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18 삶과 믿음 모음

>>> 묵상에세이

관행을 깨는 용기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산당만은 철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마음을 정하여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대하20:32, 33)
법조계에는 전관예우라는 것이 있다. 보통 판검사를 하다가 그만두면 변호사가 되는데, 그만 둔 판검사의 자리는 후배가 맡게 된다. 이러한 경우 판사나 검사는 변호사의 후배가 되기 때문에, 일정 기간 선배에 대한 예우를 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당연히 폐단이 많은 관행이기 때문에 점차 법으로 제한하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관행이라는 것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오래전부터 대다수가 암묵적으로 해오던 것을, 자신이 깬다는 것이 상당한 부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남들 다 하는 대로 따라 가게 된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했던 여호사밧도 산당을 관행에 따라 두었다. 산당이란 백성들이 간편하게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장소였다. 문제는 이곳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만이 아니라, 우상에 대한 제사도 함께 했다는 것이다. 이런 산당은 백성들에게 중요했는데, 만약 산당이 없어지면 제사를 드리기 위해 멀리 있는 다른 성전까지 가야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민심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우상에게 제사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으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모든 왕들이 산당을 묵인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 때문에 여호사밧도 전관예우의 폐단처럼 산당만은 그대로 둔 것이다.
혹시 우리 삶에도 이 같은 관행이 있지는 않은가? 알게 모르게 내 삶에 적당히 자리잡아 묵인하고 넘기는 잘못된 모습들이 있지는 않은가? 예컨대, 주일예배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신앙원칙에 반해 쉽게 주일예배를 빠지는 게 삶의 관행이지 않은가.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신앙생활 해 왔기에 이제는 말씀의 경고를 받고 신앙 양심에 찔려도 적당히 넘어갔는지 모른다.

또 한 예로 한국교회에 많이 실행하는 특별새벽기도가 있다. 늘 새벽에 기도를 하면 좋겠지만 이렇게라도 기도하자니 얼마나 좋은가! 그런데 어떤 이는 이런 저런 이유로 “내 삶엔 새벽기도는 없다.”라고 하며 특별한 목적이 있는 새벽기도라도 자신의 관행에 따라 묵살한다.

한 번 생각해 보자. 철저히 관행을 따라 신앙생활 함으로 얼마나 신앙이 성장했는지. 만일 나의 신앙이 몇 년 전과 다르지 않다면, 그 이유가 나만의 신앙 관행 때문은 아닌가? 하나님이 변하라고 말씀하셔도, 나는 관행에 따라 예전 모습 그대로 신앙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내 믿음과 삶의 질은 예전과 똑같은 것 아닌가?
만약 현재 신앙생활도 관행에 따르며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만 가지고 그러려니 지난다면 신앙과 삶의 수준에도 큰 변동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과감히 관행을 깨고 전에 없이 신앙생활에 열심을 낸다면, 당장 불편함은 있겠지만 이를 통해 큰 신앙의 성장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도 관행을 깨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쉽지 않지만 내 삶에 관행처럼 내려오는 악한 습관들을 다 깨고 순종할 때, 내 삶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교회와 선교

…예수께서 멀리 있는 자들(이방인)과 가까이 있는 자들(유대인)에게 화해를 설교하셨다.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 두 집단을 하나로 만드셨다. 그분께서는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증오의 담을 헐어버리셨고 증오를 종식시키셨다.’

나는 내 인생 경험에 의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에서 이 말씀을 실천하셨다. 내 출신 배경은 무슬림이었지만 이제는 내 마음속에 유대인에 대한 사랑이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방인과 유대인을 화해시키신 것처럼 무슬림과 유대인을 화해시키실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해할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둘이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2:19-21)

내가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믿는 모든 사람들과 한 가족이 되었다. 주님에게 우리는 모두 성전이다. 그야말로 화합과 평화가 구현된 모습이다.

마지막으로, 이전에는 원수였던 사람들로 구성된 이 성전에 누가 사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에베소서 2:22)

유대인, 이방인, 예전의 무슬림, 무신론자, 우상숭배자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예수의 제자로서,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것이다.
– 마크 A. 가브리엘 < 이슬람과 유대인 그 끝나지 않은 전쟁 > 중

>>> 묵상에세이

문제는 당신이 물속으로 얼마나 깊이 들어갔느냐가 아니라 잠수복을 입고 있느냐이다. 화살이 얼마나 멀리 날아갔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화살이 활에서 떠났느냐 하는 것이다. 문제는 당신이 완전하냐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함을 갈망하느냐 하는 것이다.

혹시 당신은 사교적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일에 한 번 교회에 가면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바람과 비를 주셨고, 당신의 영혼을 담고 있는 몸을 주셨다. 놀라운 지성과 여러 가지 훌륭한 능력들도 주셨다. 당신을 지켜주시고, 당신이 넘어지지 않게 붙들어주시고, 당신의 심장이 계속 뛰게 하시고, 죽음 후에 당신을 받아들이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그런데 당신은 그분께 고작 빵 부스러기를 드리는가? 그분이 자투리나 받는 분이신가? 과자부스러기 같은 시간을 드리면서 어린양을 따르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착각하지 말라.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지 않는다면 어린양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외형주의에 싫증을 내고 있는가? 하나님을 갈망하는가? 나는 그분께 굶주려있다. 이것은 노인들의 입에서 으레 나올 수 있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다. 이런저런 책에서 영향을 받아 하는 소리가 아니다. (물론, 성경의 경우는 예외이다.) 이것은 여러 해에 걸쳐 내 안에서 형성된 것이다.

내게 만족을 주는 것은 두 가지뿐인데, 그중 하나는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분을 사모하고 그분께 가까이 가는 영적 여행이 나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도처에 그분의 백성이 있다. 그들은 성경보다 교리를 앞세우는 것, 가식, 외형주의 그리고 전통에 반기를 든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 달려간다. 성경의 하나님, 즉 성령께서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달려간다. 하나님께는 그분의 백성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수가 많은 것은 아니다.

당신은 그들 중 하나인가?
– 십자가에 못 박혀라 / A.W 토저, [우리는 굶주려 있는가] –

삶과 교회

과연 누가 중동의 폭력 사태와 자살폭탄테러와 유혈참사를 중단 시킬 수 있을까?
UN이나 미국도 할 수 없고 평화회담을 더 많이 열어도 별 진전은 없을 것이다. 무슬림의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여 유대인과 화해시킬 수 있는 힘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만이 가능할 것이다.

내가 생활하고 공부하고 이슬람을 가르치던 때를 돌아보면 나는 내가 어둠 속에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나는 꾸란에 세뇌 당했고,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유일한 원천이 평화의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임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무슬림이었을 때, 내게 예수는 그저 한 사람의 사도였을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의 의해 선택된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들은 악인들의 마음에서 증오심을 덜어내지 못했다.그리고 삶을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분을 만난 후 나는 진실을 받아들였고 주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의 참된 본성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그가 평화의 원천이자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평화가 있을 수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에베소서 2:11-21을 읽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라고 흥분했었는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오래된 무슬림을 이겨내고 있었다.

바울은 에베소의 이교도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주변 사람들, 특히 유대인들과의 관계도 변화시킴을 이해하기 바랬다. 우선 바울은 그들에게 이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은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에베소서 2:11-13)

무슬림이었을 때 나는 바울이 묘사한 이방인과 흡사했다. 나는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희망도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당신 가까이 오게 만드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백성인 유대인 가까이 다가서게 하셨다. 나는 바울이 적은 다음 구절을 좋아한다. 예수께서 서로 원수였던 이방인가 유대인을 어떻게 화평하게 하셨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에베소서 2:14-17)

이 화해의 놀라운 장면이 보이는가?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피는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신과 인간은 물론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평을 가져오셨다.
– 마크 A. 가브리엘< 이슬람과 유대인 그 끝나지 않은 전쟁 > 중

>>> 에세이

“어쩌다 마주친 교회음향 이야기 — 광야의 즐거운 소리”
…이상하게 비가 오는 날이면 교회 여기저기에서 음악이나 마이크 목소리에 대해 예민한 반응이 온다. 세팅이 지난주와 동일한데도 그렇다. 내가 특별히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모든 게 방송실 탓이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이런 경우는 다분히 감성적인 부분이라고 진단 한다. 비가 와서 감성이 풍부해지면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지며 큰 소리로 들린다. 소리의 속도는 일반 대기와 비교해서 물속이 3배정도 빠르다. 게다가 저기압에서는 소리가 위에서 아래쪽으로 퍼지는데 습도도 높고 저기압이라면 분명 평소 맑은 날의 소리와는 다르게 더 크고 귀를 때리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이는 과학적인 문제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상황일 때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딱히 방법이 없다. 기술적으로는 그저 평소보다 메인 스피커의 소리를 조금 작게 할 수 밖에 없다.

소리는 지극히 감성적인 부분이 많다. 내가 좋아하는 소리만 골라 듣는다. 그리고 나의 귀에 내가 속는다. 똑같은 소리도 누구는 고음이 약하다고 하고 누구는 고음이 세다고 한다. 각자 듣는 소리의 기준이 다르고 또 귀의 피로도에 따라 소리가 들릴 수도 안 들릴 수도 있다. 그래서 음악 작업을 할 때면 몸 상태가 좋아야 한다. 특히 귀가 피로하지 않도록 더욱 신경 써야 한다. 때로는 연주의 실력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음색의 톤도 문제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연주, 노래, 몸짓 하나하나가 감동일 뿐이다. 좋아하는 걸그룹이 노래할 때 방송 사고가 나서 마이크가 나오지 않거나 안무가 살짝 틀렸다고 절대 뭐라고 하지 않듯이.

지금 필자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처음 갔을 때 의식하지 않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음향장비였다. 이름 없는 스피커, 이름 없는 마이크, 흔히 개척교회에서 볼 수 있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장비가 무엇인지, 소리가 어떤지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소리는 잘 나왔으니까. 교회사람 모두가 천하태평인데 어쩌랴. 아쉬운 자가 해결해야지. 이때부터 2년간 알바하며 교회 음향장비의 교체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새로운 장비를 설치하고 예배를 드리는데 너무 만족스러운 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단 한명만 만족스러워 했다. 역시나 필자 본인이다. 교인들은 장비가 바뀌었는지, 소리가 바뀌었는지에 대해선 관심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좋은 소리를 모르다니. 외부 찬양 팀이 왔을 때에야 장비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사실 소리를 어떤 기준에 맞추어서 좋다 나쁘다 판단하기 어렵다. 소리의 기준은 내 마음대로 이기 때문이다. 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리거나 또는 너무 커서 귀가 아프고 시끄러울 정도가 아니라면 소리는 그저 소리일 뿐이다. 듣는 사람의 상태나 감정에 따라 같은 소리도 즐거운 소리가 되고 듣기 싫은 소리가 된다.

교회 음향의 자리는 광야와 같다. 위치로도 교회의 구석진 곳에 있다. 예배에 관련해서는 민원도 많다. 그래도 그 자리를 지키며 교회 곳곳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타난다. 말 그대로 소리를 전달해주는 엔지니어기 때문이다. 방송실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리는 내지 않는다. 자신의 소리는 뒤로하고 오직 다른 사람의 소리를 예쁘게 만들어 내보내준다. 영상도 마찬가지다. 방송실의 사람들은 무대에 있는 사람들의 가장 좋은 모습을 잡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카메라 화면을 살펴본다. 쉴 틈이 없다. 타이밍을 맞춰 ppt 화면을 내보내기 위해 긴장된 상태로 순서를 기다린다. 그래도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마음으로 광야의 즐거운 소리를 시작한다.

이제 장마도 시작될 것이고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면 불쾌지수에 괜히 감수성이 예민해질 수 있다. 이로 인해 괜히 주일 예배 때 이것저것 나를 자극할 수 있지만 이때 광야에서 열심히 외치고 있는 우리의 방송실 봉사자들을 생각해보자. 수고한다며 격려하는 여러분의 그 목소리가 방송실 사람에게는 수백 수천만 원의 마이크와 억 단위가 넘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보다 더 좋게 들릴 것이다. 광야가 천국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알고 보면 나도 교회 안에 있는 여러 소리 중의 하나이다. 이제는 모두가 함께 즐거운 소리를 만들어 보자.
– 장원 –

삶과 교회

명성교회. 한국에서 두번째로 큰 개신교회이며 최대 규모의 장로교회. 몇 해 전부터 당회장직 세습 문제로 사회적 이슈화가 됐다. 그런데 지난 주 명성교회가 속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에서 재판국이 8대7로 합법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반대표를 던진 재판국원은 모두 사퇴를 했다. 올바른 교회관을 가져야 할 우리에게는 도전이기도 하다. 이에 오래 동안 반대해 온 김동호 목사는 “저항하라. 저항하라. 억지 부리는 것도 악이고 억지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악이다.”라고 선언했다. 아버지가 은퇴한 상태에서 아들을 뽑은 것이기에 세습이 아니며 세습을 금지한 교회법에 문제가 없다고 판결한 것은 말 장난에 불과한 억지이며 차라리 세습을 정당화시키는 편법이다. 문제는 무엇인가? 이런 어거지와 비정상이 적법으로 둔갑함은 정치권력, 기득권이 이미 교계 안에 패거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아 교계의 권위가 무너지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명성교회의 궤변은 집단지성의 상실에 다름 아니다. 명성교회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개신교 자체가 무너지는 게 더 문제 인 상황에서 잠잠하면 안된다는 김동호 목사의 지적이 틀린 말일까.

이 문제에 관한 다음의 입장을 소개한다.

“교회세습, 하지 맙시다.”

2017년 3월 19일 명성교회 공동의회는 은퇴 목사인 김삼환 목사의 후임에 그의 아들 김하나 목사를 위임목사로 청빙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는 동일한 장소에서 2013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통합) 제98회 총회에서 결의된 ‘담임목사직 대물림 방지법(세습금지법)’을 위배하고 또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망각한 채 공교회를 사유화 하려는 획책입니다. 명성교회가 한국 교회에서 차지하고 있는 막강한 위상을 고려할 때, 명성교회의 편법적 세습 시도가 실제로 성사될 경우, 이것이 다른 교회에게도 나쁜 영향을 끼칠까봐 심히 염려됩니다.

‘바른교회아카데미’는 다음의 이유로 명성교회의 편법적 세습 결의를 반대합니다:
..담임목사직을 아들(사위, 딸)에게 물려주는 세습은 교회가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거룩한 공교회라는 신앙고백을 훼손시킵니다.
..세습은 목회자로 하여금 교회를 사유화 하게하고 세속적 권력을 탐하게 만듭니다. 또 세습을 용인하는 교회는 물량적 성장주의에 매몰된 상태에서 물신주의 우상숭배로 빠질 것입니다.
..교회는 현재 한국 사회의 신뢰를 점차 잃고 있습니다. 세습은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더욱 추락시키면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해칠 것이 명백합니다.
..교회의 세습은 최근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된 대기업 경영권 불법 승계와 동일한 행위입니다. 교회에서 혈연 세습이 지속되면, 수많은 목회자에게 박탈감과 허탈감을 안겨 줄 것입니다.
마땅히, 명성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의 세습방지법을 따르고 지켜야할 것입니다. 명성교회가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회개하고 공교회성을 회복하여 하나님 나라의 교회로 거듭나기를 간곡히 권면합니다.

>>> 묵상 에세이

“팔로워십 (followership) 이 먼저다.”
…이제 50대 후반, 나름 산전수전공중전까지 겪으며 목회 현장에서 30년을 부대낀 지금 나의 리더십에 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느껴짐을 스스로 체감해 놀랐다. 리더십에 대한 얍삽했던 지식 습득의 눈 돌림이 아닌 나도 모르게 팔로워십 쪽으로 이동했다는 점이다.

…궁극적 리더십의 목표를 위해서 팔로워십이 전 단계로 선행되어야 함을 잊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라는 신명기 1장31절의 한 구절 ‘너희를 안으사’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안을 만한 이유보다는 내칠 만한 이유가 훨씬 더 많은 지난 40년의 세월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솔직한 표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그렇게 안고 40년 동안이나 함께 걸으셨던 팔로워십의 리더십을 보이신 주님의 은혜 문에 다시 한 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그런가!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의 애착을 자기 자신에게 두기보다는 그리스도에게 두도록 하는 사람이다.”라는 오스왈드 샌더스의 권고가 다시 와 닫는다. 그렇다면 자신을 처절하게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리더가 될 것이며 분명히 팔로워십으로 무장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팔로워십이 리더십보다 먼저다. 오늘 내가 사는 사회에 리더가 되려는 자는 산재해 있다. 허나 정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자, 외부와의 관계 안에서 내가 지금 어떻게 서 있는지를 냉정하게 성찰해보려는 팔로워들은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비극이다. 교회가 무엇 하는 곳인가? 리더들을 세우기에 앞서 팔로워들을 세우는 곳이어야 한다. 목사는 무엇 하는 사람인가? 리더의 노하우를 습득하기 이전에 공동체를 주님의 마음으로 섬기는 팔로워가 된 사람이 목사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등이 되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갈파했던 중국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의 말은 그래서 곱씹고 또 곱씹어야 할 가르침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 공동체에 참 격려해 주고 싶은 지체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는 아무리 새겨 보아도 리더의 자질이 있다. 헌데 그의 자리는 언제나 팔로워의 자리다. 거기에 먼저 서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 자리를 지키는 것 같지 않다. 몸에 배어 있는 삶의 태도와 성향 자체가 그를 그렇게 서게 한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필자는 알게 되었다. 분명 팔로워의 자리를 언제나 늘 항상 지키고 있는 그를 공동체의 지체들이 리더로 인정하고 있다는 선명한 감동 말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거하고 사람들과 함께 거하는 삶”이라는 사막의 선교사 샤를르 드 푸코의 좌우명 또한 삶의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통찰한 팔로워의 삶이라 여겨진다. 팔로워십에 천착하는 삶은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감에 있어서 21세기 오늘, 가장 시급한 교회 공동체와 그 공동체를 섬기는 모든 성도들의 최우선의 미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내가 영원히 사랑할 대상이신 주인이신 예수께서 하신 이 말과 삶은 그래서 필자의 삶이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달려간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
– 이강덕 목사 –

삶과 교회

여성을 끌어안는 한국교회
2017년은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이었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기독교의 교리는 새롭게 이해되었고 교회는 예배와 직제를 개혁했으며 일반 신자들조차 개혁적인 신앙과 삶의 양식을 받아들였다.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으며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종교개혁의 기치는 유럽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은 당시의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마틴 루터의 아내였던 카타리나 폰 보라도 원래는 수녀였다. 폰 보라를 비롯한 수많은 가톨릭 수녀들은 종교개혁 신앙을 받아들여 수녀원을 떠났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중세의 수녀원은 여성들이 교육받고, 지적인 활동을 하며, 여성들만의 공동체를 이루고, 종교예식을 주도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문제는 종교개혁의 신앙을 따라 수녀원을 떠난 여성들에게 수녀원을 대신할 대안적인 공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개혁자들은 여성이 목회자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수녀들 중에는 폰 보라처럼 종교개혁자의 아내, 소위 오늘날로 말하자면 목사의 사모가 된 여성들이 있으며 또 일부 여성들은 수녀원에서 익힌 지식을 바탕으로 부유층의 입주가정교사가 되기도 했다. 대부분의 수녀들은 다시 부모가 있는 가정으로 돌아갔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의 자유제국도시들이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개혁 신앙을 선택하면서 수도원과 수녀원은 강제로 폐쇄되었다. 이런 와중에 끝까지 수녀원을 지키려고 했던 여성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수녀원이 폐쇄된다는 것은 소중한 종교의식과 예전에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지며 교육을 받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종교개혁에 저항했다. 그들은 가족, 정부 관리, 가톨릭의 고위 성직자, 귀족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수도원 폐쇄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리기도 하고, 시의회가 지급하는 연금수령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힘으로 신입수녀를 모집하기도 하고, 사제 없이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 또 수녀원을 고아원이나 학교로 개조해서 수녀원을 떠나는 일을 모면하려는 노력을 했다.

나는 개혁 신앙의 전통 위에 있는 장로교회의 목사이다. 그러나 개혁 신앙을 선택해서 수도원을 떠난 폰 보라와 같은 수녀들을 존경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수녀원에 남아 저항한 수녀들도 존경한다. 이것은 나의 신앙이 구교인가 신교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나의 존경심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시대와 사회의 제약 앞에서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저항하고, 연대한 여성들을 향한 것이다.

내가 속한 교단은 1995년, 처음 여성안수를 헌의안이 상정된 지 63년 만에 드디어 여성안수를 법제화했다. 여성도 장로와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는 우리 선배 여성들의 끈질긴 투쟁의 결과이다. 그로부터 2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현실은 어떠한가.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 학생 중 3분의 1이 여학생이었다. 여전도회 일 때문에 지역 교회를 방문하면 졸업을 하고 목사안수를 받기 위해 교단이 요구하는 2년의 전임사역을 하고 모든 조건을 갖추었는데도 목사가 되기를 주저하는 여자 전도사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망설이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목사가 되면 더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말했다. 여성 전도사를 찾는 교회는 많지만 여성 목사를 원하는 교회는 많지 않다. 게다가 전임 사역의 현장은 너무도 남성중심적이다. 남성적 언어, 남성적 위계질서, 남성적 문화, 그곳은 적자생존의 정글이다. 제도적으로 여성도 목사가 될 수 있지만 그 여성들이 과연 목회자로서 살아갈 수 있는 생태계가 오늘 우리 교회 안에 존재하는가. 오늘도 많은 여성 목사후보생들은 목사가 되기를 주저하고 또 포기한다.

같은 이유로 한국교회에 여성 성도들의 교회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 작년 우리 교단 총회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 교단의 여성 성도의 비율은 57.4%이다. 한때 교회에 70퍼센트 아니 80퍼센트를 육박하던 여성 성도의 비율이 이렇게 낮아진 것은 교회에 남성 성도가 늘어서가 아니다. 여성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만나는 우리 여전도회 회원들은 50대 이상이다. 그들은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 교회를 떠나는 여성들은 젊은 여성들이다. 내 친구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대학 시절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하던 그 친구가 언제부터인가 교회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나에게 해준 말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송희야, 나는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는데 목사님의 설교에는 내 자리가 없어. 목사님이 설교할 때 말하는 ‘여성’은 모두 결혼을 하고 가정에서 살림을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전업주부야. 나는 회사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인데 교회에 오면 나는 내 목소리를 낼 수가 없어. 내가 설 자리가 없는 교회에 나는 더 이상 갈 수가 없어.” 내 친구는 외국계 기업의 관리직에 있으며 일류 대학을 졸업했고 남편보다 연봉이 높은 전문직 여성이다.

나는 여성과 남성이 함께 동등하게 사역하며 여성 성도들이 교회에서 설 자리를 찾으며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교회를 꿈꾼다. 이를 위해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여성들 혹은 남성들과 교류하며 우리의 목소리를 모을 것이다. 이는 내가 여성이어서 여성이 교회 안에서 힘을 쟁취해야하기 때문도 아니고, 그간 억눌려 왔던 여성의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교회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를 닮았고(이사야 11장), 위기의 한국 교회에 대안과 소망이 될 수 있으며, 성장의 시대를 거쳐 이제는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한국 교회의 당위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한국 교회의 너무나 훌륭한 사역의 자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한국교회의 크나큰 손실이다.
채송희 목사 –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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