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019 삶과 믿음 모음

>>> 교회와 사역

우리는 어떤 교회를 지향하는가? 혹시 나도 모르게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대한 압박감 혹은 실패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작으면서도 교회다울 수 있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려는 고민의 일환으로 앞으로 칼 베이더스, 『작고 강한 교회』 (생명의 말씀사, 2018)의 내용을 소개한다.

작은 교회는 다르다

작은 교회 목회자들은 처음에는 온 열정을 다해 사역을 시작하지만 고된 사역으로 심신이 고갈되기 쉽다. 때로 변명으로 최선을 다 하지 않을 때도 있다. “돕고 싶지만 예산이 충분치 않습니다.” / “대형 교회처럼 전문적 음악가가 있으면 더 많은 사람을 끌어 올텐데.” / “나는 성격이 급해. 따라서 관심 없는 이들을 모아서 팀을 구성하기 보다 내가 직접하는 게 나아.” / “사람들은 우리 교회처럼 작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더 원하지 않아.” / “나이든 사람들을 훈련하는 일은 힘들어.”

작은 교회는 자원이 부족하기에 하고 싶은 일 다 할 수 없으므로 변명 없이 부족한 점이 있을 때는 항상 좀 더 잘해 보겠다는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다. 방법을 알지 못할 때는 어떻게든 그 방법을 찾으려고 애써야 할 의무가 있다. 하나님의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먼저 모든 교회가 ‘크기의 문화’에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즉, 교회의 핵심 원리는 크건 작건 공통으로 적용되지만, 평균적으로 대형교회의 원리 가운데 100명 이하의 교회에 적용할 수 있는 교회 성장과 리더십의 원리는 4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큰 숫자의 법칙’에 따르면 규모가 일단 어느 정도 되면 사람들의 상호관계 방식이 큰 변화가 없고 행동이 예측 가능하기가 쉽다. 여론 조사처럼 표본이 크면 일일이 모든 이에게 묻지 않아도 국민 전체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것과 유사하다. 반대로 교인의 숫자가 작은 경우, 개개인의 개성과 그들 사이의 관계가 더 크게 작용하기 시작한다.

큰 교회는 잘 만들어지 주차 표시판, 친절한 예배 안내 위원, 연령층에 따는 보육 장치, 전문적 예배 팀 등 많은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작은 교회에는 상황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큰 교회를 나간다면 내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 나는 청중의 한 사람이다. 함께 찬송가를 부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며 듣고만 있어도 된다. 소그룹에 참석하지만 않는다면 능동적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내가 50명 이하의 교회에 나간다면 내게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기 어렵다. 예배 전 교인들이 대화할 때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다가 가 나를 소개해야 할까? 아니면 예배당에 혼자 앉아 있어야 할까? 또 교인들이 커피를 줄 때 그것을 예배당에 가져 갈 수 있을까? 내가 아이를 데려가면 어떻게 해야 할가? 대형교회에서는 안내판이나 잘 훈련된 안내위원 도움으로 어떻게 할지 금방 알 수 있지만, 작은 교회에서는 명시되지 않은 규칙들이 많거니와 다른 작은 교회와 다른 규칙들도 존재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교회들이 작다고 우울해 하지 않으신다. 지난 주일도 힘든 하루였을 수 있다. 일주일 내내 주일을 위해 기도하고 연구하고 이틀 전 순서 맡은 자들에게 책임을 상기시켰다. 주일에는 일찍 도착해서 문을 열고 모든 것이 깨끗이 정리됐는지 확인한 후 난방, 전등, 음향기기의 스위치를 켰다. 순서 맡은 이가 나오지 않아 당황한 가운데 적은 숫자로 예배가 시작됐다. 예배 후에는 필요한 것을 위해 기도하고, 건강에서 회복된 교우를 반갑게 맞으며 지난 주와 같은 불평을 인내심있게 듣고 개선을 약속했다. 분주한 목양과 사역의 주일이 지나갔다.

그러나 목회자와 사역자는 혼자가 아니다. 예수님은 지난 주 누가 왔고 교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신다. 크던 작던 교회에 구원받는 이가 있을 때 기뻐하시고, 우리가 충실함을 계속 유지할 때 힘 주시고, 고민하고 괴로워할 때는 함께 슬퍼하신다. 우리가 또 다시 충실하게 간절히 기도하며 이번 주일을 준비할 때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목회자의 감정이나 교인의 숫자와 상관없이 충성하기만 하면 기꺼이 상을 베풀어 주신다.

묵상 에세이


그림은 렘브란트의 <갈릴리 바다 가운데서 폭풍 만난 예수와 제자들>이다.  뱃머리의 다섯 사람이 격랑에 맞선다. 둘은 돛을 붙잡고, 둘은 돛대 주위에서 돛과 돛대에 지탱하려고 한다. 가장 앞에 있는 한 손으로 줄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자신을 덮치는 물을 막고 있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려봐야 그 물을 막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의 허튼 손짓만 그러할까?

배 중앙에는 두 명이 나온다. 한 명은 배 안의 작은 공간을 바라보며 숨을 곳을 재보는 듯하고, 그곳에 숨은 한 사람은 불안한 듯 밖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다. 뱃머리의 다섯 명이 호기로운 인간이라면, 배 중앙에 있는 두 명은 언제 부서져버릴지 모를 배 안에서 숨을 곳을 찾고 있다. 비겁자라고 혹평하고 싶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과 다를 바 무엇인가?

그 옆에 푸른 빛 계통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무너져가는 배의 돛줄에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있다. 모자를 쥐고 있는 손은 우리를 더욱 씁슬하게 만든다. 이 상황에서 모자를 지킨들 무엇하겠는가. 백척간두의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속한 것을 잡아보려는 어리석은 사람은 램브란트 본인이었다.

다른 다섯 명 중 화면 맨 위의 사람은 지금 일어난 위기 때문에 겁에 질려 있다. 그 아래 사람은 예수의 몸을 흔들어대며 항의하고, 그와 함께 한 사람은 예수에게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하는지 아니면 이 상황을 어떻게 해보라는지 알 수 없지만, 둘 모두 선생을 공경하는 태도는 아니다. 그 다음 인물은 무릎 꿇고 기도한다.그 아래 있는 사람은 배멀미를 이기지 못하는지 배 밖으로 토하고 있다. 그의 육체는 문제를 대면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할 정도로 연약하다. 배의 후미에서 배의 키를 잡고 있는 사람은 키를 쥐고는 있으나 배를 조정하는 못한다. 반면 예수는 이제 막 깨어난 듯 자신에게 항의하는 두 제자를 바라본다. 예수의 오른손은 가슴에 다른 손은 별 일이 없는듯 느슨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모두 한 배 안에 있지만 예수만이 다른 사람들의 동요에 아랑곳없이 평온을 유지한다.

램브란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은 생생하게 성서 이야기를 상상하도록 도와준다. 또한 그들의 모습은 ‘배’에 닥친 밤바다의 폭풍 속에서 감상자 당신은 어떤 인물과 유사한지 묻는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작은 힘으로나마 맞서는 돈키호테인가? 작은 피신처에 몸을 숨기는 비겁자인가? 부질없이 상황을 통제해보려고 배의 키를 잡고 있는가? 그저 겁에 질려 있거나, 위급한 상황에도 멀미에 지쳐 있는가? 무너져가는 터전에 몸을 지탱하여 부질없는 것을 방어해보려고 하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도움을 줄 사람을 무례하게 흔들어 깨우는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는가?

우리는 폭풍을 두려워하고 우리 인생이란 ‘배’에 그리스도가 함께 타고 있음을 망각하고 있다. 렘브란트는 자신을 그림 속에 그려 넣는 방식으로 예수의 질책을 다시 우리 귀에 생생히 들려오게 한다. “왜들 무서워하시오. 아직도 믿음이 없단 말이오?’ 아직도!
– 김학철, 『렘브란트, 성서를 그리다』 중에서 –

>>> 교회와 사역

우리는 어떤 교회를 지향하는가? 혹시 나도 모르게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대한 압박감 혹은 실패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작으면서도 교회다울 수 있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려는 고민의 일환으로 앞으로 칼 베이더스,『작고 강한 교회』(생명의 말씀사, 2018)의 내용을 소개한다.

2.그렇다고 작은 교회에 안주하지 마라
위대한 교회는 우연히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 교회는 크기와 상관없이 기도하고, 계획하고, 협력하고, 힘써 일하며 하나님의 소명을 충실이 이행한다. 그러나 스스로 위대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면 강한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의 규모가 커지기 전에는 강한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그릇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많다.

90펴센트의 교회가 200명 이하라는 보고를 교단 총회에서 듣고 나는(250명이 안되는 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쨌다고? 선한 일을 하고 하나님 나라 일을 하면 작은 것이 무슨 문제지?’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 나는 작은 교회와 큰 교회의 비율은 지역과 교단과는 상관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교회의 성장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 즉 교인의 숫자에 국한하지 않고 교회의 건강과 활력과 복음 전도의 열정과 같은 요인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쨌다고?’의 반항적 반문이 ‘우리 교회는 작아.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로 바뀌었다.  그 결과 턱없이 부족한 자원으로 큰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는 없었지만 쓸모 있는 사역을 하게 됐다. 잠시 멈추고 ‘작아서 어쩌지.’에서 이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물어 보라. 교회가 작기 때문에 유리한 이유를 몇 가지 살펴보자.

목회자는 목자다
목회자가 교회를 이끄는 데 필요한 행정력과 은사를 모두 겸비하고 있기는 매우 드물다. 목회자는 목자다. 목회자는 위대한 목자가 되어 작은 교회를 위대한 교회로 만들어야 한다. 목양의 모든 사역을 목회자 혼자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심신이 고갈되고, 교회는 건강하지 못하게 된다. 목회자는 신자들이 사역을 행할 준비를 갖추도록 도와야 한다. 교회가 작으면 그런 일이 더욱 직접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세상은 건강한 작은 교회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
만인 건강한 작은 교회들이 없다면 대안이 무엇인가? 작은 교회들이 일정한 성장에 이루지 못했다고 문을 닫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할 이는 없다. 작은 교회가 존해하는 이유는 그런 교회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신자들은 작은 교회의 세대 간 소통을 원하기도 한다. 믿음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는 더 작은 환경을 원하는 사람도 있다. 대형교회가 활기 차게 많은 일을 하지만 모든 사람을 다 충족시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

교인들은 목회자에게 목양받기를 원한다
건강한 대형교회는 대게 크게 성장하면서 ‘작게’ 사역하는 것을 계속한다. 이는 주로 소그룹 사역을 통해서 지속된다 . 그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소그룹 지도자가 아닌 목회자에게 직접 목양을 받을 때 영적으로 잘 성장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그런 욕구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일 수 있다
사역자라면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의 계획보다 뛰어나고 교회는 그의 뜻에 의해세워진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세세히 분별하려고 노력하면서 겸손히 전략을 펼쳐 나가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가 작고 건강해져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는 ‘더 큰 것이 좋다.’는 사고 방식에 사로 잡힌 문화 속에 살고, 그런 사고 방식이 교회 안에도 만연돼 있다. 나는 교회가 건강해지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생각한다. 크기의 문제를 건강의 문제와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다시 말하면 작다는 것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사람들을 섬기고,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뜨거운 열정 없이 사역을 대충해도 좋다는 변명거리가 될수는 없다. 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작은 교회를 상상해 보라. 작다는 것이 더 이상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묵상 에세이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누가복음 12:20-21)

잘 아는 이 부자의 비유는 간단 명료한 메시지를 주고 있다. 우리에게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그 재물을 다 누릴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위해서만 재물을 쌓아놓을 뿐, 하나님께 대하여 풍성하지 못한 자”의 결말이다.

사실 이 가르침은 우리 삶에 큰 도전이다. 수시로 재물이 많으면 평안과 즐거움이 있으리라는 생각하는 우리에게 그것은 착각임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는 우리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가 없다는 점이 때로 우리를 근심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내가 조금만 더 가지면 행복하리라는 믿음. 그러나 어리석은 착각. 그런데도 여기에서 생각이 떠나지 않는 이유는 영혼이 잘되기를 최우선의 목표롤 삼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자가 됐으니 이제 나는 행복할거야.’라고 여기는 사람이나, ‘저 사람은 많은 재물을 쌓았으니 행복하겠지. 난 뭐야.’라고 비교하며 불행하게 느끼는 사람 모두 이 어리석은 부자와 다를 바가 없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재물의 많고 적음 자체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재물을 가진 자도 자기 재물에 의지하지 않고, 재물이 없는 자도 재물을 가져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적 성숙이 절실하다. 나는 지금 얼마나 이 재물의 문제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는가?

Rembrandt,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 The Rich Fool]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의 비유를 보여준다. 부자는 손에 금화를 쥔 채 보고 있다. 쌓여 있는 책은 17세기 당시에 흔히 허영심의 상징이었다고 한다. 또한, 주변에 보이는 글자는 히브리어로 성서적 배경을 나타내므로 부자의 어리석고 비성경적인 부의 집착을 대조시킨다. 이 비유를 통해 부를 위해 인생을 다 쓰는 허망함을 교훈하며, 돈을 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풍성한” 삶이 지혜로움을 말한다.

>>> 교회와 사역

우리는 어떤 교회를 지향하는가? 혹시 나도 모르게 교회의 외형적 성장에 대한 압박감 혹은 실패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작으면서도 교회다울 수 있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려는 고민의 일환으로 앞으로 칼 베이더스,작고 강한 교회(생명의 말씀사, 2018)의 내용을 소개한다.

1.문제 제기: 숫자에서 자유로와지다.
많은 목회자들이 교회가 작다는 것을 ‘문제’로 간주해 어떻게 하면 큰 교회로 성장시킬 수 있을지 고민할 때가 많다. 그러나 교회가 작다는 것이 곧 실패라는 것은 편견이다.  많은 이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를 댄다.
-작은 교회는 내부 지향적이다.
-작은 교회는 변화를 두려워한다.
-작은 교회는 사소한 시기심과 내분이 많다.
-작은 교회는 지역사회를 복음화하려는 열의가 없다.
-작은 교회는 계획없이 운영된다.
-작은 교회는 그냥 작은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이것은 작은 교회가 아닌 ‘건강하지 못한 교회’의 특징일 뿐이다. 만일 작은 교회가 우호적이고, 외부지향적이고, 선교적이고, 혁신적이고, 관대하고, 예배가 풍성하다면 어떻게 될까? 사실 이런 가정도 필요 없이 우리도 이런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나는 작은 교회가 큰 교회보다 더 나은지를 주장하거나 작은 것에 만족하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작은 교회가 문제도 아니지만 미덕도 변명거리도 아니다. 핵심은 작은 교회도 아름다고‘위대한’ 교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교회 성장은 고귀한 목표이자 큰 축복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교회의 숫적 성장의 렌즈로만 바라보면 많은 것을 놓지기 쉽다. 나도 목회 사역을 하면서 성장에 관한 원리들을 실행해 보았고 실패를 경험하며 도발적 질문을 던지게 됐다: “지금의 작은 교회가 역동적이면서 건강하게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이처럼 양적 성장의 렌즈가 아닌 새로운 렌즈로 보면서변명이 아닌 믿음을 가지게 됐다. 예를 들면, 예배 음악이 훌륭하지 않다고 열정 없는 예배에 안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재정이 부족하다고 관대하게 배풀지 못하는 것은 옳지 않다. / 사람들이 우리 교회와 같은 교회에 다니는 것을 더 이상 원하지 않는다는 변명을 옳지 않다.

동시에 교회가 작기에 유리한 점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목회자는 목자로서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사역을 행할 준비를 잘 도울 수 있다. 대형교회와 달리 목회자가 필요시 쉽게 직접 목양을 통해 영적 성장을 도울 수 있다. 혹은 하나님의 계획일 수 있기에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세세히 분별하려고 노력하고 겸손히 우리의 전략을 펼쳐나가야 한다. 자, 이제 새로운 렌즈를 끼고, 건강하고 활기차고 효율적인 작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더 잘 인도하고 신자들을 더 잘 목양하고 예수님을 더 잘 예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자. 이것은 작은 교회의 근본 원리이다.

묵상 에세이

김준곤 목사의 [예수칼럼] “악마의 풍자적 팔복(八福)”

교권 쟁취의 챔피언은 복이 있나니 나의 충성된 종에게 주는 면류관을 받으리라.
예수 이름으로 자주 성내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내 나라 시민권을 얻을 것이다.
온갖 이유를 들어 교회 출석과 헌금을 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내 나라 준회원이라 일컬을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사람을 미워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에게 복음 대신 예수 이름으로 증오와 분노와 고발과 싸움을 심는 자는 복이 있나니내 나라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다.
신앙 사업에 너무 바빠서 기도할 틈이 없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내 나라 신입 회원증을 받을 것이다.
예수 이름으로 인도와 사랑과 자유와 정의를 설교하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최대한 탈색해 버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나의 명예 제자가 되리라.

>>> 교회와 사역

의로운 예배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장 1~2절)

하나님이 받으시기 기뻐하시는 예배는 우리의 생명을 드리는 예배이다.

1.생명을 드리는 예배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할 때, 정의로운 삶이 무시된 은사 추구의 예배를 뜻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예배, 즉 공의를 행하는 삶의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2.우리 마음이 변화를 받아야 한다.
진정한 개혁은 외면적 개혁에 머룰지 않고 내면적 영적 변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이에 바울이 말하는 의로운 예배의 3가지 조건이 있다.

a) 세상을 본받지 말아야 한다.
삶의 예배란 세상의 각종 풍조와 행실을 좇아가는 혼합주의를 배격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 기독교가 동성애를 받아들이며 세상의 풍조를 답습하는 것을 보라. 성경의 권위를 버린 오늘날 미국교회는 버리고 있다. 기업체의 경영세습이 한국 대형교회에서는 목회세습으로 자리잡았다. 목회자 윤리가 세상 윤리보다 높지 않고 저들에게 설교할 수 있는가?

b)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다윗처럼 우리의 죄를 날마다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날마다 새로움을 간구해야 한다: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c)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란 항상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다. 교회와 성도가 행해야 할 일은 사람의 편의와 관심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부정과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자세가 필요하다.

3.오늘날의 한국교회, 무엇을 추구할 것인가?
한국 교회는 개인구원과 행복 지향의 복음에서 탈피해야 한다. 공의와 인자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큰 교회를 이루는 것이 교회의 성공인가? 외형적인 성공 자체는 기복적 성공과 구별이 될 수 없다. 십자가의 비움과 희생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종교적 야망과 성공을 바라는 기복종교로 전락하는 것이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왜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는가? 낮아짐과 자기 비움과 희생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대형교회의 세습 사태가 그것을 말해준다. 진정한 복음주의자는 섬김과 희생을 통해 삶이 예배가 되는 성화를 추구한다.
– 김영한 교수(한국 복음주의 협의회 신학위원장), 2018.10 발표 논문 요약 –

묵상 에세이

우리의 미래를 맡기게 하소서
주님의 능력을 확신하며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게 하소서
우리들의 삶을 주님께 맡기게 하소서
소심하고 연약함에 빠져
무기력하지 말게 하시고
믿음으로 기도에 활력을 갖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하여
낮은 곳에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믿고 기도하게 하소서
기도를 통하여 온 우주를 인도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소서
기도를 드림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우리의 미래를 맡기게 하소서.
– 용혜원 목사 <묵상기도365일> –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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