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19 삶과 믿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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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사역

교회 공동체가 사랑을 실천하는 10가지 방법

교회와 같은 가정, 가정과 같은 교회를 꿈꾼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이고 자매라고 말하며 예수님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이고 자매라고 말씀하셨다. 한 가족인 우리가 교회 공동체를 이루면서 서로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1. 서로를 위해 기도하기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살전 5:25)는 말씀처럼, 교회 공동체가 서로를 향한 사랑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기도이다. 습관적으로 ‘기도할게요’라고 말하고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진심어린 마음과 태도로 함께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형제 사랑을 가장 잘 드러내는 모습이다.

2.잘 모이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개인주의와 다원주의는 교회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식사하며 봉사하는 교제 중심의 문화를 위협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서로를 섬기는 것만큼 가장 확실한 사랑의 실천이 없을 것이다.

3.‘서로’ 안에 살아가기.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6). “‘서로’ 문안하라”, “‘서로’ 평안하라”, “‘서로’를 위해 선을 추구하라” 등 성경에서 “서로”라는 단어는 90번 가까이 사용된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공동체에서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공동체 안에서 타자를 위한 삶은 곧 자신을 위한 삶이기도 하다.

4.봉사하기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 4:9). 교회를 섬기는 것은 개인적인 차원과 공동체적 차원 둘 다 의미한다. 큰 그룹을 위한 사역일수도 있고 작은 그룹의 사역일 수도 있다. 주일학교 교사와 차량봉사를 할 수 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경제적, 사회적 섬김을 제공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좋은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일 것이다.

5.서로 존경하며 칭찬하기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롬12:10).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은 인정과 칭찬이다. 서로를 깍아내리는 문화가 일반화되어 있는 오늘날, 교회 공동체 구성원은 서로를 칭찬하고 인정하는 새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로 서로를 격려하면 좋을 것이다. 잘 한 일이나 특별한 섬김의 봉사 믿음, 안에서의 삶을 인정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6.격려하기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살전 5:11). 교회 공동체 안에 힘들어하는 이들을 위로하는 것도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의 한 모습일 것이다. 한 통화의 전화나 따뜻한 위로의 메시지는 어려운 삶의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될 것이다.

7.끝까지 용서하기.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하나님의 자녀로서 한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는 교회 공동체가 사랑의 실천으로 서로를 용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갈등이 없을수는 없지만 그 갈등을 얼마나 지혜롭게 잘 해결하느냐가 중요하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 서로의 잘못을 고백하며 하나됨을 추구하는 문화를 만들 수 있다면 교회의 사랑의 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8.함께 기뻐하기.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전 3:13). 신앙 안에서 즐기며 기쁨을 취하는 것은 결코 죄가 아니다. 경건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즐거움을 함께 누리는 것도 사랑의 좋은 실천이다.

9.진실 고백하기.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 4:15). 사랑 안에서 참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진리의 하나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랑의 실천이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현명한 조언을 구하며, 함께 회개하는 것은 공동체의 유익과 덕을 세우며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귀한 모습이다.

10.경건의 삶을 살아가기.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사랑으로 채워지고, 사랑으로 살아갈 때 모든 죄로부터 멀어지고 불의를 거부하며,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거룩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다.

[문화 선교 연구원]

묵상 에세이

그가 우리를…” (골 1:13-23)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복음은 복되고 기쁜 소식, 굿 뉴스라는 뜻입니다. 나의 영혼을 그 다른 무엇 보다도 가장 소중한 것으로 여기시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나의 영생을 위하여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한 때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만화와 장난감들 중에 큰 인기를 차지했던 것 중 만화와 영화 캐릭터인 트랜스포머 (Transformer)가 있었습니다. 땅에 다니는 자동차가 되었다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멋진 비행체로 변신하는 로봇. 복음에도 이와같은 변신의 능력이 있습니다. Transforming Power! (트랜스포밍 파워!) 이 변화의 힘으로 우리는 종처럼 세상에 끌려 살던 삶에서 벗어났습니다. 모진 삶을 살던 우리는 더 이상 흙으로 돌아갈 것만 바라며 살지 않게 됐고, 우리에게 하늘의 것을 추구하게 하는 변화의 힘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 변화의 찬란한 힘은 허무하고 영원하지 못해 한계가 있던 우리의 인생을 영원하고 영광된 삶의 자리로 이끌어 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의 자리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영원한 파멸에서 구원의 자리로 옮기는 변화의 힘은 복음 안에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발견한 순간 우리는 복음 앞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나의 존재의 허무함을 진정 발견한 사람은 이 복음의 주인이신 분을 찾을 것 입니다. 이러한 복음은 누구로부터 온 복된 소식입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피와 물로서 십지가에서 이루어내신 복음입니다. 한 생명의 희생으로 무수한 생명을 구해내신 너무나 놀랍고 감사해서 할 말이 없는 진리입니다. 다시 주님의 죽으심 앞에 선 나는 오늘도 변화의 힘에 순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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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부활절 묵상

고난주간(Passion Week)
예수님이 로마군에 붙잡혀 빌라도의 재판을 거쳐 십자가에서 사형을 받기까지 지상에서 겪은 고난을 기념하는 한 주간. 보통 종려주일부터 고난주간을 지키고, 그 1주간을 예수님이 겪은 죽음을 앞둔 번민(겟세마네의 기도 등)과 온갖 수모,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행적에 따라 그 고통을 기념한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라틴어로서 ‘슬픔의 길’,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다. 빌라도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에 이르기까지의 십자가 수난의 길. 14세기 프란시스컨 수도사들에 의해 확정된 길의 14지점으로, 800m 길과 갈보리 언덕을 말한다.

호산나(Hosanna)
어원이 그리스어로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Save us)” (시118:25)라는 짧은 기도문이며, 때로 찬양으로도 쓰인다. 구약 시대에는 초막절에 제단 주위를 돌면서 환호성과 함께 “호산나”를 외쳤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군중이 외친 함성 중에 나온다. 이는 메시아의 구원을 간구하는 동시에 그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격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마21:9-15; 막11:8,10; 요12:13).

— 4월 14일 종려주일 —
(1) 영광의 예루살렘 입성 마21:1-11; 막11:1-11; 눅19:28-44; 요12:12-19
베다니에서 안식일을 지키신 주님은 다음날(일요일) 제자들에게 어린 나귀 새끼를 끌어오게 하셨다. 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슥9:9). 어린 나귀 새끼는 사람을 태울 훈련이 전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곧 바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메시아를 모시고 올라간다. 그렇다. 주님께 잡히면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아도 쓰임받는다. 예수님에 대한 백성의 기대는 로마를 제압하는 지상 국가를 건설할 메시아의 입성이었고 그들은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다. 그러나 주님은 백성의 기대와는 다른 십자가의 길을 가고 계셨다.

— 4월 15일(월) 예루살렘 성전 정화 —
(2) 성전을 깨끗하게 하심 마21:12-17; 막11:15-19; 눅19:45-48; 요2:13-22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일이었다. 당시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렘 7:11)이 아니라 타락의 상징이었다.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인정 할 수 없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죽이려 모의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3) 무화과나무가 마르다. 마21:18-22; 막11:12-14, 19-26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형식주의에 빠져 있는 자들 즉, 열매는 없고 껍데기만 화려한 율법주의자들을 은유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가?”

— 4월 16일(화) 성전 강화, 감람산 강화 —
(4) 논쟁: 예수의 권위 마21:23-27; 막11:27-33; 눅20:1-8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의 행함이 어떤 권위에서 나오는가? 묻고 예수님은 반문과 예문을 통해 설명하셨다.
(5) 비유: 포도원 농부 눅20:9-19; 마21:33-46; 막12:1-12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계속하여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예수님의 이 비유를 들은 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은 예수가 자기들을 가리킴을 알고 예수를 잡아 죽이고자 한다.
(6) 논쟁: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 마22:15-22; 막12:13-17; 눅20:20-26
바리새인, 헤롯당원 등은 예수를 잡으려고 로마에 세금(인두세) 내는 문제를 질문한다. 예수님은 카이사르(가이사)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성전 세)은 하나님에게 드리라고 답하심으로 그들을 놀라게 하셨다. * 데나리온(denarius)은 로마 화폐로 근로자의 하루 품삯이다(마18:28), 카이시르의 화상이 부조 되어 있었다.
(7) 논쟁: 부 활 마22:23-33; 막12:18-27; 눅20:27-40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부활 후의 인간관계 문제를 결혼을 예로 들어 제기하였다. (이스라엘에는 형이 자식이 없이 죽었을 때 그 동생이 형수에게 장가 가는 제도가 있었다.) 하늘나라는 차원을 달리하는 세계이다.
(8) 논쟁: 그리스도의 존재 마22:41-46; 막12:35-37; 눅20:41-44
그리스도와 다윗의 자손에 관한 논쟁을 전개하시어 바리새인들을 잠잠하게 하시었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어 세움을 받은 왕권, 제사장권, 선지자 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육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시었으나 영적으로는 성결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그의 우편에 앉아계시는 분이다.
(9) 외식(外飾): 서기관과 바리새인 마23:1-36; 막12:38-40; 눅11:37-54; 눅20:45-47
그들은 행함이 없는 말만 하는 자, 무거운 짐을 남에게만 지우고 약자를 멸시하는 자, 윗자리에 앉고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는 자였다.
(10) 헌금: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막12:41-44; 눅21:1-4
헌금은 양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다. 헌금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척도이다. 더 중요한 것은 헌금이 그 사람의 믿음에서 나온 것인가이다. * 고드란트(kodrantes, 호리)는 로마 화폐이며 앗사리온의 1/4이다 (마5:26). * 렙돈(lepton)은 그리스(헬라) 화폐이며 고드란트의 1/2이다 (막12:42; 눅12:59).
(11) 예언: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마24:1, 2; 막13:1, 2; 눅21:5-9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헤롯의 성전)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다. 이 예언은 이스라엘의 반항을 진압하려는 로마 군에 의해 70 A.D. 에 이루어졌다. 티토(Titus) 장군(후에 로마 10대 황제가 된 사람, 성경에서는 디도로 표기)는 예루살렘 성을 공격하여 성전을 완전 불태워 버렸다.
(12) 예언: 대 환란 마24:3-14; 막13:3-13; 눅21:10-19
제자들은 질문에 예수님은 말세의 징조 진술하신다. 전조는 거짓 그리스도의 미혹, 전쟁, 민족 간, 국가 간 대립과 갈등, 지진과 기근이다. 말세에 환란이 시작되어 믿는 자들을 잡아가고 죽이고 예수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 그리고 사랑이 식어진다. 말세의 끝은 땅 끝까지 주의 복음이 전파될 때이다.
(13) 예언: 전무후무한 환란 마24:15-21; 막13:14-19, 24-27; 눅21:20-28
아주 큰 환난이 와도 미혹되지 말고 굳건히 서야 한다. 거짓 그리스도, 적그리스도가 나오게 될 것인데 미혹을 받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순간적으로 임하시나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는 기쁨과 환희이다.
(14) 교훈: 무화과나무 마24:32-35; 막13:28-31; 눅21:29-33
(15) 교훈: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눅21:34-38
성도에게 종말은 매일 온다. 오늘을 잘 살면 그 속에 내일에 대한 준비가 들어있다. 그래서 쉬지 않고 기도해야 한다 (살전5:17). “오늘은 내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기에 가장 좋은 날인가?”
(16) 음모: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 마26:1-5, 14-16; 막14:1, 2, 10, 11; 눅22:1-6; 요11:45-53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설교를 마치시고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다시(네 번째) 예언하신다. 가룟 유다에 의해 팔리실 것을 예언하신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모여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민란을 걱정해 명절인 유월절은 피하기로 하였다.

 — 고난주간 제 4일: 4월 17일(수) 베다니에 계심 —
제사장과 서기관 혹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강론과 예언들로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이 극에 달했다. 화요일 가룟 유다의 예수님을 파는 음모는 수요일에도 계속 되었을 것이다.
-이 수요일에 제자들은 갈등했을 것이다. 메시아 왕국을 꿈꾸어 온 제자들에게 예수의 죽음 예언은 청천벽력과 같은 좌절을 가져 왔을 것이다.

— 고난주간 제 5일: 4월 18일(목) 성만찬, 겟세마네 동산 기도, 가야바의 심문 —
유월절을 맞아 제자들과 유월절 마지막 만찬을 가지신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 것은 첫째 잔을 들 때일 것이다. 셋째 잔을 들기 전 마짜를 먹은 유다가 만찬장을 떠나 대제사장에게로 간다.
(18) 기도: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26:36-46, 막14:32-42, 눅22:39-46, 요18:1
겟세마네에서 3번 기도하셨다. 유월절 만찬을 마친 예수님은 제자들과 감람산으로 올라가신다. 제자들에게도 깨어있으라고 이르시나 제자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한다. 십자가를 앞에 두신 예수님은 피의 기도를 드리며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시기를 간구한다.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야하는 사람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19) 잡히심: 목요일 밤에 예수 잡히시다. 마26:47-56, 14:43-52, 눅22:47-53, 요18:2-12
예수 제사장과 장로들이 보낸 일당에게 잡히시다. 잡히시고 금요일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니 예수님 수난의 날이다.
(20) 심문: 안나스의 집과 가야바의 집 마26:57-68, 막14:53-65, 눅22:54-55/63-71, 요18:13-14/ 19-24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 죽일 증거를 찾는다. 거짓 증인을 만들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했고,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3일 동안에 지을 수 있다.” 이 말씀으로 책잡으려 했다. 이는 이사야로 이미 예언된 것이다(사53:7).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요 재림으로 오시는 것을 볼 것임을 말씀하심으로 신성 모독으로 고발된다.

— 고난주간 제 6일: 4월 19일(금) 빌라도의 판결, 십자가에 달리심, 무덤에 장사 지냄 —
(21) 산헤드린(공회)에 서신 예수님 마26:57-68, 막14:53-65, 눈22:66-71, 요18:24
산헤드린(Sanhedrin, 뜻은 “함께 앉다”)은 유대 전 지역의 율법을 관장하는 유대 최고 자치 통치 기관(최고 재판소)역할을 해 왔다. 산헤드린은 재판을 하는 권한이 있었으나 사형만은 로마 총독이 하였다.
(22)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님 마27:2/11-14, 막15:1-5, 눅23:1-5, 요18:28-38
당시 유대지방은 헤롯 아켈라오가 통치했었는데 실정이 많아 왕권을 빼앗기고 로마직할지역이 되어 로마황제가 파견한 총독 빌라도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게 되었다.
(23) 헤롯 안티파스(갈릴리 지역 유대 왕)앞에 서신 예수님 눅23:6-12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 왕이고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님을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내 심문받도록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24) 빌라도 앞에 다시 서신 예수님 마27:15-26, 막15:6-15, 눅23:13-25, 요18:39-19:16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을 내렸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로 가시도록 섭리되어 있었지만 백성의 눈치를 보아가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판결한 빌라도는 불행한 사람이다.
(25)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마27:35-50, 막15:24-37, 눅23:33-46, 요19:18-30
예수, 십자가에 못 박히시다: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갔다. 이후 시몬은 안디옥교회 지도자가 되었다(행13:1). 니게르라고 하는 시몬이 구레네 시몬이라 보는 성경학자들이 많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그 머리위의 죄 패는 “유대인의 왕”이라 써 붙였다. 십자가 사건과 나의 관계를 생각하자!
(26)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신 예수님  마27:50, 막15:34, 눅23:46, 요19:30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 6시부터 9시까지 그 지역이 모두 어두워 졌다.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를 외치시고 영혼이 떠나셨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가르는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서 둘로 나뉘었다. 십자가 사건 현장에는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 등 여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27) 무덤에 안장되신 예수님  마27:57-60, 막15:42-47, 눅23:50-55, 요19:38-42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체를 장사하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장례를 위하여 몰약과 침향 섞은 것 을 가져왔다. 이들은 숨어서 예수를 따른 사람인데 장례를 위하여 나섰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도망가서 이 현장에 없었다.

— 고난주간 제7일: 4월 20일(토) —
(28) 예수님의 안식  마27:62-66
혹시 있을 시체 도난사건을 예방하기 위하여 무덤에 큰 돌로 입구를 막고 로마 경비병이 무덤을 지켰다. 부활예언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요구하여 무덤을 3일간 철저히 지켜 달라고 요구한다. 입구 돌을 봉인하고 군인들이 무덤을 지켰다.
(29) 천지 창조: 일곱째 날; 안식 성경: 창2:1-3
안식일 쉼은 창조 섭리와 맥을 같이 한다. 예수님의 안식을 깊이 생각하며 묵상하자!

— 4월 21일 부활주일 —
(1) 살아나신 예수님 마28:1-10, 막16:1-8, 눅24:1-2, 요20:1-10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은 예언하신대로 3일 만에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소식을 천사가 전하고 이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려는 여인들이 제자들에게 가는 길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2)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  마28:16-20, 막16:14-18, 눅24:36-49, 요20:19-23, 행1:6-8
저녁에 제자들이 모여 있는 방에 나타나셨다. 제자들에게 부활의 확증을 보여주시기 위함일 것이다. 사실, 예수 죽으신 후 사실 제자들은 지리멸렬이었다. 모두 흩어져서 자기 갈 길로 가고 당혹감과 자괴감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모든 민족을 가르쳐 제자를 삼고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을 가르치며 나아가 지켜 행하게 하라고 명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명령하신 일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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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사역

낚시할까요?

사순절 기간인 40일은 금식, 희생, 고행이라는 단어와 오버랩된다. 교회에서는 사순절 특별 새벽기도가 진행되고 김 집사도 이번 사순절 기간에는 취미로 푹 빠져 있는 낚시를 절제해 보리라 마음 먹어 본다. 주일 예배마저 빠지고 낚시에 매달리곤 했던 그는 ‘이번에야말로…’하며 수없이 결심했지만, 번번이 실패한 경험이 있는지라 조언이라도 얻고자 목사님을 찾았다.

김 집사: “목사님, 이번 사순절 기간에는 낚시를 끊어보려고 하는데요.”

목사님: “사실 여러 차례 실패하셨죠. 그렇다면 이번에는 낚시를 진지하게 해보면 어떨까요? 낚시하러 가고, 낚시대를 드리우는 모든 행위를 하나님께 감사로 드리면서요. 낚시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는 마음으로 말이죠.”

김집사: “예?”

그 뒤 김 집사님은 다시 목사님을 찾아갔다. 그간 낚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이상한 결심이 도리어 낚시대를 잡는 재미를 시큰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김집사: “목사님, ‘낚시를 즐겨도 좋다. 하나님도 좋아하신다. 아버지의 기쁨이다’ 이런 생각으로 살았더니 무언가 마음이 즐거워지고 평안해지면서, 이상하게도 낚시 생각보다 하나님 생각이 먼저 나더군요. 이젠 사순절이 부담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 같은데,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내야 할지 가르쳐 주십시오.”

목사님: “처음 사순절엔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신 시간을 기준해서 세례를 준비하기 위한 기간으로 40시간을 지켰고, 그것이 교회가 자리잡아가면서 40일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기간 동안 금식하고 절제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에 동참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죠. 하지만 절제로 인한 고통이 목적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부활의 기쁨에 동참하도록 성도들을 인도하는 기간으로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금식이나 절제라는 행동에 담겨 있는 정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그에 동참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순절 기간 동안 필요한 절제는 번잡함을 줄이고 생활과 정신의 안정을 유지하는 단순함이 아닐까요? 사순절은 단순히 ‘참아내고 견디자’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더 많이 닮아가 기쁘게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준비하는 시간이라는 거죠.”

김 집사님: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목사님: “이런 건 어때요? 서로 말하기 전에 진실한가, 필요한가, 공손한가, 세 번 생각하기. 질투나 불평을 피하기. 지나친 텔레비전 시청이나 인터넷 게임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고요한 휴식과 묵상의 시간을 넉넉히 갖기. 화려한 쇼핑이나 외식을 금하고, 과식하지 말고 평소보다 약간 적게 먹어 몸에 부담을 줄이기. 매일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길 바라는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리며 작은 일이나 어려운 일에도 그 순간 아버지 은혜에 감사하다고 기도하기. 일과 중에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주신다’고 반복해서 말하기.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구체적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기. 등등.”

어찌 보면 사순절은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할 수 있는 특별한 절기가 아닐까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대강절 기간이 연말 분위기에 들떠 지나가는 걸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비단 금식만이 아닌, 끊임없이 소비하면서 방만하고 분주해진 우리의 일상을 정리하고 되돌아 보면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시간으로 사순절을 보낸다면 참 값지고 행복한 시간이 될 수 있으리라.

● 정경환,「오늘」15호, 문화선교연구원

묵상 에세이

사순절은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 동안의 기간을 말하며, 이 기간에는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 그리고 부활을 생각하며 근신하고 회개하는 기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사순절 말씀묵상을 통해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는 시간 되시길 기대합니다

사순절 다섯째 주일(4/7) 시 103편 하나님의 사랑, 시 41:1-12, 요 12: 20-33
제 29일 (4/8 월) 마 24: 1-14 마지막 때
제 30일 (4/9화) 마 25: 1-13 열 처녀의 비유
제 31일 (4/10수) 마 25:14-30 달란트 비유
제 32일 (4/11목) 마 25:31-46 최후의 심판
제 33일 (4/12금) 마 26: 1-16 영원한 기념
제 34일 (1/13토) 시 139편 하나님의 보호와 심판

사순절은 영적 훈련의 기간입니다.
1. 매일 정해진 시간에 성경을 읽읍시다.
2. 매일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가집시다,
3. 특별금식과 절제훈련을 통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는 훈련을 합시다.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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