첫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할아버지‘와 주어인 ‘형님’ 및 화자(話者)인 손자 ‘나’다. 여기서 청자인 ‘할아버지’가 최상위자이므로 ‘형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 없다. 둘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아버지’와 주어인 ‘누님’과 화자인 ‘나’다. 여기서도 청자인 ‘아버지’가 최상위자이기 때문에 ‘누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할아버지. 형이 갔어요.”, “아버지. 누나가 왔어요.”

공중기도에서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일한 입장,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즉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격이다. 그러므로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이라 존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혹은 ‘우리 교회 성도’등으로 바꾸어야 한다.(제86회 / 2001년)

5. 대표 기도 ⇒ 기도 인도
예배 순서 가운데 기도 시간이 되면 예배 인도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000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000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000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겠습니다.”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온 회중이 머리를 숙여 무언의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할 경우 우리는 이를 ‘기도 인도’라 부르는 것이 좋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다. 이 기도 인도자는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는 생각까지도 그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기도 인도자는 대표로 뽑힌 어느 운동 선수와는 다르다. 그는 대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온 회중의 생각을, 즉 그들의 소원을 보다 깊게, 보다 하나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기도 인도자가 기도할 때 회중은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없다. 만인제사장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사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도 기도에 있어서 ‘대표, ‘대신’은 불가하다. 그러므로 ‘대표기도’, ‘대신하여 기도’는 ‘기도 인도’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제86회 / 2001년)

6.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어 있다.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제86회 / 2001년)

7. 참 좋으신 하나님 ⇒ 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요즈음 ‘참 좋으신’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이것은 재고를 요하는 말이라 하겠다. 즉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말들을 보면 ‘거룩하신’, ‘만유의’, ‘생명의’, ‘신실하신’, ‘의로우신’, ‘자비하신’, ‘영원하신’,

‘위에 계신’, ‘능력이신’, ‘진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사유하시는’, ‘은혜로우신’, ‘보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홀로 하나이신’, ‘천지를 지으신’… 등과 같이

대부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가 된다. 즉 ‘참 좋으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과는 판이한 뜻이 된다.), ‘미운 하나님’, ‘야속한 하나님’, ‘귀찮은 하나님’…등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제86회 / 2001년)

Ⅱ. 예배, 예식과 관련된 용어

8. 사회자 ⇒ 인도자(예배시)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사회자라고 하면 마땅히 일반 회의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예배가 아닌 결혼예식이나 임직식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에서는 진행을 맡은 사람을 사회자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단순한 사회자(presider)의 개념을 넘어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로 부름이 타당하다. 인도(引導)의 사전적 의미는 “알려주며 이끄는 일”이므로 예배 인도라는 말을 회의에서의 사회와 구분지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본 교단 1998년 총회에서 통과된 표준 예식서에는 모든 예배의 진행자는 인도자(引導者)로, 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로 표기하였음을 밝힌다.(제86회 / 2001년)

9. 성가대 ⇒찬양대
우리 한국 교회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전담한 찬양대를 최근에 ‘성가대’로 많이 부르고 있다. 이 말은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면서 「성가곡집」이라 부르는데서 보편화되었다.실제로 1960년대까지 우리 한국 교회는 찬양대라는 이름이 통용되었고 성가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聖歌隊)’가 그대로 직수입되면서 성경에도 없는 ‘성가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성가’라는 말은 불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서 부르는 노래이며(religious songs), 우리의 ‘찬양’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행위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성가대’라는 용어는 성경의 정신과 우리의 고유한 이름인 ‘찬양대’로 바꾸어 부름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10.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용불가(설교시)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한 인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바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빌고 원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표현이 설교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 타당한가를 연구 검토시킨 바 있는 본 교단 총회는 1981년 65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첫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다.
셋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의 사용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안 되게 만들어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다.
넷째, 설교의 근본 목적이 흐려지고 회중들에게는 설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아멘”을 하게 하는 식으로 유혹되기 쉽다.
연구위원회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설교시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를 하지 않도록 건의하였고 총회는 이를 아무 이의 없이 통과시킨 바 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서 한국교회의 설교 사역을 바로잡는 일이라 보아 설교시에 이 말의 사용을 억제함이 타당하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11. 대예배 ⇒ 주일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큰 예배가 있고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가 예배일진대, 거기에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를 지칭하여 대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 때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대예배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대예배가 있다면 소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소예배일 수가 없다.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한에 있어서, 어떤 예배도 소예배일 수가 없다. 다만 예배일뿐이다. 물론예를 들어 주일 예배라든지, 주일 저녁(오후) 찬양 예배라든지, 혹은 시간에 따라 1부시간별로 예배를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예배, 2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예배”라는 용어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제86회 / 2001년)

12. 열린 예배 ⇒ 열린 집회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1990년대 이후에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래 이 예배는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로 알려진 집회의 형태로,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통하여 소개되면서 한국 교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본래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구도자”라는 부자연스러운 번역 대신에 1990년대 초에 유행하던 “열린”이라는 단어로 의역한 것으로 “구도자의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열린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구도자의 집회를 말한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예배라기보다는 “전도집회”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 혹은 구도자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예배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사랑에 응답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배의 기본 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받거나 추구하는 데 있지 않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의 행위여야 하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에 예배가 회중지향적이 되고,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 드림에 있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그 예배를 통해서 얻어내는데 목적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영혼구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위한 집회이지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차라리 “열린 집회”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많은 교회에서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한 “구도자의 집회”와는 별도로 신자 중심의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즉 구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집회로서의 열린 예배의 개념보다는 기존 신자들에게 새로운 생동감을 주는 예배로서의 열린 예배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이런 예배는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전통적인 예배를 벗어나서 잔치적이고 시각적이며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많이 격려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인데, 이를 가리켜서 “열린 예배”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 자체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능하면 “열린 예배”라는 용어의 사용은 삼가는 좋겠다. 의미상으로도 “열린 예배”가 있다면 “닫힌 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무엇이 열린 예배이고, 무엇이 닫힌 예배인가? 또 무엇에 대해서 열려있고, 무엇에 대해서 닫혀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굳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기 있는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열린” 이라는 용어보다는 “젊은이 예배” 혹은 “찬양 예배” 등으로 사용하고,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13. 예배봐준다 ⇒ 사용불가
흔히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개업예배를 봐준다” “구역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응답 행위이다. 즉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준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예배는 구원의 은총을 깨달은 내가, 성도들과 함께 하나님께 감사와 감격으로 드리는 행위요, 응답하는 행위이지,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드리거나 봐주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점을 봐준다”는 미신적인 용어를 상기케 하는 “예배봐준다”는 표현은 예배 신학적으로 볼 때에 받아들일 수 없는 잘못된 용어이다.
(제86회 / 2001년)

14. 준비찬송 ⇒ 사용불가
찬송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곡조가 있는 시이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 곡을 붙인 성도들의 경배의 표현이며, 기도이며, 때로는 성도들의 신앙고백과 결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총을 생각하고 감사의 응답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모이면 열심히 찬송 부르는 것을 성도의 바른 자세로 알고 찬송을 열심히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찬송의 생활이 습관화 되다보니 때때로 찬송의 목적이 변질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준비찬송”이라는 말에서 찾아보게 된다. 교회에서 “다같이 준비 찬송을 부르면서 앞자리부터 채우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찬송을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이런 말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찬송을 시간을 메우기 위한 수단이나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준비찬송”이라는 용어는 마땅히 사용해서는 안 된다.(제86회 / 2001년)

15. 예배 / 예식 / 기도회 ⇒ 구별사용
한국교회는 어느 나라의 교회보다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이다. 그래서 예배와 각종 기도회로 한 주일에 여러 차례 모인다. 주일 낮을 비롯하여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밤, 그리고 매일 새벽 등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은 세계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모임에 예배라는 명칭을 붙여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돌, 회갑, 추모 등의 모임에도 예배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배와 예식과 기도회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인간을 위한 모임이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배와 예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예를 들어 돌, 회갑, 추도, 입학, 졸업, 결혼, 입당,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를 할 경우에는 예식으로 표현하고, 예배와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목적으로 모이는 수요 저녁 모임과 금요 철야 혹은 심야 모임 그리고 매일 새벽 모임 등은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으로 명시해야 한다.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를 통과한 「표준예식서」의 정신을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주일예배, 주일저녁 찬양예배, 교회학교(주일학교)예배,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 경건회(각종 회의 시작 전) (제86회 / 2001년)

16. 헌금 ⇒ 봉헌
한국 교회의 예배 순서 가운데 “헌금”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이 순서는 원래 봉헌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 속에서 봉헌의 순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봉헌의 의미는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봉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순서를 “헌금”이라는 용어로, 즉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지칭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봉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마땅하다.(제86회 / 2001년)

17. 축제 ⇒ 잔치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축제’를 “축하하고 제사지냄”이라고 단순하게 풀이하여 실어 놓았으나 이가원과 임창순의 [東亞漢韓中辭典]에서는 “축제란 제사 이름이니, 묘문(廟門) 안과 밖에서 이틀에 걸쳐서 드리는 묘문제로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지내고, 그 다음날 사당 밖에서 지내는 제사이다“라고 정의해 놓았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마을 제사를 영어의 Celebration 과 Festival 같은 축하행사를 보면서 자신들이 제사에서 마음놓고 떠들고 소리지르면서 춤추는 고유한 행사와 모양새가 비슷함을 알고, 1928년에 ‘축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그들의 사전에 도입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은 축제의 문제점을 보면서 이제는 성경대로 잔치, 또는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등으로 사용할 것을 권장한다. 예를 들어 성령 축제à성령 잔치, 부활절 축제à부활절 절기 행사, 성탄 축제à성탄 축하 행사 등이다. 참고로 공동번역에서는 57회, 표준 새번역에서는 13회에 걸쳐 무분별하게 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나 개역 성경과 개역 개정판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힌다.(제86회 / 2001년)

18.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이 주신 복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에 관한 표현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축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상과 같은 표현들을 볼 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복을 비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다음의 성구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비는[祝福]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降福] 분임을 잘 밝히고 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지라.”(개역 한글판 창 12:3)
“그가(멜기세덱)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개역 한글판 창 14:19)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또는 “복 내려(베풀어) 주시옵소서.”로 바로잡음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Ⅲ. 장례와 관련된 용어

19. 소천(召天)하셨다. ⇒ 소천받았다/별세(別世)하셨다/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최근에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의 죽음을 알리는 광고에서 “고 ooo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셨다.”는 문장을 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교회에서 발표한 이러한 광고는 매우 부끄러운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교회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표현한다. 비록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소천을 받았다.”로 해야 한다.
그러나 이토록 실수가 많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불러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경우는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20.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고인의 명복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어느 장례예식에서 목사가 “이제 침묵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시다.” 하는 경우도 있었고, 조문객이 문상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 인사를 한다.
그러나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이 말은 불교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거기서 받게 되는 복을 가리킨 말이다. 곧,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불교의 내세관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지금껏 교회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용어 대신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든지, 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와 같은 말로 유족을 위로함이 타당하다.(제86회 / 2001년)

21. 미망인 ⇒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미망인(未亡人)이라는 용어는 순장(殉葬)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순장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강제로 죽여서 먼저 죽은 시신과 함께 묻는 장례 풍속을 말한다. 이러한 풍속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특히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분신 자살하여 순장되는 ‘사티..라는 풍습이 1829년 법으로써 금지되기까지 존속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22대 지증왕 3년(주후 502년)에 왕명에 의하여 순장 금지되기까지 이러한 제도가 존속되었다.
이런 순장제도가 성행할 때나 쓰일 수 있었던 ‘미망인’ 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어 보면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 된다. 이러한 용어의 뜻을 알았을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임을 깨닫게 된다.(제86회 / 2001년)

22. 영결식, 고별식 ⇒ 장례예식
인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행하는 예식을 칭하는 용어로서 ‘영결식’, ‘고별식’, ‘발인식’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그러나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우리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영결식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며 고별식은 ‘작별을 고한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교리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이러한 표현은 적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발인식은 시신을 담은 상여가 집에서 떠남을 뜻하기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이러한 용어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에서는 표준예식서를 통하여 이미 장례예식으로 정리하였기에 이제는 모두가 ‘장례예식’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해야 한다.(제86회 / 2001년)

Ⅳ. 회의와 관련된 용어

27. 증경 ⇒ 전(前)
‘증경(曾經)’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고대시가에 기원을 둔 특수한 말이다. 증(曾)은 ‘일찍이’라는 뜻이고, 경(經)은 ‘지내다’라는 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찍이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고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의 작품 <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증경’이라는 시어가 나오는데, ‘증경학무도방년(曾經學舞度芳年)’ (일찍이 춤 배우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네) 정도이므로 그다지 심오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한자어를 전통적으로 존중하며 차용하기 좋아했던 선비들이 이런 희귀한 용어를 우리나라에 들여왔고, 한국 교회도 교단을 위하여 일한 경력이 있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자 이 단어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는 이 용어를 전혀 쓰지 않고 있어 ‘증경대통령’ ‘증경총장’ ‘증경사장’이라는 호칭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교회에서만 ‘증경총회장’ ‘증경노회장’으로 부르며 심지어 ‘증경청년회장’이라고까지 하여 이 단어를 남용하는 실정이다. 신분을 존중하기 위해 중국의 고대어를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전총회장’이라고 하여

존대의 정도가 손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제86회 / 2001년)

Ⅴ. 교회생활과 관련된 용어

29. 당회장 ⇒ 담임목사. 당회장(당회 회의 때)
많은 교회에서 담임목사를 당회장으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예배순서를 실은 주보나 교회 게시판에 당회장 000 목사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다.
원래 당회장이란 영어의 Moderator로서 토론이나 회의의 사회자 또는 중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그래서 당회 회의를 주관하는 목사를 비롯하여 노회와 총회의 회의를 주관하는 사람을 모두 ‘모더레이터’라고 부른다. 그러기 때문에 당회를 주관하는 순간에는 목사를 ‘당회장’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그 외의 시간이나 장소에서는 ‘목사’ 또는 ‘담임목사’로 부름이 타당하다. 이 호칭이 바로잡아지지 않으면 장로를 언제 어디서나 ‘당회원’으로불러야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제86회 / 2001년)

30. 예수 ⇒ 예수님, 성령 ⇒ 성령님
우리의 언어문화는 윗분들을 호칭할 때 ‘님’자의 사용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특히 자신이 섬기는 신의 존재를 호칭할 때는 ’님‘자 또는 그 이상의 존칭어를 사용한다.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하게 되어있다. 성삼위가 동격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한동안 논쟁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그러나 325년 니케야공회의에서는 제2 위격 예수님의 신성문제가 확정되었고,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제3 위이신 성령님의 신성문제를 확정하였다. 이로써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성삼위는 동격이신데 어느 위에는 ‘님’자를 붙여 호칭을 하고, 어느 위에는 그렇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호칭할 때도 ‘님’자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성령님의 역사’로 언어의 순화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제86회 / 2001년)

31. 전야제 ⇒ 전야 축하행사
이 용어는 ‘축제’라는 말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부활절 축제’ ‘성탄 축제’라는 용어를 ‘부활절 절기행사’ ‘성탄 축하행사’ 등으로 바꾸어 써야 할 필요성을 밝혔으므로, 부활절 전날 밤에 갖는 행사도 당연히 ‘부활절 전야제’ 대신 ‘부활절 전야 축하행사’라고 불러야 한다.
전야제는 전날 밤에 여는 축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종 제사가 새벽에 열리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앞날의 밤은 이것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대보름이나 중추절 같은 명절의전날은 밝은 달을 바라보며 축하의 행사를 펼치기에 적절했었다.
성경에는 어떤 행사에서 전야에 모여 축하 자리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현대의 교회에서는 부활이나 성탄처럼 새벽에 이루어진 일을 축하하기 위한 전야 행사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행사를 가리키는 용어는 ‘전야제’ 대신 ‘전야 축하행사’라고 하여 제사의 성격을 배제하고, 밤 깊은 시간까지 축하한다는 순수한 의미를 담는 것이 좋겠다.(제86회 / 2001년)

32. 사모 ⇒ 사모님
예로부터 스승을 높여 사부님이라 했으며 이에 걸맞게 스승의 부인을 높이어서 사모님이라 불렀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는 목사 부인도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다. 선생이 자신을 사부라 부를 수 없듯이 선생이나 목사도 자기 부인을 사모라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어느 목사가 자기 부인을 가리켜 사모라고 한 다음과 같은 표현은 잘못 된 것이다. “우리 집 사모는 다녀왔지요.”
또한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들도 자신을 사모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최근 목사 부인들이 모여서 “사모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사모회”는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목사 부인들이 자신을 사모라 지칭했기 때문이다.
이 “사모”는 주로 제자나 평신도들이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을 높여 불러 주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사용 될 때는 “사모님”이 될 수밖에 없다.(제86회 / 2001년)

33. 천당(天堂) ⇒ 하나님의 나라, 천국, 하늘나라
“예수 믿고 죽으면 천당 간다.”, 또는 죽은 사람을 가리켜 “천당에 갔다.” 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되는데 ‘천당’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성경에는 물질로 된 유형의 집 또는 공간으로 이해하기 쉬운 천당의 개념이나 서술이 없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이 땅의 종교 문화를 형성한 타종교에서 유래된다. 한민족의 일반적인 종교개념이나 사전적 풀이에서는 천당을 “하늘 위의 신의 궁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극락세계인 정토(淨土), 즉 깨끗한 국토, 곧 부처와 보살이 사는 번뇌의 굴레를 벗어난 아주 깨끗한 세상을 천당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천당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교도들이 즐겨 쓰는 ‘천당’이라는 어휘보다 한글성경에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만이 온전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 또는 ‘천국’, ‘하늘나라’ 로 사용함이 적절하다.(제87회 / 2002년)

34. 입신(入神) ⇒ 사용불가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기도하는 열심은 매우 소중한 특성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한 기도생활은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를 개인의 신앙생활에서 각각 달리 경험하게 한다. 그러는 중에 여러 형태의 은사를 받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신학적인 기초가 다져지지 않은 기도원 등에서 기도에 집중하다가 “입신(入神)”을 했다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입신(入神)이란 무속종교의 표현으로서 무당에게 신이 내려 인간으로서의 자아의식을 상실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사전에서는 입신(入神)을 한 인간이 영묘(靈妙)한 경지에 이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신의 경지에 이름” 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표현은 천주교가 주로 사용한 공동번역의 민수기 11장 25~27절에서 유일하게 사용했을 뿐 본 교단이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개역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영을 내리실 때” 또는 “영이 임하실 때”로 표현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어떤 경우도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그 분의 경지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입신(入神)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용어이다.(제87회 / 2002년)

3.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 사용불가
기도하는 중에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영원히 존재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도 살아있다는 표현은 ‘언젠가는 살아있지 못할지 모른다’ 또는 ‘아직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등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극히 제한하는 표현이 된다.(제87회 / 2002년)

4.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 룻기, 욥기, 잠언, 아가
룻記書, 욥記書, 箴言書, 雅歌書 등으로 말하거나 쓰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그 자체에 記, 言, 歌 등이 있어 ‘書’ 자가 의미상 과잉표현(redundancy)이 되므로 그렇게 쓸 수가 없다. ‘創世記’ 나 ‘출애굽記’ 에 ‘書’ 자를 붙여 ‘創世記書’로나 ‘출애굽記書’로 쓸 수 없는 것과 같다. ‘啓示綠’에 ‘書’ 자를 붙일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현재 우리말 성경이 바로 쓰고 있으며, 같은 한자를 중국어나 일본어 성경 책명에서 그렇게 쓰지 않은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제87회 / 2002년)

5.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많은 사람이 시편의 장 절을 나타낼 때, 시편 몇 장 몇 절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몇 장과 몇 절은 산문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의 구분을 신,구약의 다른 책의 구분을 나타내는 ‘장’ 과는 달리 ‘편’을 쓰는 것은 같은 한자를 쓰는 중국어 성경이나 일어 성경에서도 우리나라와 같다.(제87회 / 2002년)

6. 하나님의 몸 된 교회 ⇒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하나님의 몸 된 교회’란 말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가 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와의 관계에서 비유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지,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 온 몸의 지체가 머리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과 같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교회론의 한 단면이다. 그는 그리스도론과교회론을 결합시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자기의 오른 편에 앉히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고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천명하고 있다.(엡 1:20~23) (제87회 / 2002년)

7.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 ⇒ 사랑하는 하나님

설교를 할 때 흔히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라고 하는 말은 말하는 이가 그 동사 ‘사랑하시는’의 주체가 될 때에는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말하는 주체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존대를 나타내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기도를 할 때에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란 말도, 그 ‘사랑하시는’이란 동사의 주체를 말하는 이 자신을 가리키는 뜻으로 말하는 경우라면, 즉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옳지 않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경우를 자세히 생각해 보면, 의미는 흔히 ‘사랑하시는 시민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경우처럼 그 사랑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니고 말하는 이(화자)인 것이 분명하다. 만일 사랑하는 주체가 하나님이라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라 해야 분명하다.(제87회 / 2002년)

8.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예배로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 ⇒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하겠습니다.
“다같이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예배시에 성도들은 결코 주기도문을 단순히 외는(외우는) 것, 즉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한 마디 뜻을 바로 새기면서 음송(吟誦)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른 표현은 “다같이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 “다같이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도 그와 같은 경우로서 옳지 않다. 즉 “다같이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라고 해야 한다. “주기도문을 외운다”라는 표현이나 “사도신경을 외운다”라는 표현은 그 자체가 주기도나 사도신경을 진지하게 뜻을 생각함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소리내어 외는 행위이다.(제87회 / 2002년)

9.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기독교에서 “중보”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있는 단 한 분의 중보자이시다.(딤전 2:5)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영원 전부터 계시고 성육신 이전에도 선재(先在)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에도 중보자이셨다.(요 1:3,10; 골 1:16; 히 1:2)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행위가 가장 명백하고 독점적으로 드러난 곳은 바로 십자가에서의 구속사역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중보는 이미 완성된 구속의 역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구속의 열매에 동참하고 있는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끊임없이 의존하며 살아간다. 예컨대, 믿는 자들이 드리는 감사와 기도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진다.(요 14:14; 롬 1:8; 골 3:17; 히 13:15)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알 수 있다.(눅 22:69; 골 3:1; 히 12:2) 하늘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중요한 일면은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롬 8:34; 히 7:25)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종말에 있게 될 부활과 심판의 때에도 계속될 것이다. 즉 부활과 심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날 것이다.(요 5:28~29, 고전 15:22, 52~54; 살전 5:16; 마 25:31~46; 요 5:27; 행 17:31)
그러므로 중보기도라는 표현은 우리가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으며, “이웃을 위한 기도”, “중보적 기도”, 라는 표현으로 사용함이 적절하다.
중보적 기도는 중보자의 기도(중보기도)와는 다른 “나” 아닌 “남”을 위한 기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제87회 / 2002년)

10. 제사, 제단, 제물 ⇒ 예배, 성단, 예물
구약의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소나 양을 잡아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제물의 피를 단에 뿌린 뒤 그것을 불살랐다. 이것이 곧 레위기의 제사요, 이 단이 바로 모세의 제단이며, 죽임을 당한 소나 양들이 희생의 제물이었다. 이 제사는 마침내 모든 제물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완성되었고, 신약시대에 들어 예배로 내용과 형식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교회는 지금도 예배를 제사의 의미로 이해하며 다음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게 하옵소서.”, “기도의 제단에 나와서, 작은 제물을 바칩니다.”
한국 문화의 특징으로서 제의적 현상이 강하게 나타나는 점을 지적한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신화, 민속, 종교의식 등이 모두제단근처에서성육한것이라고보고있다. 구약의제사용어를예배속에그대로사용하면서도부자연스러움을깨닫지못하는것은한국교회역시제의적인문화의영향을벗어나지못했다는증거다. 제사는‘예배’로, 제단은‘성단’으로, 제물은‘예물’로바꾸어야한다.
한편, 제단을‘강단’으로부르는경우가많으나이것은성례전을염두에두지않고설교만이루어지는단이라는생각에서나온말이므로‘성단’이라함이적절하다.(제87회 / 2002년)

11. 영시(0)예배, 자정예배송구영신예배
영시(0시)는하루가끝남과동시에또하루가시작되는밤 12시정각, 곧자정을가리키는시각이다. 교회가이시각에의미를부여하고예배드리는것은한해가지나가고다시시작하는연말연시의자정에국한된다. 그러므로연말연시의 0시에드리는이예배를영시예배나자정예배라고부르는것은옳지않다.
이예배는감리교회의존웨슬리가언약갱신예배(Covenant Renewal Worship)라는이름으로소개하였는데새로운해를맞아하나님앞에언약을세우는의미가있기때문이었다. 그러나이예배가널리알려지기시작하자날짜의특성을강조하여야성회(Watch Night Worship)라는이름이나왔고, 한국교회에서는단순히시각만을앞세워 0시예배라부르고있다.

예배가시작되는시각을예배의명칭으로사용할수는없다. 낮11시예배, 밤7시예배가예배의이름이될수없듯 0시예배역시마찬가지다. 또, 0시는예배시작시각도아니다. 교회에따라밤 11시나 11시30분에시작하여고백의시간을갖고새언약을세우는중에새해를알리는소리를듣게되는것이일반적이다. 묵은해를보내고새해를맞는일을가리켜‘송구영신’, 또는‘송영’이라한다. 이의미가예배의성격및내용과일치하므로‘송구영신예배’라고부르는것이좋겠다. ‘송영’은‘송구영신’의 준말이지만, 찬양에서의‘송영’과동음이어서혼란을가져올우려가있으므로사용하지않는것이좋다.(제87회 / 2002년)

12. 수양회신앙수련회
절기가바뀌면교회마다행사를계획하고실행한다. 특히기도원이나수양관이있는교회는그장소를활용하여행사를펼치는데그내용이점차새로워지고다양해져말씀집회, 찬양콘서트, 각종이벤트, 세미나와워크숍등을포함하게되었다.

아무리수양관에서행사를치른다하더라도, 이런행사를전통적용어인수양회라고부르기에는이미그성격이크게바뀌고말았다. ‘수양’이란도덕적품성을닦는다는의미를내포하고있기때문에소극적이고정적인느낌을주는이용어를가지고서는현대의다양한행사내용을다담을수없다.
교회의공동체훈련이라는목적을잘드러내면서다양한행사를포괄할수있는용어로‘신앙수련회’가적합하다.‘수련’은마음과몸을잘닦아서익힌다는사전적인뜻을갖고있으며, 특히정신을닦고기르는데사용하는종교적용어로도익숙하다. 여기에신앙을성장시키기위한뚜렷한목표를앞에내세우게되므로가장합리적인명칭이다.(제87회 / 2002년)

13. …… 기도로폐회합니다 …… 기도로예배를마칩니다, ……기도로기도회를마칩니다.
예배가끝날즈음해서예배인도자가이제“○○○목사님축도로폐회합니다”, “○○○장로님기도로폐회합니다”또는“○○○집사님이폐회기도를해주시겠습니다”와같은안내를하는것을종종볼수있는데이것은잘못된것이다. 이것은교회안의각종회의에서그회의가끝날무렵의장이“○○○장로님의기도로폐회합니다”, “폐회기도를○○○집사님이해주시겠습니다”같은안내를하는것을무의식중에예배에서도사용한것으로예배가회의가아닌이상반드시이를바로잡아야한다. 주일날드리는주일낮예배는물론새벽기도회나수요기도회, 금요밤심야기도회등도비록우리가관례를따라○○회라고는하지만이들은바로예배의일종이므로이때에도“○○○의기도로폐회합니다”와같이말하는것은잘못된것이다. 물론교회밖어느곳에서드리는예배든지예배가끝날때위와같은안내를하는것은안된다. 예배는어느경우나‘○○회’가아님을분명히새겨둘필요가있다.(제87회 / 2002년)

14. 예배의시종을의탁하옵고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기도로
예배드릴때기도인도자가기도의마무리를하면서‘예배의시종을하나님께의탁드리며예수님이름으로기도합니다.’와같은표현을하는것을종종볼수있는데이‘예배의시종을하나님께의탁드리며’는바람직한표현이못된다.

의탁은‘어떤것에몸이나마음을의지하여맡긴다’는의미다. 내가주도적으로무엇을하는것이아니고내가할일을다른사람에게맡겨서거의‘그가대신한다’는의미를가지고있다.
우리가예배드리는것은하나님이나에게베풀어주신사랑과은혜에감사하면서하나님께최상의가치를돌려드리는응답의행위인데성령님의도우심으로신령과진정으로드려야할이예배를도리어하나님께맡기고나는방관자가된다는것은어불성설이다. 그러므로‘이예배를하나님께의탁하면서’는적절한표현이아니다. 필요할시는“이예배를주장하시고”또는“이예배를성령님께서인도하시고”로쓸수있다.(제87회 / 2002년)

15. 태신자전도대상자
생소한용어가교회안에서쓰이고있는것을보는데바로‘태신자’가그것이다.
이말은믿지않는어느사람을지칭하면서장차태어나게될신자라는의미로즉태안에들어있는신자라는의미로쓰이고있다. 다시말하면내가전도해서꼭신자를만들겠다고속으로작정한어떤특정한사람을‘태신자’라고하고있다.
임산부의태안에들어있는생명체를태아라부르는것에연유하여태안에들어있는신자라는뜻으로‘태신자’가쓰이고있는데이것은매우부적합한용어이다. 태아가임산부의몸속에들어있는

생명체일진대그러면‘태신자’는과연누구의뱃속에들어있다는말인가. 만일‘태신자’를용납한다면장차목사나장로가되기를바라고기도하는그사람을‘태목사’, ‘태장로’라해도괜찮다는무리한결론에이른다. 그러므로‘태신자’라는용어대신‘전도대상자’로사용하는것이좋다.(제87회 / 2002년)

16. 안집(‘안수집사’의줄임말) 사용불가
집사는교회의택함을받고안수하여임직한이들을가리키는직분인데, 서리집사와구별하기위하여안수집사라부르는것이일반화되었다. 그런데그명칭을줄여‘안집’이라는생소한말로부르거나기록하는사례가생겨났다.
이는사회에서유행을타고있는두문자어(acronym) 사용이교회에스며들어온결과라하겠다. 신문과같은활자매체는지면이한정되어있기때문에되도록줄여쓰기위한목적으로무리한약어를만들어낸다. 이런현상이간결한것을선호하는현대인들의성향과맞아떨어져, 단체이름줄여말하기(예, 나라사랑실천본부→나사본), 일상어재미있게줄이기(예, 바라보고싶은사람과천하에재미없는사람→바보와천재) 등언어생활에혼란을줄수있는일들이일어나고있다.

교회에서도직분의호칭을줄여말하는현상이발생했다. 대표적인것이부목사를‘부목’이라고부르는경우인데이는교목, 군목, 경목같은준말의영향을받은것으로서바람직하지는않지만의미가통하고있다. 그러나안수집사를‘안집’이라고하는것은대단히무리한줄임말이다. 만약이런두문자어를받아들인다면원로목사를‘원목’, 은퇴장로를‘은장’이라부를수도있다는말이된다. 동의어가양산되고, 어감이이상해지며, 의미를모르는사람들의위화감을조성하게되는것이줄임말의폐단이다. 교회공동체의순수성을해칠우려가있는‘안집’같은생소한두문자어는사용하지말아야한다.(제87회 / 2002년)

17. 주님의이름으로문안드립니다. 주님안에서문안합니다. 주님안에서문안드립니다.
‘이름’은누구를대신하여부르는말또는누구를대신하여지시하는말이므로, 그사람의권위와인격의임재를동반하게된다. 그러므로‘누구의이름으로무엇을한다’고말할때, 그서술어는권위와위엄과인격의동반을의미요소로하는용어이어야한다. 그런데, 특별히하나님이나예수님의이름은더할수없는권위와위엄과인격과능력을동반하는것이므로단순히상대방의안부를묻는다는뜻인‘문안’이라는말과어울리는것은어색하다. 다시말하자면, ‘문안’이라는행위는‘예수님이름을대신하여’혹은‘예수님이름을빌어서’비로소성립되는것일수없다는점이지적되어야한다.
또한, ‘이름으로’에쓰인격조사‘-으로’는‘수단, 방법, 도구, 기구’등을나타내는말이므로‘누구의이름으로문안드리다’라는표현은자연스럽지못하다.
대안으로, ‘주님의이름으로’는‘주님안에서’또는‘주예수님안에서, 주예수그리스도안에서’등으로바꾸어쓰는것이좋다. 성경에는문안이나감사나부탁을할경우거의“그리스도예수안에서”로기록되어있다.(롬 16:10, 고전 1:4, 딛 3:15) (제87회 / 2002년)

18. 일요일(공일) 주일
그리스도인은일요일(공일)을‘주의날’(계1:10)을뜻하는주일이라고해야한다.
현재총회헌법의예배와예식에주일이안식일과구분되지않고사용되고있는데, 이에대한별도의검토와연구가필요하다.(제87회 / 2002년)

그리스도인들이쓰기에바람직하지 못한용어

현재우리생활속에서흔히쓰이고있는말들중에다음과같은말들은무속, 토속신앙, 도교, 불교등의사상이나교리가담겨져있는말들로우리기독교신앙과는맞지않으므로그리스도인들은이용어사용을피하는것이좋다.

1. 도로아미타불
고생만하고아무소득이없게됨을비유적으로이르는말로본래는중이평생을두고아미타불을외우지만아무효과도없다는뜻에서왔는데그리스도인들이쓰기에는바람직하지않다.

2. 공염불(空)
본래불교와관계된말로신심(信心)이없이입으로만외는헛된염불이라는뜻으로쓰인말이다. 그러므로그리스도인들은가급적이말을피하는것이좋다.

3. 보살같다.
보살의뜻은‘위로부처를따르고아래로중생을제도하여부처의버금이되는성인’이라되어있는데아주성품이좋은사람을일컬어‘보살같다’고하는데이는우리그리스도인들이쓰기에는적합한말이못된다.

4. 부처님가운데토막
음흉하거나요사스러운마음이전혀없고마음이지나치게어질고순한사람을가리켜‘부처님가운데토막’이라고도하는데이는우리가피해야할말이다.

5. 신선놀음
신선이란도를닦아서인간세상을떠나자연과벗하여늙지않고죽지도않고오래오래산다고하는초월적인상상의존재를가리키는말로편안한삶을가리켜‘신선놀음이다’라고도하는데이는우리가쓰기에적합한말이못된다.

6. 도사(道士)
어떤일에도가트여서능숙하게해내는사람을비유적으로이르는말로이도사란본래도교에서도를갈고닦는사람을의미하는데우리는성직자나직분자에게이말을비유하여쓰는것은삼가야한다. 예를들어‘목사님이길찾는데는도사야’와같은말은해서는안된다.

7. 신주(神主)모시듯한다.
신주란사당등에모시어두는죽은사람의위패를말하는데글자그대로죽은사람을신으로받드는민간신앙에서온말로몹시귀하게여기어조심스럽고정성스럽게다루거나간직하는모양을비유적으로‘신주모시듯한다’라고하는데우리는가급적이런말은쓰지않는것이바람직하다.

8. 명당(明堂) 자리
명당이란민간신앙의풍수지리사상에서나온것으로후손에게장차큰복을가져다준다는묏자리나집터를말하는데이는우리기독교신앙과어긋남으로쓰지않아야된다. 예를들어‘여기는정말명당자리다’와같은말을쓰는것은피해야한다.

9. 넋두리
민간신앙에서굿을할때무당이나가족의한사람이죽은사람의넋을힘입어그넋을대신하여말을하는것을일컫는것으로불만이나신세타령을길게늘어놓으며하소연하는말을가리켜넋두리라하는데이런말은쓰지않는것이바람직하다.

10. 도깨비장난
민간신앙에서도깨비란동물이나사람의형상을한잡된귀신의하나인데이도깨비는비상한힘과재주를가지고있어서사람을홀리기도하고짓궂은장난이나심술궂은짓을많이한다고한다. 우리는이도깨비와관련된‘도깨비장난’, ‘도깨비짓’, ‘도깨비불’과같은허무맹랑한술어를쓰지않는것이좋다.

11. 일진(日辰)
날의간지(干支)를 말하는데 이에따라 그날그날의 운세가 있다고 믿고있다. 용례로 ‘일진이나빠서’, ‘일진이 사나워서’ 와같은것을 들수있는데이는 피해야 될말이다.

12. (煞)
민간신앙에서살이란사람을해치거나물건을깨뜨리는모질고독한귀신의기운을말한다. ‘살이낀다’, ‘살을푼다’, ‘살이내린다’와같은말들을우리는쓰지말아야한다.

13. 귀신같다(이다).
귀신을미화해서어떤일을잘알고있다든지또는아주잘할경우이를‘귀신같다’, ‘귀신이다’라고하는데이것은우리가피해야될말이다. 더구나그리스도인을이귀신에비유하는것즉‘김장로님이귀신같이알아맞추시네’와같은말은쓰지말아야한다.

14. (厄)
액이란‘모질고사나운운수’라는뜻인데‘액이닥친다’, ‘액을물리친다’, ‘액땜을한다’와같은말은우리가피해야될말이다.

15. 운수(運數), (運), (數), 재수(財數)
운수, 운, 수는같은말로사전적인풀이는‘이미정하여져있어인간의힘으로는어쩔수없는천운(天運)과기수(基數)’를뜻하며, 재수란‘재물이생기거나좋은일이있을운수’라는말인데하나님의뜻과섭리를믿고따르는우리는가급적이런말들을피해야한다. ‘운이나쁘다’, ‘운이없다’, ‘운수사납다’, ‘재수있다’, ‘재수없다’등과같은말들을쓰는것은바람직하지않다.

16. 사주팔자(四柱八字)
사주팔자란‘사람이타고난한평생의운수’를말하며이를줄여‘팔자’라고도한다. 하나님의섭리와인도하심을믿는우리는이와같은말을써서는안된다. 예를들어‘사주팔자를잘타고났다’, ‘팔자가기구하다’와같은말을우리는쓸수없다.

17. 터줏대감
민간신앙에서터주란‘집터를지키는지신, 또는그자리’를말하는데가마니같은것안에베석자와짚신따위를넣어서달아두고위한다. 이터주에관련된말로집단이나구성원가운데가장오래된사람을가리켜‘터주대감’이라하는데이말은우리가가급적쓰지않는것이좋다.

18.
민간신앙에서손이란날짜에따라방향을달리하여따라다니면서사람의일을방해하는귀신을뜻하며초하루와이틀은동쪽, 사흘과나흗날은남쪽에있다고하며, 9일과 10일에는손이없는날이라고한다. 그리하여이날짜를따져서‘내일은손이없는날이니이사를하자’, ‘내일을손이있는날이니이사하지말자’와같은말들을하는데그리스도인들은이런말들을해서는안된다. 물론이를따르는것도안된다.

19. 운명
운명이란‘인간을포함한모든것을지배하는초인간적인힘또는그것에의하여이미정하여져있는목숨이나처지’를말하는데우리는이런뜻을가진‘운명’이란말을써서는안된다. 우리는하나님의뜻과섭리를믿기때문이다. 예를들어‘운명에맡기다’, ‘모든것이운명에달려있다’와같은말을우리는쓰지않아야겠다.

1. 천당(天堂) ⇒하나님의나라, 천국, 하늘나라 === 교회생활
2. 입신(入神) ⇒사용불가 === 교회생활
3. 지금도살아계신하나님⇒사용불가 === 기도
4.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룻기, 욥기, 잠언, 아가 === 성경 呼稱
5. 시편○장○절⇒시편○편○절 === 성경 呼稱
6. 하나님의몸된교회⇒그리스도의몸된교회 === 교회생활
7. 사랑하시는성도여러분(설교용어) ⇒사랑하는성도여러분 === 예배
사랑하시는하나님(기도용어) ⇒사랑하는하나님
8. 주기도문외우겠습니다. ⇒주님가르쳐주신대로기도하겠습니다. === 기도
사도신경외우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신앙고백하겠습니다.
9. 중보기도⇒중보적기도, 이웃을위한기도 === 기도
10. 제사, 제단, 제물⇒예배, 성단, 예물 === 예배
11. 영시(0시)예배, 자정예배⇒송구영신예배 === 예배
12. 수양회⇒신앙수련회 === 교회생활
13. …… 기도로폐회합니다⇒ …… 기도로예배를마칩니다, ……기도로기도회를마칩니다. = 기도
14. 예배의시종을의탁하옵고⇒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 예배
15. 태신자⇒전도대상자 === 교회생활
16. 안집(‘안수집사’의줄임말) ⇒사용불가 === 교회생활
17. 주님의이름으로문안드립니다. ⇒주님안에서문안합니다. 주님안에서문안드립니다.=교회생활
18. 일요일(공일) ⇒주일 === 교회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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