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18 삶과 믿음 모음
>>> 묵상 에세이
삶이 되어 버린 불평
공동체 안에서 감사의 결핍은 하나님 혹은 다른 이를 향한 불만과 불평으로 나타난다. 애굽을 탈출하면서 놀라운 기적을 계속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 갇히자 마자, 투덜거리며 왜곡된 기억을 끄집어 내면서 하나님과 모세를 불만스럽게 대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언약을 통해 그들을 구하시고 필요를 채우셨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평으로 인해 깨졌다는 사실이다.
투덜거리는 말은 공동체 안에 쉽게 전염된다. 토로하는 불평과 불만이 몸에 밸 수도 있다. 그것은 쉽게 습관화되고 곧 모든 것이 성에 차지 않게 된다. 감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우리의 삶에 가져다 주는 선물에 더 민감해지지만, 불만이 있으면 우리가 받은 것에 대해 둔감해진다.
C.S. 루이스가 쓴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등장 인물인 교사는 불평이 몸에 밴 불행한 여인을 이렇게 말한다. “불평의 껍데기 아래 실제로 사람이 있다면…우리는 다시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을 겁니다…처음에는 불평하는 기분으로 시작하지요…후회하고 거기서 빠져 나온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더 이상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치지 않는 날이 올지 모릅니다…그때는 그저 불평 자체가 기계처럼 영원히 반복될 겁니다.”
교회와 공동체에 대해 불평하기란 쉽다. 문제란 항상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지도자들은 진실을 말하는 것을 불평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목회자들이 모였다 하면 싸움 이야기를 하거나 힘든 교인들에 대한 불평을 늘어 놓는다. 그러나 본회퍼는 지도자들이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교회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고발자’가 되라고 우리에게 교회와 공동체를 맡기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욕심과 씨름하고 있다. 존 웨슬리는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신 그분께 감사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분이 주신 것을 거절하고 불평하는 것이다. 그분의 지혜나 선하심을 얼마나 자주 의심했는가? 이것이 과연 감사인가?”
– 크리스틴 폴 『공동체로 산다는 것』 –
교회와 사역
찬양과 감정
“감정이 무너져 있어, 예배 시간에 찬양하기 싫어요”
오래 전 주일 오전 예배 찬양을 매주 인도했는데, 평소 맨 앞자리에서 열심히 찬양하던 한 집사님이 그 날따라 맨 뒤에 앉아 찬양을 하지도 않고 인상을 쓰며 있는 것이 보였다. 예배가 끝나고 집사님에게 가서 걱정하는 마음으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집사님은 어떤 일로 마음이 상해서 도저히 찬양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먼저는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나서, 따로 진지한 권면을 드렸다. “집사님, 찬양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집사님이 오늘 마음이 어려우시니까 찬양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셨지만,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그 어려운 마음도 하나님 앞에 내려 놓고 찬양하는 것으로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시작되는 거예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찬양하면 다시 마음에 평안이 찾아와요. 마음이 무너졌을 때 오히려 찬양을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집사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예배당에서 펑펑 우셨다.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피곤하고 예배시간에 늦은 것 때문에 찬양시간을 가볍게 생각한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여기서 ‘예배할지니라’를 헬라어로 따져 보면 원어상 명령어이다. ‘할지니라’, 이것이 명령어로 되어 있다. ‘찬양할지니라’, ‘예배할지니라’ 다 명령어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찬양과 관련된 용어인 ‘할렐루야’는 ‘할렐(찬양하다)’, ‘우(접속어)’ ‘야(여호와)’라는 명령어이다. 이 단어가 성경에 99회나 등장한다. 시편 기자들의 ‘찬양할지로다’도 명령어로 되어 있다. 이렇듯이 ‘찬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우리가 찬양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들에게 명령하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 안에서 뿐 아니라 항상 찬양하며 살아야 한다. 어디에 있든지 순간 순간 그 분을 찬양해야 한다. 그리고 그 명령을 기쁨으로 여기며 찬양할 때 노래로 찬송하며, 몸으로 춤추며, 입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찬양팀은 예배 안에서 예배자들이 이 명령에 잘 순종하여 찬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예배자들이 하나가 되어 함께 찬양하도록 하나님과 예배자들을 중계하는 역할로 섬기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찬양팀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도록 하는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된다. 나아가 예배/찬양팀은 특별히 훈련돼야 하며, 예배/찬양팀이 먼저 찬양 중 경배하며 그분의 임재를 경험해야 한다. 명령에 순종한 사람이 명령에 순종하도록 인도할 수 있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 백성훈 목사,『팀사역의 원리: 예배팀 운영의 실제』 중에서 –
>>> 묵상 에세이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섬김의 교회에서 찬양으로 헌신하면서, 또한 동역하는 분들의 섬김을 보면서 요즘 나의 고백은 ‘하나님이시여’라는 찬양이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
이제 내가 주께 고백하는 말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여로와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로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여로와를 찬양하리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
주의 이름으로 내 손 들리라.
예전에 나는 뭐든지 열심히 하기만 하며 다 잘 풀릴 줄 알았었다. 힘겨운 이민생활도. 가정생활도. 교회 생활도. 그러나 돌아보니 이민생활 20년 중, 최근 10년은 정말 고통의 연속이었다. 물론 더 참기 힘든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많겠지만 나에게는 그 기간이 극복하기 힘든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이제야 깨닫게 돼지만 특별히 주님이 내 몸을 쳐서 깨닫게 하실 때 가장 길고 큰 고통이었다. 주님의 뜻과 인도하심을 헤아리기 전까지. 그러나, 도리어 그 고통이 계기가 되어 찬양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철없던 나이에 주님께 서원했던 것이 생각났다. 중학교 3학년 여름 수련회에서 “앞으로 주님을 찬양하며 살겠습니다.”라고. 그래 놓고는 까맣게 잊고 살았었는데, 주님은 나를 잊지 않으셨다. 내 스스로 헌신의 약속을 실천하지 않으니 내 몸을 치셔서 내가 주님께 한 약속을 깨달아 다시금 돌이키게 해 주셨던 것이다.
오늘도 이 찬양은 나의 고백이다. 가사처럼 내 평생에 주를 찬양하며 주님만 의지하며 두려움 없이 살아 가야겠다.
교회와 사역
최근 사우스이스턴 대학교 선교학 교수인 척 로리스 목사가 ‘처치리더스닷컴’에 ‘예배인도자(찬양리더)들을 위한 기도 10가지’라는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다. 다음은 주요 내용이다.
- 그들이 인도 할 때 순결해 지도록 기도하라.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능력만으로는 교회가 음악으로 예배하도록 인도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되지 않는다. 경건은 필수적이다.
- 예배 팀이 진실로 한 팀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라. 지도자들이 직면 한 가장 큰 투쟁 중 일부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팀 멤버들로부터 온다. 팀 단결을 위해 기도하라.
- 그들이 하나님의 힘으로 인도하도록 기도하자. 목사인 나는 설교자로서 자신의 능력으로 말하려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재능 있고, 훈련 받고, 경험이 풍부하고, 종종 그들이 하는 일에서 최고인 예배 음악 인도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가정한다.
- 그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대부분의 예배에서 전체 회중을 바라볼 때 산만해지기 쉽다.
- 조용히 자신의 짐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평안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라. 모든 사람들이 무대에 있는 리더들을보고 있으며, 리더들은 그들이 인도하는대로 하나님의 기쁨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자신의 인생이 고뇌로 가득 차있을 때 그렇게하기가 어렵다.
- 잠재적으로 불평하는 사람들이 먼저 기도하게 하라. 예배 인도자들은 종종 예배 스타일 선호가 너무 주관적이기 때문에 종종 많은 불만을 받을 수 있다. 불평하는 이들로부터 그들을 지켜달라고 기도하자.
-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그들 자신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기도하자. 때로는 인도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을 놓쳐버린 세부사항들에 집중할 때가 있다. 그런 일이 교회의 예배 팀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 적들이 그들을 교만으로 유혹하지 않도록 기도하자. 예배에서 당신의 절대적인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그것을 실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 사이의 경계는 면도날과 같이 얇다. 인도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보호를 기도하라.
- 노래하는 단어가 말하는 단어의 준비 과정이 되길 기도하라. 이러한 작업은 배타적이지 않다. 그들은 보완적이다. 둘 다 중요하다.
- 누군가가 이번 주말 예배인도자들에게 “고마움”을 표하길 기도하라. 이 기도를 드리고 당신이 감사를 표하는 첫 번째 사람이 되길 바란다.
-크리스챤 투데이 (9/21) –
>>> 교회와 사역
[요한복음 4:23-24]
“우리가 꿈꾸는 예배 공동체” (1)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라!
예배를 강조하는 이유는 예배야 말로 교회 사역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혹시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흔히 도덕 중심적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인데, “예배만 드리면 뭐해?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아야지! 예배만 하고 다른 것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지?”
그런데 이런 의문에 대하여 전혀 걱정하지 마라. 예배만 드리고 다른 것을 하지 않는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예배를 드린 사람은 매우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이것이 예배의 의미다. 문제라면 단지 무의미한 예배를 드리거나 예배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자신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는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건성으로 드리는 사람들이교회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거나 투표한다는 것이다. 많은 교회 가운데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고 의사를 결정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참된 교회는 예배하는 자들에 의하여 움직여져야 한다. 장로도, 권사도, 목사도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다면 어떻게 영적인 교회가 될 수 있겠는가? 사도행전의 역사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뜨겁게 예배하며 기도할 때 시작되었다. 사도바울의 역사는 감옥에서도 끊임없이 예배하며 찬양할 때 일어났다.
본문은 예배에 대하여 아주 명확하게 말씀한다.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이유도 명확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시시기” 때문이다. 영이신 하나님은건물인 교회에만 거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교회의 예배는 교회 중심적인 예배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예배를 꿈꾸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는 교회공동체 중심적인 예배를 넘어선다. 예배는 우리의 익숙한 형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매일 매일 삶에서 역동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 김병삼 목사 –
묵상 에세이
신신하신 만왕의 왕, 우리 아버지!
주 여호와는 말씀대로 이루시는 참 신이십니다.
믿음의 자녀가 입을 열어 아뢸 때,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게 마옵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주소서.
보시기에 좋았던 이 땅을 죄악으로 물들인 인생을 불쌍히 여기셔서
지금도 아버지의 음성을들려 주시는데도
귀막고,입닫고, 생각 없이
망령된 심령으로 끌려가는 연약한 저희를 건져 주소서
아버지의 언약의 말씀이 저희를 통하여 열매 맺게 하옵시고
믿음이결국은 영원 구원임을 다시금 되새기게 도와 주시기를 간구하나이다.
우리가 아버지가 인치신 영혼, 어버지의 것이라 확정하신 귀한 존재임을 기억하며
주님 나라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도록 도와주소서.
그리하여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불쌍한 이들에게
나만 바라 볼 때는 희망과 소망이 희미해지오니
오로지 믿음의 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며 전진하게 인도하소서.
하나니의 말씀이 울려 퍼지는 곳곳에 예수님만 기다리며 사는 믿음의 세대로 축복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묵상에세이
도토리 이야기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야고보서 1: 14-15절)
이 성경 구절이 나에게 적용되는 일을 몇 년 전 경험했었다. 도토리 이야기이다.
우리 집 주차장 앞에 도토리 나무가 한 그루 있고 벽 쪽에 또 한그루가 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도토리가 안 열리더니 금년에는 제법 많이 달렸다. ‘나무도 그리 크지 않은데…’ 나는 도토리가 여물면 따다가 도토리묵이나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람쥐란 놈이 주차장 쪽에 있는 도토리나무에서 도토리를 하나씩 따는 걸 보게 됐다. ‘지가 먹어 보았자 얼마나 먹겠어.’
그런데 며칠 후 보니 주차장 쪽 도토리를 모두 따서 가져 간 것처럼 보였다. ‘이 녀석들이 한알도 안 남기고…’ 신기한것은 도토리에 상처가 나거나 썩은 것은 일단 다 버리고 온전한 것만 가져가더니, 그 다음에는 자기가 버린것을 다시 골라서 가져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래, 나무 하나에 있는 도토리는 네가 다 가져가라.’ 하고 다른 한 그루를 보며 익기를 바라고 있는데, 요놈의 다람쥐가 나무 하나를 다 털고 글쎄 다른 나무 있는 데로 가서 또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상처나거나 썩은 것은 죄다 따서 버리고 온전한 것만 가져 가고 있었다.
슬슬 약이 오르면서 ‘저 놈들이 심하네.’라고 생각하며 계속 두고 보았더니, 도토리가 거의 다 없어진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나는 욕심이 생겨 ‘저 다람쥐란 놈, 잡아 버려야겠어!”라고 작정하고는 어떻게 잡을지 궁리까지 하는 데 이르렀다.
그쯤 되니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됐다. ‘원래 저 도토리는 내 것도 아니고, 다람쥐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지 않은가. 그래도 나는 밥 먹고 살고 있고, 저 다람쥐는 겨울에 저 살기 위해서 하나씩 도토리를 모아 두고있는데…’ 나의 욕심이 그 도토리를 빼앗으려고 다람쥐를 잡아 죽일 작정을 하다니 내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 도토리 몇 알 때문에 가진 욕심 때문에 멀청한 다람쥐를 죽일 뻔하다니.
그래서 욕심이라는 것이 성경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었나 찾아 보았더니 18개의 적용구절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야고보서 1:14-15이 바로 나의 경우였다.
‘그렇구나. 내가 시험을 받는 것은 결국 나의 욕심이구나. 그 욕심에 내가 끌려 유혹이 되고 그 욕심이 점점 커져 결국 죄를 낳고, 성경 말씀데로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구나…’ 여기서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약하게 남에게 나타나지 않는 자기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사람을 해할수 있는 커다란 요인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요즘에 일어나는 많은 블행한 사건들도, 결국 자기의 욕심으로부터 시작되지않았나 생각된다. 이 성경구절은 이처럼 우리의 삶의 곳곳에 적용된다. 다람쥐한테 미안했고 이런 마음과 깨달음을 가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교회와 사역
수련회 단상 –
노동절 연휴에 전 교인이 교회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수련회를 가지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1층 라운지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유리 밖으로 비치는 밤하늘을 보노라니 잠 들지 못하고 서로를 향한 덕담과 아름다운 격려로 밤을 새다시피 했다는 여교우들.
맛난 저녁을 만들기 위해 갑자기 퍼붇는 빗 속에서도 바비큐 불을 살리고, 여러 사람이 별로 먹어 본 적이 없는 ‘돼지 옆구리 살’을 적당히 구워지도록 애쓰는 마음에 묻어 나는 섬김의 기쁨.
잠시 서 있어도 허리 아플텐데 쉬임 없이 기타를 들고 마음 깊이 울려 나오 찬양을 준비하는 열정. 그렇게 까지 안 해도 좋아 보이는데 뭔가를 귀에 쓰고 조금이라도 세밀한 소리의 오차를 점검하는 철저함. 그래서 모두의 목소리가 음악이 아니라 차라리 한 소리의 기도였나보다.
하루 종일 운전 후 먼 길을 달려와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려고 오는 헌신과 불편한 몸 때문에 교회에서 잘 수 없었음에도 새벽예배에 함께 하는 간절함. 우리 교회를 받쳐 주는 열정의 시작이다.
피곤할 쯤에는 조금은 건강한 교회 공동체답게 환한 교제와 웃음이 있다. 교제가 단지 영적 엄숙함의 곁가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신앙이 함께 열매 맺어 가도록 하는 수레바퀴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대화는 주님과 소통하는 통로였다. 삶에서 가지는 솔직한 실망과 나약함. 안일함과 불신. 하나님 앞에 내려 놓는 겸손함. 믿음을 갈구하는 고백. 찬양 속에서 주님을 아는 기쁨. 여러 이야기가 다 나와 맛 닿았다. 그래서 서로를 위한 기도가 곧 나의 기도가 돼 버렸다.
조선에서 죽어 간 선교사의 모습이 내 ‘편안한’ 신앙을 반성하게 하고 요나서의 말씀은 왜 그리 또 나를 돌아 보게 만드는지. 간절한 기도 때문인지 반쯤 쉰든한 목소리로 어디선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목사님. ‘좀 느긋하게 쉴 법도 한데…못 살아…’ 나는 교회를 위해 어떻게 섬겨야 할까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은 너무 부족해 맘 먹고 들여다 보면 문제투성이였을 수련회. 그 숭숭뚫린 구멍을 주님이 메워 주신게 분명하다. 주님이 불평의 시선을 은혜의 렌즈로 막아 주셨나? 주님이 때문에 긍정적이 되니 감사와 은혜로 넘쳐났다. 주님이 아니셨으면…이제는 주님께 더 잘해야겠다.
>>> 묵상 에세이
한두 번 넘어져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 (전도서7:16-18)
많은 크리스천들은 불의한 세상에서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 특히 한국 사회의 현실은 그 꿈을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현실 때문에 좌절하고 결국은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포기하고는 아예 세상 밖으로 나가 격리된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도서 기자는 이런 이원론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메시지를 들려줍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극단을 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물론 회색 지대에서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정직하게 살겠다는 목표로 살다보면 자기의 의를 드러내게 되며 윤리적인 결벽증에 빠지게 되고 자칫 주변에 있는 사람을 정죄하거나 세상에 대해 비관적이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정직은 헌신된 삶의 표현이자 의지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은 완전할 수가 없어서 때로는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다시 주님께로 돌아가는 과정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한두 번 실패했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명심하고 우리의 일터에서 끝까지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자세를 가질 때 우리의 일터에서 바람직한 윤리적 열매가 나타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걸려도 우리가 이런 바람직한 결과를 얻기 위해 오늘도 노력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