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20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11/29/2020)
가야 하는 길 – 머물러 있지 마라, 지금 떠나라!
이번 코로나 사태가 시작될 때 나는 고민했다. ‘이 기간을 나는 어떻게 살아내야 할 것인가?’ 세상은 혼란에 빠지고, 사회는 리듬이 깨지며, 사람들의 일상은 위축되어도 나는 주어진 이 시간을 주님 앞에서 바로 살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강단 사역을 일시 중단한 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다.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아브라함의 인생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가야 하는 길이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가야 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의 목적지는 우리의 본향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 거룩하신 통치자의 왕국이다.이 길은 하늘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여정이다(요 6:44).
이 길은 가고 싶다고 가는 길이 아니요, 가기 싫다고 포기할 수 있는 길도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롬 8:28) 자라면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다. 성도(聖徒)란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을 칭하는 표현이다. 참된 성도는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의 발걸음은 반드시 언제나 천성을 향하고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 자신을 엄중하고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는 날카로운 잣대가 아닌가 싶다.
우리의 발걸음이 천성, 즉 우리의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 기준에 변화가 도래한다는 뜻이다. 목적지는 방향성을 좌우하고, 방향성은 가치 기준을 새롭게 형성하게 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필수적이며, 회피 불가하다. 예를 들어, 우리 인생의 목적이 이 땅에서의 행복과 성공이 아니라 주님 나라에 입성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에 보화를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거주할 곳에 투자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합리적인 선택이 되지 않겠는가?
사복음서에서 주님이 물질관에 대해 교훈하신 적이 많은 것도 바로 이런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개인의 신앙과 물질관은 떼려고 해도 절대로 뗄 수 없는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물질관을 보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거의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향을 향하여 나갈 때 시간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보이는 고향집을 향하여 나아가는 나그네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남겨진 시간을 계수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다. 그리워서 꿈에도 아른거리는 집에 가려는 사람이라면 다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지 않겠는가?
천국을 향한 이런 애절함이 없는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 안에 너무나 많다. 잠시 지나가는 경유지인 이 땅을 마치 목적지라고 착각하고 안주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어찌 ‘성도’라는 거룩한 이름에 어울릴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이것이 성도의 지혜다. 유한한 것을 영원하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슬기로운 태도이다. 잘 떠나기 위해 준비한 사람은 남은 시간을 잘 살아낼 수 있는 법이다.
성도의 삶에 일어나는 변화는 물질관과 시간 개념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지만,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변화를 성도는 경험하게 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새로운 생명은 단면적이지 않다. 우리가 얻은 구원의 영향력은 풍성하다. 언젠가 죽은 다음에 천국 간다는 단순한 개념이 절대 아니다.
성도가 된다고 하는 것은 예수로 인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위치의 변화요, 사랑하는 아버지가 계신 천국을 향하여 발걸음이 전환되는 방향의 변화요, 그 천국문까지 올바로 달려가고자 모든 짐을 내려놓는 가치 기준의 변화요, 그 여정 가운데 더욱 사랑하게 되는 예수의 형상을 닮아가는 모습의 변화요, 그 변화된 모습에서 영향력이 흘러나와 세상을 살리는 역할의 변화요, 그리고 결국 아무런 공로 없는 죄인이 언젠가 지존하신 그분의 품에 안기게 되는 운명의 역전이다. 이것이 성도의 영광이다!
그렇다! 진정 구원받은 성도라면 반드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 세상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는 형태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고 스스로 속이는 거짓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여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이러한 변화와 성장으로 실체적이고 본질적인 신앙생활으로 서기를 바란다.
– 다니엘 김, 『가야 하는 길』
>>> 삶과 신앙 (11/22/2020)
은혜는 마땅히 감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늘 영적 기쁨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얻으려 하지 않을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영적 위로는 세상의 모든 기쁨과 육신의 모든 쾌락을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기쁨은 헛되거나 추하지만, 오직 영적 기쁨은 유쾌하고 정직하며 덕에서 비롯되고 하나님께서 순전한 마음에 불어넣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도 이러한 하나님의 위로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항상 누릴 수는 없습니다. 유혹과 시험의 순간이 곧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거짓 자유와 자기 과신은 하늘에서 오는 것들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은혜를 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선을 행하시지만,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음으로써 악을 행합니다. 그래서 은혜의 선물이 우리 안에 흘러들지 못합니다. 우리가 그 선물을 주시는 분에게 감사하지 않고, 그 선물을 그 근원으로 온전히 되돌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은혜는 마땅히 감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교만한 자는 은혜를 빼앗기고 겸손한 자가 그 은혜를 얻을 것입니다. 고상하다고 다 거룩한 것이 아니며 아름답다고 다 선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바람이 다 순수한 것이 아니며 우리에게 소중하다고 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더 겸손하게 하고 거룩한 경외심을 일으키며 더욱 자기를 부인하게 하는 은혜를 나는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은혜의 선물을 주실 때 가르침을 받고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 훈련받는 사람은 그 어떤 선도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궁핍하고 헐벗었음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마 22:21) 그대의 것을 그대에게 돌리십시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대에게 돌릴 것은 죄와 그 죄로 인한 형벌뿐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을 가장 낮은 자리에 두십시오(눅 14:10). 그러면 가장 높은 자리를 얻을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가 없으면 가장 높은 자리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성도는 자신이 판단하기에 가장 작은 자입니다. 이들은 영광스러운 자리에 오를수록 내적으로 더 겸손해집니다. 진리와 하늘 영광으로 충만한 사람들은 헛된 영광을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단단히 뿌리 내린 사람들은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것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영광을 바랍니다. 자신과 모든 성도가 무엇보다 하나님을 찬양하기 바라고, 언제나 바로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작은 선물에 감사하십시오. 그러면 더 큰 선물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가장 작은 선물도 가장 크게 여기고, 가장 보잘것없는 선물이라도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대가 선물을 주시는 분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그 어떤 선물도 작거나 하찮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작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이 형벌과 채찍을 주시더라도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든지 그분은 항상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려는 사람은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은혜를 거두어 가실 때 인내해야 합니다. 은혜가 돌아오도록 기도하고, 은혜를 잃지 않도록 조심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 토마스 아 켐피스, 『내면을 향한 유익한 권면』
>>> 삶과 신앙 (11/15/2020)
기도하며 무엇에 집중하는가?
기도했으면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데 또 야곱이 머리를 굴려서 뭔가를 한다.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는데 그 예물이 많다. 화끈하게 많이 주는 것이다.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 창 32:14,15
그리고 그 예물을 몰고 갈 종이 에서를 만나면 전할 말을 알려주는데 “주의 종 야곱의 것이요 자기 주 에서에게로 보내는 예물”(18절)이라고 말하라고 한다. “형님”이 아니고 “주인”이라 칭한다. “당신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이거 받으세요.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이렇게까지 낮추고 형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애를 쓴다.
“또 너희는 말하기를 주의 종 야곱이 우리 뒤에 있다 하라 하니 이는 야곱이 말하기를 내가 내 앞에 보내는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 나를 받아주리라 함이었더라” – 창 32:20
이렇게 선물을 드리면 형이 좀 풀려서 ‘아, 이놈이 정신을 차렸구나’ 하고 마음이 풀려서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
20절을 읽으며 인간적으로도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렇게 할 것을 좀 일찍 했으면 어땠을까? 라반에게 가서 돈 벌 때마다 얼마씩 떼어 보내며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 차리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보내겠습니다”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회개와 사과는 빠를수록 좋다.
아마도 야곱의 인생 계획 속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고향으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제3의 장소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 라반은 떠나고 싶고 여기는 오기 싫고, 그래서 자기가 번 돈으로 다른 지역을 선택하여 잘 먹고 잘살고 싶었을 것이다.
인생살이 마음대로 안 되고 계획대로 안 되기에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이 필요한 존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내 생각과 내 힘과 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신의 방법으로 아이를 낳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았다. 야곱은 기도했지만,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적극적으로 붙잡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서도 자신의 경험과 돈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기도하면서 범하는 가장 큰 실수는 나의 능력과 최선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때에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믿어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문제를 해결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지만, 기도했으면 기다려라. 답답해도 기다리고 절대 내 힘으로 주님의 일을 행하려 하지 말라. 벧엘로 돌아가자. 내 힘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고 벧엘에서 만난 주의 은혜로 살아가자.
– 홍민기, 『내 마음대로 된 것아 하나도 없었다』
>>> 삶과 신앙 (11/8/2020)
가장 큰 문제는 항상 나 자신이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얍복 강가에서 주님과 씨름하고 자신에게 가장 큰 문제였던 에서가 해결됐는데 야곱은 형님에게 “제가 세일로 가겠습니다. 먼저 가 계세요”라고 죄의식도 없이 또다시 거짓말하고는 숙곳으로 간다.
치명적이다. 며칠 전에 실제로 천사와 씨름을 했던 야곱도 이렇게 쉽게 변하는데 영적으로 붙잡힘 당하지 않고 살아가면 얼마나 내 마음대로 살아가겠는가?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했는데도 이런데 아무렇게나 예배드리고 적용이나 순종, 십자가의 말씀 없이 거한다면 심각한 영적 파탄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온전하게 순종하고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분명한 결단이 없으면 자기중심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
교회 다니고 은혜받는다고 변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살려는 나의 본능이 지배한다. 그 본능은 쉽게 죽지 않는다.
야곱의 모습을 보며 한순간도 깨어 있지 않으면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사탄의 역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것이 아니다. 사탄 주제에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탄은 집중한다. 은혜받은 성도가 하루속히 그 은혜를 잊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것에.
죽음을 맞닥뜨려도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천국 시민의 은혜를 받고서도 계속 이 땅의 가치로 끌려다니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아직도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라는 교만이 내 안에, 내 생각의 저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매번 은혜를 주시고 만져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매 주일 선포되어 우리에게 주어진다. 예배도 있고 은혜도 있고 내 문제 속에 하나님께서 거하고 임재하셨던 체험도 있다. 우리의 문제는 그런 것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장 큰 죄악은 예배하지 않는 죄가 아니고 무엇을 하지 않는 죄도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항상 나 자신이다. 기도하고 QT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내 안에 아직도 싸워야 하는 존재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없는 나 자신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함께 계시는데 죄악을 선택하고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내 꾀와 경험으로 선택하여 가는 길이 바로 죄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얍복 강가의 은혜만큼 놀라운 은혜, 쉽게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사람은 놀라운 기적을 맛봤다고 변하지 않는다. 변화는 매일매일 내 삶 속에서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되시는 결단과 적용을 통해 일어난다. 그것은 의지적으로 나를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 홍민기, 『내 마음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 신앙과 삶 (11/1/2020)
우리 중 누가 주님을 배신할까? ‘최후의 만찬’ 속의 두 얼굴
내게 가장 흥미로운 다빈치의 이야기는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열세 사람 중 한 명의 모델을 선택하는 과정에 얽힌 이야기다.
다 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려놓은 방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수도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갤러리였다. 다 빈치는 식탁을 스케치했다. 그 식탁에는 열세 사람이 앉을 것이었다. 예수님이 중심에 자리하시고, 예수님의 좌우로 각각 여섯 제자가 자리할 것이었다. 제자들은 셋씩 그룹을 이루었는데, 두 그룹은 예수님의 왼쪽에 자리하고 두 그룹은 예수님의 오른쪽에 자리하도록 했다.
다 빈치는 예수님을 맨 먼저 그려 넣기로 했다. 그리고 밀라노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적합한 모델을 찾아다녔다. 성당과 수도원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거룩한 인상을 풍기는 인자하고 부드러운 얼굴을 찾고 있었고, 마침내 적절한 모델을 찾았다. 그가 젊은이에게 다가가 자신의 작품에서 중심이 되는 인물의 얼굴로 적합한 모델을 찾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젊은이는 모델이 되는 데 동의했다. 다 빈치는 그 젊은이를 매우 작은 공간으로 안내했다.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모델 역할을 끝내고 돌아갈 때, 벽에는 한 사람, 예수님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다 빈치의 노트와 스케치에서, 그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고 말씀하시는 순간을 그리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두 사도 하나하나가 놀라움과 누가 실제로 예수님을 배신할지 궁금해하는 모습을 보여줄 터였다.
예수님을 다 그린 후, 다 빈치는 3년에 걸쳐 열한 사도를 그렸다. 각 인물은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며 “우리 중 누가 주님을 배신할까?”라고 묻는다. 그렇게 3년이 지났고, 유다만 빼고 다 완성되었다. 다 빈치는 유다의 얼굴에 적합한 가장 악한 얼굴을 찾아 밀라노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밀라노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과 감옥들을 다니며 가장 비열해 보이는 얼굴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다 빈치는 그런 사람을 찾았다. 그는 범죄자였고 방탕에 젖어 사는 사람이었다.
그는 곧 다 빈치를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자신이 3년 전에 이곳에 왔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그의 눈앞에 거의 완성된 벽화가 펼쳐졌다. 한 사람의 얼굴만 비어 있었다. 그는 이미 완성된 몸통을 들여다보았다. 그 인물의 두 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 자가 받은 은화 30개가 든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었다. 엎질러진 조그마한 소금 그릇도 있었다. 당시 엎질러진 소금은 종이 주인을 배신하리라는 신호였다.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괴성을 질렀다. 그는 그림 속의 예수님을 가리키며 말했다.
“3년 전, 당신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니 모델이 되어달라고 했소. 그런데 3년이 지난 지금, 당신은 내게 유다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니 모델이 되어달라고 하고 있소.”
이것이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의 미스터리였다. 천사의 얼굴을 가졌던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방탕과 타락과 육적인 것들에 내던진 나머지 이제 그의 악한 마음이 얼굴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순수하고 깨끗했던 얼굴이 이제 밀라노의 모든 방탕에 찌든 얼굴이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517년에 죽을 무렵, 이 유화는 이미 갈라져 벗겨지고 있었다. 5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망가졌다. <최후의 만찬>은 복원에 20년이 걸렸고, 1999년에 공개되었다. 깜짝 놀란 얼굴들이 서로를 향해 궁극의 질문을 하고 있다. “누가 그리스도를 배신할까?”
그리고 은화 주머니는 분명히 유다의 손에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과 유다의 얼굴이 닮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범죄자의 괴성을 잊지 말자. 한 인간의 얼굴이 단지 그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 때문에 겨우 3년 사이에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 진 에드워드, 『하나님은 언제나 너를 돌보고 계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