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19 삶과 믿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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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에세이
올바른 방향으로의 한 걸음
얼마 전 해외에 나갈 일이 있었습니다. 외국의 한 식당에서 음식을 시키려고 하니 그곳에 한국 사람이 많이 오는지 종업원이 한국어를 아는 척하고 싶어합니다. 우리 일행을 보며 “빨리빨리”라고 말하면서 웃습니다. 아마 아직도 한국인이 그리 보이나 봅니다. 이 말을 좋게 보면 부지런하고 신속하게 일을 하는 우리의 특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달리 보면 너무 급하기만 한 성격으로 비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목표만 주어져도 일단 열심히 합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파란 불이 들어오면 누구를 뒤쫓는 듯 재빨리 건넙니다. 계단을 오를 때도 뛰다시피 오릅니다. 그렇게 급하게 건너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 걸음걸이로 돌아가곤 합니다. 작은 목표가 주어지면 재빠르고 성실하게 임하지만 목표가 없어지면 동력을 잃기도 한다는 겁니다.
살면서 때로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함을 느낍니다. 직면한 문제에 재빠르게 대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정말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정신없이 많은 일을 처리한 날의 뿌듯함은 우리를 만족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때로 일이 늦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고민하는 날도 무척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김민정 목사(좋은목회연구소)
오늘의 찬양
주의 신을 내가 떠나 (Kelly Willard, “Where can I go from your spirit”)
주의 신을 내가 떠나 어디로 피하리까 / 주는 모든 것 아시오니 어디로 다니리까
내가 새벽 날개 치며 저 바다 끝에 거해도 / 어둠도 숨기지 못하리라 주님의 손이 날 인도해
주의 신을 내가 떠나 어디로 피하리까 / 주는 모든 것 아시오니 어디로 다니리까
내가 새벽 날개 치며 저 바다 끝에 거해도 / 어둠도 숨기지 못하리라 주님의 손이 날 인도해
주님은 내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시니 / 주님의 위대하심을 내가 고백하리다
주의 신을 내가 떠나 어디로 피하리까 / 주는 모든 것 아시오니 어디로 다니리까
내가 새벽 날개 치며 저 바다 끝에 거해도 / 어둠도 숨기지 못하리라 주님의 손이 날 인도해
시편 139:7-14에 기초한 이 곡은 Kelly Willard가 “예수의 피 밖에 없네”와 같은 전통 찬송가로 부터 영감을 얻어 예배를 위한 찬양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Willard 자신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고백하는 이 곡의 가사를 통해 우리 스스로의 신앙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비춰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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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정말 안전하니?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지금 있는 그 자리가 안전하니? 내가 진정 원하는 자리니?’
이렇게 물으실 때 당당하고 확신 있게 하나님 앞에 당신의 낯을 들어 말할 수 있는가?‘네, 주님. 저는 안전한 곳에 있어요.’정말인가? 지금 살고 있는 삶 정도면 괜찮은가? 지금 걷고 있는 그 길에서 주님을 만나도 괜찮은가? 남과 비교하여 이 정도 열심이면 괜찮은가? 우리 교회가 그래도 다른 교회보다는 건전하다고 자부하면 위안이 되는가? 내 모습이면 정말 충분하고 안전한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자리에서 아직도 붙들고 있는 죄,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고 있는 불순종의 자리가 위기의 자리이며 위험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또,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사 59:1-2).
회개 없는 용서를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죄를 떠나지 않고도 축복과 성공과 번영을 약속하여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믿게 만드는 곳에서 떠나야 한다. 진리를 믿는 게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믿는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기억하라.“거기는 결코 안전한 자리가 아니다! 위험한 자리다.”
죄를 잘라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믿으면,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는 자리에 설 수 없다. 진리를 믿지 않고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바를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이렇게 경고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갈 5:19-21).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해 진리가 우리의 결론이어야 한다.“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사도행전 3장 19절). 순종함으로 의에 이르는 진리(로마서 6장 16절)를 따라야 한다. 여전히 부들고 있는 죄를 온전한 회개를 통해 끊으며 말씀에 순종하며 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지 않기를 간구해야 한다.
묵상 에세이
“소원대로 이루리라” (김석균 곡)
오늘 예배찬양의 주제 찬양곡입니다. 찬양 사역자 김석균의 13번째 앨범에 수록돼 있습니다. 그는 “세상 일에 실패했어도 너는 절망하지 말라. 네가 너를 도우리라. 다시 일어서게 하리라.”는 약속을 믿으며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도구로 사용하실 뿐입니다.”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원합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 모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로 나갑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의 소원으로 삼고 전진하기를 결단합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 반드시 성공하리라
네 소원대로 이루어 지리라 네 기도대로 응답이 되리라
네 믿음대로 이루어지리라 하나님이 도와주시니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 반드시 성공하리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된 자 반드시 축복(성공)하리라
네 자녀에게 축복이 있으리라 네 가정 안에 평안이 있으리라
네 하는 일이 뜻대로 되리라 하나님이 축복하시니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자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된 자 반드시 축복(승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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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 15-18절에서 내면의 자신을 깨닫고 절규합니다.자신을 힘들게 만들고 괴롭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 입니다.
1.나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5절)”. 이 말씀은 내 안에 나를 움직이는 주체가 있음을 알려줍니다. 나의 잘못을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는 사람입니다. 실상, 우리의 삶에서 대립하고 갈등하는 주체는 대개 자신입니다.
그렇기에 마귀는 모든 것을 밖으로 투사하게 만들어, 적이 외부에 있는 것으로 속입니다. 실제로 마귀는 모든 것은 나의 외부에서 일어난다고 속삭입니다. “누구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사람은 이미 마귀의 투사에 걸려 있는 상태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현재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모두 타인의 잘못으로 투사하고 원망합니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영의 눈이 열린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보는 사람입니다.
2.경험의 부정성을 깨달아야 한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16-17절)”. 이 말씀은 나를 움직이는 존재가 죄라고 알려줍니다. 죄란 자기가 중심적이 되는 상태입니다. 이 죄는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배려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입니다. 이런 점에서 죄의 정체는 부정성입니다.
죄는 우리의 경험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도 경험하고 기쁨도 경험합니다. 물론 마음의 상처나 좌절도 경험합니다. 그러나 죄는 항상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게,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들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듭니다. 결국, 죄된 마음이 속에서 생겨나면, 언제나 부정적인 상황, 부정적인 세상을 보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나는 피해자” 라는 속삭임을 깨달아야 한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18절)”. 바울은 죄가 주체가 되어 작용하기에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영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나를 의미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나는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야단맞을 때는 그 사람으로부터 공격당하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모든 것이 외부에 있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 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들은 사실상 나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공격을 받고 있다는 기분은 죄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속삭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는 나를 감싸주는 것 같지만, 나를 언제나 약자나 피해자로 만들어 상대방의 잘못만을 보게 만들게 됩니다.
결국, 영의 눈으로 내 안의 적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는 존재로 가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래야 한다. “주님! 내가 힘든 것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 때문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그리고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될 때, 혹시 내가 가해자가 아닌가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소서!”
묵상 에세이
가끔 삐걱거리기는 해도
우리는 한마음.
하나님의 역사는 내가 함께 참여함으로 이루어져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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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영적으로 메말라지는 3가지 이유
크리스천은 인생에서 여러 다른 영적인 계절에 직면한다. 하나님의 구속적인 손길로 그것을 대면하면, 믿음 안에서 강하게 성장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크리스천이 직면하는 계절 중 하나는 ‘건기’이다. 여름과 마찬가지로, 건조함은 피곤하고 굶주리고 탈수되는 것을 느끼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계절로 들어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지만 우리가 스스로 그 단계에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영적으로 건조한 계절을 겪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하나님께 불순종한다
신명기 28 장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서 얻는 축복뿐만 아니라 불순종으로 말미암은 저주를 발견 할 수 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 얻게 되는 결과는 ‘하늘이 놋이 되는 것’이다.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신 28:23). 건조한 계절은 대개 응답이 없는 기도, 생명이 없는 기도가 특징이다. 건기가 심한 경우에는 죄를 회개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라.
2. 말씀과 기도가 부족할 때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가 부족할 때 건기가 올 수 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건기를 지나갈 때 기도와 성경읽기로 순종하는지, 그리고 예배에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지 체크해보라. 우리가 하나님을 찾으면 그 분에 의해 새롭게 될 수 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3)
3.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전환할 때
열왕기상 17 장에서 까마귀를 통해 떡과 고기를 먹게 된 엘리야를 읽는다. 후에 엘리야는 사르밧 과부를 통해 밀가루와 기름을 공급받아 양식을 얻는다. 엘리야가 시내에 머무르는 시간과 과부를 만난 때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나. 시내가 말랐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왕상 17: 7-9)
어떤 건조한 계절은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발생한다.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심지어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봉사에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많은 것을 갈망한다. 이럴 때 우리는 다른 것을 향해 가야 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엘리야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부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