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19 삶과 믿음 모음

교회와 사역 

기도의 마무리

기도의 마무리 과정에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의 마지막도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며”를 가르치고 있다.

왜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는 것인가? 성령으로 충만한 기도를 한 후에 사단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사단은 죽은 심령, 무능한 심령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기도를 마치게 될 때, 마지막으로 성령을 소멸하게 할 수 있는 자신의 약점을 염두에 두고 시험(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것은 감정일 수 있고, 영적 교만으로 나타날 수 있다. 혹은 인터넷이나 세속적 즐거움이 주된 유혹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에게 침투하기 쉬운 교만 대신 겸손한 태도를 갖게 된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한 후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기도를 마무리한다. 이는 주님의 가르침이다. ”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이 놀라운 명령을 단순하게 주술적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은 우리에게 중요한 고백을 요구한다. 바로 ‘주님의 뜻 안에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뜻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고백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바리새인의 기도로 전락하고 만다.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기도다운 기도를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합심 기도의 핵심도 바로 주님의 이름 안에서 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18:19말씀을 보면 주님은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뒤이어 말씀하시기를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절)고 하셨다.

이는 합심기도의 핵심이 모인 숫자에 있지 않다는 점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합심기도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신앙고백의 일치’가 필요하다. 안목에 일치가 되지 않으면 합심기도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합심기도가 가능하려면 성경의 가르침에 굴복된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사람들을 하나의 목적으로 일치시켜 기도하게 만드는 주체는 성령님이다. 성령께서 회중들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에 집중시키시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 기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를 마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내 뜻을 구한 것이 아니라고 은연중에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도 가르침에 충실하게 된다.

– 김민호 목사

묵상 에세이

나와 당신이

우리 교회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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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에세이

하나님만 의지하라.

우리는 쉽게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하늘의 선물이다. 우리는 때로 이것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얻는다. 또는 고통을 통해서 유혹을 극복하면서 얻기도 한다.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이 건강한 영성을 얻는 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자신의 연약함을 숙고하라.
둘째,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가장 작은 일이라도 성취할 수 없음을 인정하라.
셋째,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구하라.
넷째, 우리에게는 그것이 없고, 그것을 얻기 위해 갈 곳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

주님의 발 앞에 무릎 꿇고, 우리의 요청을 들어주시기를 간구하자. 자기만의 환상, 죄의 경향을 하나 둘 버리라. 그리고 우리를 둘러싼 불가항력적인, 그러나 아직까지 감춰진 장애물을 보기 시작하라. 우리는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연약함의 목록을 작성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우리 자신을 더 깊게 통찰하도록 돕기 위해서 우리의 넘어짐을 허락하신다.

하나님은 아픈 마음으로, 우리가 교만한 것만큼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허용하신다. 우리는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우시기를 진지하게 구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보시는 것처럼 볼 수 있도록 구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더 이상 의지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같은 걸림돌에 다시 걸려 넘어진다.
-날마다 예수님 마음 가까이 / 버나드 뱅글리-

삶과 신앙

기도는 성도의 호흡이다. 기도 없이 크리스천이 되려는 것은, 호흡 없이 살려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있어, 기도가 이런 절대 절명의 자리에 있다.

기도를 쉬면 안 된다. 기도는 영혼의 숨소리이기에, 기도 소리가 작아지고 줄어든다는 것은 위기 신호다. 영혼의 숨이 가물거리는 것이 된다. 숨 쉬지 않고 살려는 것보다, 기도하지 않고 살려는 삶이 더 무모하다.

영적 침체도, 기도중단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 속에 신앙 생활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침체가 찾아올 수 있다. 조엘 비키(Joel R. Beeke)의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길 Disease and Cure』라는 책에서 말하는 영적 침체의 5단계는 다음과 같다.

1단계: “개인 기도를 소홀히 하는 단계”
기도하는 시간이 즐겁고 행복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번거러워 진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시간이 줄어들고, 기도회에 참석하는 발걸음도 뜸해진다. 이젠 개인 기도도 소홀히 하게 되었다. 이러한 징후가 나타나면, “영적침체의 시작이구나”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2단계: “신앙생활이 형식적으로 되는 단계”
개인 기도가 멈추면서, 그 다음으로 그 병이 번지는 곳은 신앙생활의 형식화이다. 성경도 읽고 예배도 드린다. 그러나 문제는, 이전 같지 않다는데 있다. 모든 것이 형식과 타성으로 변한다. 예배도 찬송도 감동이 없다.

3단계: “내면의 부패가 증가하는 단계”
생각하는 것이 조금씩 부패하기 시작하고 그 부패성이 점점 증가하는 단계이다.

4단계: “세속화가 증가하는 단계”
세속화가 증가한다는 것은, 외적 현상의 영적침체를 다루는 것이다. 이전까지는 영적으로 침체되기는 되었지만, 쉬쉬하면서 속으로 곪아터진 정도의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갈 때까지 가서 밖으로까지 드러나게 되는 단계다.

5단계: “성도의 교제도 사라지는 단계”
물론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다 부패해서, 현재의 신앙생활은 완전히 엉망이다. 그래도 실낱같은 한 가닥 희망이 남아있었는데, 이 마지막 5단계는 성도의 교제까지 완전히 사라져버린 상태를 말한다. 이젠 그 주위에 믿는 친구들도 없고, 세상친구들로만 포진된 상태이다. 적극적으로 죄도 짓고, 악도 행한다. 그래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다.

이런 침체에서, 돌아설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우선, 말씀이나 설교, 신앙도서를 통해 영적침체를 자각하는 것이다. 둘째, 철저한 회개 기도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기도이다. 영적침체의 시작도 기도이고, 그 침체에서 회복으로 가는 길도 기도이다.
도원욱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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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왜 어떤 기도는 다른 기도들보다 특별한가?
5명의 자녀를 둔 신앙이 좋은 어머니가 하나님께 암을 제거해 낫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두 달 뒤에 세상을 떴다. 마약 중독자가 직장을 잃고,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일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런데 이주일 이후 그는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마치 값 싼 회의적인 영화와 같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들이 발생한다. 실제로 다른 기도들보다 더 역사가 일어나는 기도가 있는가? 분명히 그렇다. 성경을 보면, 우리는 엘리야의 이야기에서 좋은 예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엘리야의 기도와 명령은 가뭄을 끝장내기도 했다. “길르앗에 우거하는 자 중에 디셉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고하되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왕상 17:1). 때가 되었을 때 그는 다시 비가 내리도록 기도한다. 무릎 사이에 머리를 두고 계속 7번을 간절히 기도한다. 다른 기도보다 더 효과적인 기도가 존재하는가? 여기 고려해볼 수 있는 3가지가 있다.

1.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위한 기도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항상 하나님의 뜻을 놓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방식이 더 낫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실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뜻을 갖고 계셨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의 방식보다 훨씬 훌륭하다.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그분의 뜻을 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맞지 않아 보일 때도 그러하다. 이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10절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이다.”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이다.

2.우리의 기도가 정말 우리에게 선한 것인가
마태복음 7장 9~1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그렇다. 우리는 하나님께 떡과 생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구하지만 실상 우리에게 뱀과 돌인 경우가 많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들을 주시진 않는다. 가장 효과적인 답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온전하시고 선하신’ 뜻을 구하는 것이다.

3.하나님께서는 이미 답을 알고 계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단지 ‘아니다,’‘기다려라’ 2가지로 응답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도가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에 대한 부인이나 연기는 빠른 응답이 아닌가? 많은 경우,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의 유익을 위해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부인하신다. 다만 우리는 이를 듣고 받아들이기를 꺼려할 뿐이다.

묵상 에세이

“지금까지의 오랜 결혼생활 동안 아내가 차려준 식사는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 그중 너무나 훌륭한 나머지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음식들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내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수많은 끼니들이 지금까지 내 생명을 지탱해줬습니다.”
어느 노목사님의 고백입니다. 살다보면 기억에 두고두고 남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개학 첫날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새 교실의 문을 살며시 열던 때라든지,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 종일 울기만 하던 시절이라든지,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순간 같은 것말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나’라는 사람을 다듬고 빚어온 재료는 우리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평범한 일상과 소소한 순간들일지도 모릅니다.
우린 무언가 특별하고 새로운 일들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고, 그래야만 내 삶이 의미 있고 특별해질 것이라 여깁니다. 하지만 내가 평범하게 흘려보내는 하루하루, 순간순간들은 내게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고르고 골라 허락하신 특별한 선물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에게는 버릴 수 없는 소중한 퍼즐의 조각들입니다. 그것들이 맞춰질 때 내 삶의 큰 그림이 아름답고도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 김민정 목사(좋은목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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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에세이

열혈 목사, 열혈 성도

 故 옥한흠 목사는 ‘설교는 십자가와 같은 고통의 작업’이라고 말했다. 만약 설교가 목사 본인의 생각을 채우는 일이라면, 목사에게 설교는 이토록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설교는 설교자가 깨달은 하나님의 음성과 뜻을 글로 쓰고 말로 선포하는 일이지 않는가?

그래서일까? 주일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필자도 설교 준비 때문에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 설교 준비로 생기는 부담감과 예민함은 토요일이 되면 극에 달한다. “왜 이렇게 주일이 빨리 찾아오는거야!”하는 짜증도 부린다. 그런데 이랬던 필자가 올해 2~4월만큼은 매주 금요일, 토요일을 학수고대했다. 혹시 이 시기 필자가 주일에 있을 세 편의 설교를 모두 주초에 완성했기 때문일까?  아니다. 사실은 드라마 ‘열혈사제’ 때문이었다. 이 드라마에는 검사 박경선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그녀는 출세를 위해 불의와 타협하는 검사였다. 하지만 성당 신부인 김해일과 만난 이후부터 조금씩 변해간다. 김 신부처럼 박 검사도 불의에 맞서 싸우기 시작하더니, 마지막회에서는 자신의 잘못된 과거에 대해 고백하고자 검찰 감찰부에 자진 출두까지 한다.

검찰청 입구에서 김 신부와 박 검사는 이런 대화를 나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길로 가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의 축복이 언제나 함께 하시길…” 이 대화 속에는 세상이 한국의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부탁하는 바가 담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땅의 목회자와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뜨겁게 살아가는 거룩한 본을 세상에 보여달라’는 요청이다. 드라마 제목처럼 ‘열혈 목사’’열혈 성도’가 돼 달라는 바램이다. 그런데 세상의 이런 요청은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부탁이요, 명령이 아니었을까?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목사들에게 바라는 ‘열혈 목사’는 자기의 욕심, 생각, 야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요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바르게 분별하고 설교하는 열혈목사이지 않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길인지를 자신의 삶을 통해 이웃과 사회에 증거하는 ‘열혈 목사’와 ‘열혈 성도’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남아 있는 드라마의 여운은 “임 목사 당신은 하나님의 뜻만을 설교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발버둥치는 ‘열혈 목사’가 맞습니까?”
– 임민성 목사 / 서부교회

삶과 신앙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0-41)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열어 주는 영적 호흡이다. 또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여 주시겠다는 보장이 약속으로 주어진, 복의 통로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의 창문을 열어 놓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응답의 창문을 열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요 14:14). 그런 점에서 결코 탁상공론이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응답을 얻는 실제적 경험이다.

언젠가 미국 신문에 충격적인 기사가 하나 실린 적이 있었다. 내용은 어느 돈 많은 구두쇠 노인의 외로운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그 노인이 죽게 된 원인은 놀랍게도 영양실조였다. 돈이 많은 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전혀 돈을 쓸 줄 모르는 구두쇠였다. 오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그런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은 하나님께 보장된 기도의 창문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풍성한 삶을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는 명목상의 그리스인들이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자신들의 삶 속에서 경험하지 못할까? 그것은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기도하셨던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될 만큼 간절하게 기도하셨지만, 제자들은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예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지적하셨다. 그 속에 담긴 중심적 의미는, 깨어 있는 자만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깨어 있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그래고레오’인데, ‘깨어 있다’ ‘지켜보다’ ‘방심하지 않다’ 등을 의미한다. 이에 대한 히브리어 ‘샤카드’는 성을 지키는 파수꾼이 깨어 있음(시 127:1)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깨어 있음’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긴박한 사태를 주의 깊게 바라보는 자세를 뜻한다. 곧 ‘깨어 있음’은 앞으로 닥칠 위기를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기도는 깨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우리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으려면, 자신의 삶이 위기 속에 있음을 직시하면서 오직 기도만으로 그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응답 받는 기도의 조건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외의 것들을 의존해서는 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다. 그런 외식적이고 중언부언의 기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과는 거리가 멀다. 기도의 가장 기본적 자세는 자신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절대 순종이다. 베드로가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 35)라고 장담했으나, 그것은 사실 자신의 의지에 근거한 자만이었다. 자신에 의존해 기도의 뒷받침이 빠진 베드로의 확신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 무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기도의 응답은 창조주이시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에 근거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깨어 있는 자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도의 창문을 열 수가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뒤에 있는 응답의 창문을 곧바로 활짝 열어 주신다. 지금은 풍요의 시대에 영적으로 고갈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할 때이다
– 권혁승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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