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22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9/25/2022)

살리는 기도
이심전심이었다.

남의 죽음을 기도로 가슴에 떠안아보니 내 생명도 작아 보였다. 기도를 통해 남의 고통에 동참해보니 내 삶이 달라 보였다. 죽을 일로 가득한 나의 영적 상태와 그 게으름이 깨달아졌다.

연약함. 자신을 불살라 사역하지 않는 어정쩡한 소명의 상태, 내 시간이나 에너지를 희생하지 않으면서도 예수님을 잘 따르고 있다는 무지의 상태, 그리고 예수님 몰라서 죽어가는 지인들을 위해 살리는 기도를 하지 않던 미적지근한 상태가 엿보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나는 펄펄 살아있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살리는 기도를 하자 나의 죽은 상태가 드러났다. 분명 기도를 시작할 때는 남 살려달라는 기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살려달라 외칠 때마다 내 기도가 되었다.

당시도 나는 성도들의 이름을 노트에 적어놓고 매일 기도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뿐 아니라 남을 위해서도 기도했다. 그러나 살려달라는 간절함은 그다지 없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영적 생명력이 충만한 기도꾼인 줄 착각했다. 살려달라는 기도가 세 가지 측면에서 내 착각을 부쉈다.

첫째, 나에게는 생명력이 없었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풍성하다(요 10:10). 이는 멈추거나 잠들어 있을 수 없는 강력이다. 질병도 고치고 귀신도 내쫓고 죽음도 생명으로 뒤집어버리는 힘이다(마 10:1-8).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능력자다.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갈 2:20). 그런데, 이걸 평소에 잊고 산다. 그러다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그저 잘 지내는 줄로만 알고 있다가 정신이 번쩍 났다. 남 살려달라고 외치고 나서야 내 처지가 보였다. 생명력이 없었다. 나는 동혁이네의 고통의 문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저질 능력의 소유자였다..

둘째, 풍성한 생명력이 있어야 희생이 가능하구나!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끝이 없다(골 1:17-19). 죽음도 이긴다(행 2:24). 그 안에 넘치는 생명력이 있다. 풍성하다. 그런 생명이라야 희생해도 산다. 살린다.

풍성한 생명력이 주어진 다음 단계는 자기희생이다. 남 살리는 생명력의 싹은 자기희생을 뚫고 터져 나온다(요 12:24). 살리는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에 감동되면 그때부터 자기희생이 가능해진다. 동혁이네를 살려달라고 기도한 후에야 나는 자기희생을 배울 수 있었다.

셋째,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을 탄생시키신다!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셨다. 그분의 사람들도 같은 일을 한다. 크리스천은 죄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의에 대해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사람들이다(롬 6:11). 진정한 생명을 얻은 자들이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다시 세상에 보내신다(요 17:18). 그들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요 17:20). 이 일은 예수님의 기도로 진행되었다(요 17:1-21). 오늘날도 예수님의 사람들이 같은 일을 한다.

동혁이 아빠도 그랬다. 시한부 인생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의 유예기간을 얻었다. 이후 그를 통해 또 다른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새 생명을 얻었다. 나도 그래야 한다. 누군가에게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는 새 생명의 전조다. 살리는 기도를 통과할 때 죽음은 생명을 낳는다.

살려달라는 기도를 하기 전까지 나는 동혁이를 위해 기도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해였다. 알고 보니 나를 위한 기도였다. 기도하면서 이사야서 말씀이 떠올랐다. 나는 성경을 펼쳤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 사 38:5

동혁이 아빠만 생명이 연장된 것이 아니었다. 나도 예수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살고 있었다. 그렇게 내 생명도 연장되었다.
 — 송준기 목사, 『살리는 기도』 —


마음이 별로라서, 환경이 좋지 않아서, 교회가 아니라서, 시간이 없어서 등등
갖가지 핑계로 기도를 미루고 있었습니다.
뭘 그렇게 환경과 조건을 따졌었는지요,,.
내가 무릎 꿇는 순간,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게 반겨주십니다.
우리를 항상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니까요.

>>> 삶과 신앙 (9/18/2022)

하나님 뜻대로 기도할 때
이스라엘에 수년간 비가 오지 않을 거라 선포하고 시돈 땅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3년을 은둔하던 엘리야가 드디어 갈멜산의 기도 전투를 하게 됩니다.

엘리야는 기도를 통해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이스라엘에 비를 오게 합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 왕상 18:1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엘리야는 그 약속을 붙들고 기도합니다. 그러자 3년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장이 아름다운 기도도 좋고 조리 있는 기도도 좋지만, 기도는 응답 받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응답 받는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입니다.

응답이 없는 기도는 허공을 향해 외치는 자기 독백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가장 놀랍게 응답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으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든지 응답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고, 말씀을 따라 기도할 때 말씀과 내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요일 5:14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할 때, 우리가 무엇을 기도하든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성경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할 수 있게 되고, 응답 받는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넘쳐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할 때 우리는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을 품고 기도할 수 있으며, 응답 받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뜻이 이뤄지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이 언제나 훨씬 더 좋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무엇이든 기도하고, 구하는 대로 응답 받는 기도의 용사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장재기, 『따라 하는 기도(구약편)』 —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어’라고 하는 분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매일 함께 있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가진다면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기를 너무나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제 귀에다 직접 말씀을 해주셔도 제가 전혀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제가 듣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과 보내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먹은 음식으로 오늘을 버틸 수 없는 것처럼 어제 읽은 말씀으로 오늘을 버틸 수 없습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묵상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씀에 기대어 기도하게 됩니다.

말씀은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기도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반드시 매일 읽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이렇게 말씀을 보는 습관이 확실하게 생겼습니다. 이제 성경 말씀을 읽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제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 롬 10:17

>>> 삶과 신앙 (9/11/2022)

환난은 변장하고 다가오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할 때가 옵니다.
모든 도움이 끊어지고 의지하던 것이 사라졌을 때, 그 어떤 것도 의지할 수 없는 진짜 환난을 당하면 누구나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 계시면 저 좀 도와주세요. 저 좀 구원해주세요.”

이런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이처럼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을 찾을 때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편안할 때는 마음대로 살다가 환난을 당하고 나서야 하나님께 나온다는 자책감에 시달립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를 받아주실까?’ 염려도 됩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편안할 때는 그분을 잊어버리고 힘들고 어려워야 하나님을 찾는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환난당한 자를 부르신 것입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 시 50:15

하나님이 걱정하시는 것은 환난을 당하고도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당하면 “나에게 오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계획일 수 있습니다. 환난은 변장하고 다가오는 축복이기도 합니다.

세상적으로는 어려움이지만, 영적으로는 비로소 하나님을 만날 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때입니다. 이것을 알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게 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 롬 5:3-4

환난을 당한 뒤 하나님을 찾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진짜 부끄러운 일은 환난을 당했는데도 여전히 돈, 건강, 문제 해결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평생 돈과 사람과 건강을 믿고 살았는데,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환난을 통해서 깨달았다면, 이제는 하나님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정말 부끄러운 것은 환난을 당하여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문제 해결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 유기성, 『예수님은 나의 선한 목자이신가』 —


진정한 깨달음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많은 말씀 양육을 받습니다.

예배로,
묵상으로,
제자훈련으로,

그리고 그 안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많은 관계들속에서
나의 모습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나”
“말씀에 순종하는 나”
“이웃을 사랑하는 나”

그리고 그 깨달음은
삶으로 나타날 때에
비로소 ‘깨달음’이 됩니다.
 — 히스토리 카툰 이정한 작가 —

>>> 삶과 신앙 (9/4/2022)

나의 길이냐? 그리스도의 길이냐?
우리는 결정을 해야만 한다.

 “나의 야망은 어떠한가? 그것이 나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괜찮은가?”

“나는 나의 방식으로 나의 일을 행하는 데 익숙하며 교회 안에서도 그렇게 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내려놓아야 하는가?”

“나는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어서 인정과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가?”

형제자매들이여, 당신은 그리스도와 영광과 결실과 미래와 앞으로 올 세상을 얻으며, 온전케 된 의인의 영을 갖게 된다. 그 모든 것을 받기 전에, 당신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와 인류를 위해 사랑과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특권과 기회를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지혜 안에 있는 은혜로운 계획이고 공급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당신이 계속해서 뽐내고 자랑하며 자신의 이기심을 키우고 자아를 먹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 안에 그런 이기적인 주장을 허용하실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로 온전케 하시고 새롭게 만들기 위해 역사하시는 것이다.

그날에 우리는 참으로 그리스도와 같아질 것이며 그분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될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삶 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어떤 그리스도인도 영적으로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이르지 못한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삶과 인격의 변화에 필히 정도의 문제가 있음을 인정한다.

“음, 이제 그것이 완성된 것으로 보이니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하나님이 초상화에 서명을 하셨다. 나는 나 자신 안에서 예수님을 본다!”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의 실제적인 적용과 그것이 날마다 요구하는 것들이 있다. 세례 요한은 오래전에 그것을 깨닫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라고 말했다.

반드시 나는 점점 더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점점 더 커져야 한다!

사실상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당신의 결단과 헌신은 당신이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가 매순간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다”라고 고백함에 따라 평안과 능력과 결실이 점점 더 커질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낼 큰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결단을 요구하고 계신다. 우리는 결정을 해야 한다.

“나의 길이냐, 그리스도의 길이냐?”

하나님은 그 아들의 의를 내세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데 나는 나 자신의 의를 주장할 것인가? 여전히 나 자신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 살 수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면 그리스도의 영광과 찬송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

“내가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가? 내가 나 자신의 계획을 가질 수 있는가?”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을 하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살 때 비로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분노, 증오, 실망, 두려움, 욕심, 슬픔< 수많은 감정들이 내 마음 속에서 요동칠 때 조용히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평안을 주시옵소서.
평안을 주시옵소서.
— 피가희, 피가인 작가 —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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