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24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1월 28일 2024)

기도가 안 될 때 꼭 기억할 조언
기도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다고 주께 말하십시오. 기도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주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결정을 내리기 위한 필요한 거룩한 지혜와 지식을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라. 매일 아침 그렇게 하라. 초창기에 나는 답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늦게 까지 자지 않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답울 주시기를 기다렸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성령께서 안내하는 말씀을 주실 때까지 성경을 읽었다.

내 마음대로 결정하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여기에 축복해 주세요” 하지 말고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여쭤보기.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룩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더라.” (눅 22:44) 전투적으로 기도하신 이유는 딱 하나이다. 기도의 능력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다 틀렸어…주님께 돌아갈 염치가 없어…
아니요. 삼손은 완전히 붙잡힌 상태에서도 회개합니다.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탕자의 마음이 떠날 때부터 아버지는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버지 사랑. 기억하세요. 계속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역에 기도의 수고가 선행되거나 동반되지 않으면 한갓 인간의 노력으로 변질되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지치게 할 뿐입니다.

기다리라는 것은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 아니다.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을 통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걱정하고 염려할 문제는 한꺼번에 터진다.
문제가 밀려오면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게 된다. 그러나 물에 빠져 허우적대면 더 깊은 물로 끌려간다.
태산 같은 문제 앞에서 고백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셨으니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문제에 개입하신다. 놀라운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신다.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법을 배워야 평강 가운데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우리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 16:3)

>>> 삶과 신앙 (1월 21일 2024)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다스림과 은총을 경험 가능한 최소한의 공동체를 만드셨다.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과정의 소그룹이었다. 신약의 교회들 또한 작은 규모의 ‘소그룹’이었다. 유대인의 회당과 같은 독립된 건물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간, 가정에서 매주 정기적으로 모였다. 음식을 나누며, 찬양을 부르며, 말씀과 예수님의 삶에 대한 나눔이었다. 곧 예배였고 성도의 교제였다. 성령님 안의 은혜와 사랑의 공동체였다.

오늘 교회들도 주일예배에서 가능하지 않은 성도의 교제와 삶의 변화를 누릴수 있는 소그룹 모임을 갖고 있다. 성경 지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이 삶이 되지 못함을 경험한다면, 말씀에 의한 거룩한 부흥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소그룹 모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마음이
변하게 된다.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서로 기도하고, 삶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서로 도전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삶의 변화를 만들도록 서로 격려하기 때문이다. Oikos 모임에서 기도 제목을 세세히 나누며, 깊은 고민을 나눌 수 있고,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서로를 통해 경험할 수 있다. 세상과 이웃들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는 통로가 된다. 시대와 문화의 변화로 신앙생활이 위축되고, 복음을 직접적으로 전하기 어렵지만, 여전히 사람들과 세상은 하나님이 필요하다. 헛된 소망을 품고 허우적거리는 사람들, 상처와 고통 가운데 있는 세상, 치료와 위로를 필요한
사람들,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야 할 이웃들, 이들 모두가 구주 예수님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Oikos 모임은 예배, 말씀, 전도, 교제와 성장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존재한다. 사람을 변화시키며 풍성한 인생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초이다. 성도의 교제는 단지 다과나 식탁의 친교의 범주가 아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상실감에서 소속감으로, 실패를 딛고 성취감으로, 패배주의를 벗t고 자존감을,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다. 이 축복을 가족들, 친구들, 이웃들, 세상과 함께 나누게 된다. 서로가 배우고, 본이 되고, 변화되며
예수님을 더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로 성장한다. 함께 건강하게 성장하고, 역동 있게 신앙생활하며, 더 풍성한 믿음의 열매를 맺자.

소년 다윗이 전사 골리앗을 마주할 때, 시냇가에서 돌을 5개 선택했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승리하지 않았는가? Oikos 만남을 통해, 예배의 요소를 더욱 강화하며, 기도를 배우고, 서로를 격려하며 하나의 공동체로 성장하자. 더 깊고 넓은 예배자의 자리로 나아가자.
— 소그룹 모임이 역동하려면 / 한국 목회자 협의회 —

세상의 소금과 빛
예수님은 “빛이 되라”가 아니고 “너희는 빛이라”고, “소금이 되라”고 아닌 “너희는 소금이다.”고 선언하셨다. 성도의 정체성과 본분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무언가를 성취하면 가치 있는 인생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을 태워 빛을 발산하라. 자신을 녹여 세상과 사람들을 썩지 않게 만들라고 한다. 이런 영향으로 교회와 성도 역시 무언가를 해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려한다. 이 유혹에 넘어가면, 율법주로 변질 된다.

주 예수님의 복음은 누구든지 예수님 안에 있다면, 새로운 피조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세상과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세상의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다. 소금과 빛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면,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세상의 빛으로 살게 된다. 이 새로운 정체성은 열심히 노력해서 도달하는 목표가 아니다. 짠맛을 열심히 내서 소금이 되고, 더 밝게 타올라서 빛이 된다는 세상 논리가 아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라면, 이미 그러한 존재가 되었다는 예수님의 선언이다.

세상은 현재 우리 삶의 터전이며, 부름을 받은 자리이다. 성도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교회가 존재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삶의 현장은 안락함보다는 불편한 자리, 환영보다는 조롱 받는 자리일 수 있다. 소금의 가치는 홀로 있을 때 나타나지 않는다. 소금은 그 특성상 타자를 위해 쓰일 때 그 가치가 드러난다. 바구니 안에 가둬놓은 등불은 아무리 밝게 타올라도 의미가 없다. 그 등불을 밖으로 꺼낼 때 온 사방이 밝아진다. 교회와
성도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정체성을 드러낸다. 삶의 현장에서 그 가치를 발산해야 한다. 이 땅과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려 않기 때문이다. 삶의 현장에서 등불이 되면, 당연히 어둠은 사라지고, 빛이 비췬다. 예수님과 함께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죽으면, 예수님으로부터 생명력을 받아 세상의 소금으로 살게 된다. 우리가 소금의 존재로 살면, 소금의 맛을 내게 된다. 세상과 사람들이 썩지 않게 된다.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다”는 정체성을 기억하자. 우리의 존재가 먼저 빛이 되면, 빛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빛을 발산하게 된다. 우리가 먼저 소금의 존재가 되면, 소금의 맛을 내게 된다.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는 교회, 예수님으로부터 생명력을 받는 성도가 되자. 소금이란 존재, 빛이란 존재가 되어, 세상의 소금과 빛 된 소명을 감당하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엡 5:8-9)
(출처: 삼일교회)

>>> 삶과 신앙 (1월 14일 2024)

우리는 하나님이 지휘하시고, 예수님이 싸우시고, 성령님이 지원하시는 전쟁에 참가한 군사들이다. 혹자는 “전쟁이 싫습니다. 체질상 저와 맞지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목회자나 대표자들이 싸우는 것
아닙니까? 믿은 지도 얼마 안 됐습니다. 제발 이 전투에서 빼주시오.”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몇 소수만 대표로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군사로 징집되었다.

믿음으로 달려가는 이 해, 모든 성도는 초신자든 직분자든 상관없이 이영적 전투를 피할 수 없다. 믿음으로 살아갈수록 전쟁은 더 민감해 진다. 어린아이 때 싸우는 전투가 있고, 청년일 때 싸우는 전투가 있다. 영적
전쟁을 피하려거나, 무시하려하면 더 큰 위기와 어려움이 닥친다. 믿음의 삶에서 당하는 위기는 영적 전쟁보다는 안일함 때문일 경우가 더 많다.

적을 대면해 싸우는 것이 유리할까? 도망하며 뒤에서 마주하는 것이 쉬울까? 사탄이 우리 등 뒤에서 공격하도록 후미를 내어줘서는 안 된다. 믿음이 견고해질수록 이 싸움은 맹렬해진다. 세상의 전쟁은 냉전도 있고, 휴전도 있다. 하지만, 영적 전쟁은 냉전도 휴전도 없다. 사탄과의 평화협정은 더더욱 없다. 사탄은 거짓 평화로 교회와 성도를 유혹하며, 넘어뜨리려한다. 주님 앞에 설 때까지, 세상이 존재하는 한, 육신을 입고
사는 한, 영적 전쟁에서 예외가 되는 성도는 없다. 명예 제대도, 의가사 제대도 없다. 도망갈 수도 없고, 대체복무도 없다. 더욱이 영적 전쟁에서 병역의무를 거부할 수 없다. 전시 중, 병역의무 거부는 적에게 자신을
공양하는 꼴이 된다.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고, 이스라엘이 믿음이 아닌 불신앙과 불평으로 그 땅에 들어가서 싸우기를 거부한 결과 약속의 땅을 밟지 못했다. 싸우기를 거부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
예비 된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

두려움에 빠져서 불순종하고, 안일한 태도로 악한의 영과 죄와 싸우기를 거부하면, 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더 크게 방황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악한의 영과 싸우는 영적 군사들이다. 일주일 내내 적들에게 패배하고, 교회가 패배를 보고하는 자리가 아닌, 승리를 보고하는 하는 예배로 만들자.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싸우는 것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 아래 싸운다. 승리가 약속되었다. 크고 위대하신, 강하신, 용사이신 하나님과 더불어 싸우는 영적 군사들이 되자.

기억하자. 우리는 이 영적 싸움을 피할 수 없다.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갖고 용맹스럽게 나아가자, 약속의 산지를 정복하고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믿음의
용사가 되자.
 —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영적 용사 / 온 누리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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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신앙 (1월 7일 2024)

아무 것도 축적하지 말라.
나를 사랑하고 내 뜻을 행하라.

불행이 네 문을 두드리지 못하리니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 안에서 쉬면 평강을 얻으리라.
내가 도우며 네 소원을 이루리라.

고요히 흐르는 강 같은 평화가 너를 자극하는 모든것을 깨끗이 쓸어 내리라.

기도가 열매 맺지 못하는 것 같아도 지속하라.

마귀가 네 기도를 중단시키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할 것이니 마귀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 사악한 영들이 네 기도를 훼방할지니 그 말을 귀담아 듣지 말라.

네 신경을 쉬게 하라.

네가 지쳐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느니라. 늘 소망을 가져라.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물질을 가두지 말라.

나는 물질이 네 안으로 흐르게 하겠지만 너는 밖으로 흐르게 해야 하느니라. 가두는 자들에게는 결코 주지
않으리니 오직 나누는 자들에게만 주리라.

아무것도 움켜쥐지 말라. 아무것도 축적하지 말고 오직 필요한 것만 가지고 사용하라.
— [주님의 음성] 두명의 경청자 —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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