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19 삶과 믿음 모음

>>> 교회와 사역

신자의 감사는 달라야 한다
1.일상에 감사하라.
이번 추수감사절은 받은 복만이 아니라 평소에 지나쳤던 사소한 일상에 더 감사하자. 그것이 신자가 행할 참 감사의 출발이다.

2.현재의 고난에 감사하라.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거룩한 뜻을 당장에 모를 수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난다. 고난 중에 어려운 여건으로 감사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고난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보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3.미래를 감사하라.
야고보 사도는 생명은 안개와 같다고 했다. 내일 일은 하나님만이 절대적으로 주관하고 그 성공 여부도 오직 그분의 손에 달렸다. 한 개인에게 내일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에 새 날을 주심을 감사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 오늘 하루 평강으로 인도해주심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솔직히 일반인도 할 줄 안다. 신자가 행할 참 감사의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감사는 저녁에 잘 때에 내일 새날을 줄 것에 대해 미리 감사하는 것이다.

나아가 오늘은 어제보다 나았고, 그래서 내일도 오늘보다 더 활기차고 풍성하고 아름답고 거룩하게 이끌어 주실 줄 믿고 감사해야 한다. 자기가 계획한 미래의 소망을 하나님이 키워주실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도 그분이 반드시 이뤄주실 것을 기대하며 감사해야 한다.

미래에 대해 감사하는 것, 찬양으로 내일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참 감사다.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내년을 감사, 아니 30-40년 뒤의 미래를 꿈꾸며 감사하라. 그 소망이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한 손에 붙들려 있음에 감사하라. 내가 소망하고 계획한 것들보다 훨씬 더 좋게 하나님이 결실 맺어 줄 것을 믿고 감사하라. 그런 소망을 갖게 한 것 자체가 그분의 간섭인데 그분이 안 이뤄주실 리가 있는가?

과거에 받은 복을 회상하는 것은 잠시 위로받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의 고난과 자꾸 비교되어 오히려 불평불만만 생긴다. 현재도 살 수 없으니 미래 그 자체가 바로 인생이다. 그 인생을 아무런 믿음과 계획과 소망도 없이 불안 염려에 휩싸여 끌려가면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미래를 설렘과 기쁨으로 특별히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최소한 미래에 대한 평강이 없다면 믿음마저 의심해야 한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서 2:20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산다.”고 하지 않았는가? 신자는 그리스도가 대신 살아주는 인생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대체 무엇을 염려하는가? 예수 안에서 바뀐 내 신분과 정체성을 제대로 안 다면 일상성에 대해서, 현재의 고난에 대해서, 나아가 미래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다.

오늘의 찬양

나를 지으신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길 다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된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나 주저함없이 그 땅을 밟음도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
                ———————————————————————–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장 10절)

삶의 출발부터 살아가는 그 모든 발걸음,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하는 가사에 영혼을 울리는 멜로디가 더해져 성도들에게 참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이다.  사람에게는 반드시 마지막 호흡의 때가 오지만,  아무도 그 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기에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오늘도  함께 예배하며, 함께 사역하며, 함께 풍성한 열매 맺기를 꿈꾼다.

>>> 교회와 사역

신자의 감사는 달라야 한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3-17)
인간이 하나님 앞에 취할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이다. 자신감을 갖고 계획을 수립해 성실히 수행하되 15절의 말씀대로 주님 뜻대로 이끌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만약 자기 계획이 그분의 뜻과 어긋나서 그분이 수정 취소시키더라도수용하고 순종해야 한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서 그랬지 않는가?

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간단하다. 협력해서 선으로 이끄시는 당신에 대한 소망을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절대로 놓지 말라 것이다. 설령 스스로 세운 계획에 자신감을 갖고 열심히 실행했지만 완전히 무산된다 해도 자신에게 유익이요, 하나님의 영광도 반드시 드러남을 확신하는 가운데 살아가라는 것이 그분의 뜻이다.

따라서, 신자라면 당연히 올 한 해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오직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에 감사하고, 최소한 그분의 주도하심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신자의 감사는 달라야 한다.

일상에 감사하라
첫째로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 감사가 없거나 너무 부족하다. 아주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내 능력으로 이뤘다고 착각한다. 일상적인 일에 감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대박의 은혜만 기대하고 하나님을 찾는 이유도 그것 뿐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크고 급한 일이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평소 에 말씀도 보지 않는다.

우리 생명은 안개처럼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럼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것,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사해야 한다. 가정과 직장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에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또 하나님의 일이라면 크고 중요하지 않는 일도 단 하나 없다. 작은 일에 그분의 은혜를 발견해 누리지 못하면 정작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만한 큰일에 숨겨진 은혜에 무감각해진다. 이번 추수감사절은 받은 복만이 아니라 평소에 지나쳤던 사소한 일상에 더 감사하자. 그것이 신자가 행할 참 감사의 출발이다.

현재의 고난에 감사하라
모든 일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면 현재의 고난도 그분이 당연히 주관하신다. 그분이 주관하신다면 당연히 그분의 은혜도 있다. 신자가 행할 두 번째 참 감사는 현재의 고난 중에 감사하는 것이다. 고난 중에 억지로 감사 거리를 찾으려 하거나 부정적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면 잠깐만 유용할 뿐이다. 속에서 저절로 솟아나는 감사가 아니면 지속되지 않는다.

좋은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은 믿음의 초보자도 가능하다. 그 때는 또 유난히 은혜를 많이 주시는데 하나님이 살아 있고 인생을 주관하며 기도에 응답해준다는 사실을 확신시키려는 뜻이다. 신자의 믿음과 인격이 아름답고 진실하고 선하게 성숙되는데 최고의 수단은 사실상 고난뿐이다. 불만을 억지로 참거나 부정적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은 마인드 컨트롤이다. 종교적 의무로 행해도 다 참고 나면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하나의 공로가 되어서 자연히 그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려 들게 된다. 그런 와중에 믿음과 인격이 자랄 여지는 없다.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거룩한 뜻을 당장에 모를 수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난다. 고난 중에 어려운 여건으로 감사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고난을 주관하는 하나님을 보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 박진호 목사(멤피스 커비우즈 한인교회)

오늘의 찬양

정결한 마음 창조하소서 주여 오 주여
정직한 영 새롭게 하소서 내 안에 내 안에

주님 앞에서 나를 멀리마시고
주 성령 버리지 마소서
구원의 기쁨 다시 회복시키시며
자원하는 심령 주사 날 붙드소서 하나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나를 건지소서
피흘린 모든 죄악에서 주의 의를 노래하도록
내 입술 여소서 주 찬양하며 전파하도록

나 나나나 나나나 나나나 나 나나나
정결한 마음 창조하소서 주여 오 주여
정직한 영 새롭게 하소서 내 안에 내 안에
—————————————————————
다음 주일은 추수감사주일이며 성찬예식이 있다. 더없이 겸손한 마음과 경건한 간구, 온전한 믿음, 하나님을 높이려는 신실한 태도로 나아와야 한다. 그런데 엄마가 깨끗이 치우라고 할 때 안보이게 밀어 넣고 이불 속에 감추고 청소 다했다고 멀쩡하게 거짓말하는 어린 아이가 우리 자신이 아닐까.

오늘, “정결한 마음 주소서”라고 찬양하며 진실한 회개와 겸손한 고백으로 마음을 정결하게 씻기를 구하자. 그래서 무질서한 욕망에서 비롯된 비참한 악을 마음의 은밀한 곳에서 몰아내자. 여전히 죽지 않았고 꿈틀대는 세상 욕망으로 가득한 것을 통회하자.

때로는 분별없이 말하고 조급한 것을 돌아보자. 불평과 험담에는 잠이 번쩍 깨지만 거룩한 예배에는 그렇지 못하고 집중하지 못함을 탄식하자. 기도를 아주 소홀히 하고, 성찬을 행할 때도 도무지 열정이 없이 냉랭한 것을 슬퍼하자. 화내고 툭하면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끊기로 하자.

형통할 때는 아주 기뻐하지만 역경이 닥칠 때는 쉽게 약해지는 것을 슬퍼하자. 선한 결심은 매우 자주 하지만 마침내 내는 결과는 아주 형편없는 것을 이제는 돌이키자. 계속된 회개가 죄를 이김을 알고 오늘의 예배를 통해 우리 삶을 고치고 더 정결하고 거룩하기를 결단하자.

>>> 교회와 사역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섬겼더니…(2)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수 17:14,15)

2. 분열이 아닌 즐거운 부르심
내 마음에 맞는, 조금 더 정확히 말해 나의 이익에 맞는 사람들과 조직을 이루면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그것이 분열이다. 에브라임 지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거나 전쟁에서 승리해 참여하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는 것에 더 마음이 있었다.

에브라임 지파처럼 노골적으로 우리가 마음을 쓰지 않아도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일인지 알 필요는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이루겠다는 믿음 안에서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 다루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분파적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교회 사역의 즐거움은 하나님께서 평강과 기쁨을 주시는 것이다. 나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이 될 때에만 누릴 수 있다. 무엇이든지 나의 일이 되면 잘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즐거움을 잃어버리고 만다. 목회자로서 나 역시 조심스럽게 나의 목회가 아닌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지 자신을 돌아보고 있다.

부르심을 이루는 방식으로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 배워야 한다. 무슨 일만 맡으면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되면 본인뿐 아니라 그 일에 참여한 모두가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된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즐거움을 회복하면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잘 견디며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임이 요구되는 가정이나 책임과 결과를 요구받는 직장에서 우리는 때로 시달리며 힘들다. 그래서 내 마음에 맞거나 책임이 없는 곳을 찾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책임지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만 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내 욕심을 이루지 않고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는 담대하게 예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을 때, 어려워도 침착함을 잃지 않게 된다. 부르심 안에서 내 욕심을 이룰 순 없지만 주님의 권능을 받을 수 있다. 예수님의 일은 주님이 주시는 권능으로 감당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도움을 많이 받을 때 나의 것이 아닌 예수님의 것임을 알고 순종하게 된다. 내 일이 아니라는 의미는 내 것이 없다는 말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셔서 도와주시고, 책임져 주시기 때문에 그분의 권능과 즐거움에 참여하는 기쁨을 알게 된다는 의미다.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섬겼더니 은혜로 받은 것이 많아지고 풍성해지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방식이다.
– 김길 목사, 『제자도』중에서

오늘의 찬양

우리에겐 소원이 하나있네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 가슴에 새긴 주의 십자가 사랑 나의 교회를 사랑케하네
주의 교회를 향한 우리 마음 희생과 포기와 가난과 고난
하물며 죽음조차 우릴 막을 수 없네 우리 교회는 이 땅의 희망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성령 안에 예배하리라 자유의 마음으로
사랑으로 사역하리라 교회는 생명이니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교회를 교회되게 예배를 예배되게 우릴 사용하소서
진정한 부흥의 날 오늘 임하도록 우릴 사용하소서

우릴 사용하소서우릴 사용하소서
————————————————————————–
바울과 베드로는 예배를 예배되게 드리시려면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영적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롬12장1절 / 벧전2장5절) 즉, 예배를 예배답게 드림은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은 만나는 간절함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영적 자세로 나아가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나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존재만 영광받도록 오늘도 애쓰자.

교회를 교회답게 하려면 먼저 교회 세움을 받기위해서 우리 각자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자기부인 의 길을 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우리 속의 옛 사람을 ‘내려놓음’이 전제되고 내를 비우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맞아 들이는 ‘비움’의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자로 오늘 나아가자.

자기부인을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길인 ‘낮아짐과 비움’의 길에

>>> 교회와 사역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섬겼더니…(1)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찌함이니이까 하니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족속과 르바임 족속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 하니라(수 17:14,15)

1. 원하는 것 몇 가지
내가 원하는 사람과 일에 대한 내용이 중요한 시험이자 훈련, 극복해야 할 과정이다. 우리는 원하는 사람들과 조직을 이루어 의미 있고, 중요한 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별다른 문제가 될 것 없는 위와 같은 욕구가 우리 교회 안에서는 늘 문제가 되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을 위해 우리는 부름 받았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일을 크게 만들어서 무언가 의미 있게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의미 있는 일이 예수님께서도 의미 있는 일인지, 그 일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주인이 되셨다면, 나는 내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름 받은 사람이 예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일을 말하기 전에, 나의 일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믿고 관계를 맺으며 따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예수님의 일이 될 것이다. 그 일을 통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명백히 신앙적인 일이지만, 그 일을 나를 위해 한다면 참 위험한 일이 된다. 예수님의 일을 예수님을 위해 하려고 한다면,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아서는 안 된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있는 것을 너무 고통스러워 한다면 말과 행동이 다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내 말을 알아 듣고, 내편이 되어주며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 안에서는 예수님이 주인되실 수 없다.  서로 마음에 맞는 관계만큼 예수님이 없는 관계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관계의 주인이시라면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분의 뜻을 받고 있을 것이다. 결코 쉽게 인간적으로 하나되기 어렵다. 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분별하시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욕심이라도 예수님 앞에서는 문제가 될 가망이 높다.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오래 관계를 지속하긴 어려울 것이다. 욕심으로 하나되기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하지 않는 한 말이다. 서로 예수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성령께서 근심하시는 것을 깊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면 모든 관계는 사람 그 자체로 크게 의미가 없다. 예수님의 뜻이 없는 관계가 아무리 튼튼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은 나에게 안정감을 준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하나될 가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사소한 것 하나를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쉽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관계야말로 우리를 보호해준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서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과 무리없이 지내면서 서로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있다면 훈련이 거의 마무리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찾는 자체가 공동체에 위협이 될 수 있다.

오늘의 찬양

주 없이 살 수 없네 / 찬송가 292 (통일 415)
주 없이 살 수 없네 죄인의 구주여
그 귀한 보배 피로 날 구속하시니
구주의 사랑으로 흘리신 보혈이
내 소망 나의 위로 내 영광 됩니다

주 없이 살 수 없네 나 혼자 못서리
힘 없고 부족하며 지혜도 없도다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주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얻으리

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내 영의 깊은 간구 마음의 소원을
주 밖에 나의 마음 뉘 알아주리요
내 마음 위로하사 평온케 하시네

주 없이 살 수 없네 세월이 흐르고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생명 끝나도
사나운 풍랑 일 때 날 지켜주시고
내 곁에 계신 주님 늘 힘이 되시네
—————————
“주 없이 살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계십니까. 이미 내가 연약한 줄은 알았지만 깊은 마음에서는 “돈 없이 살 수 없네 / 내 명예가 더 중요해 / 남이 나를 따르기를 원해 / 위로와 힘 주는 친구가 더 필요해”라고 노래하고 있기에 소름이 돋습니다. 그래도 크리스챤이라고 불리면서. 돈을 의지하며 내 자존심에 스크레치나는 것도 싫고  ‘섬기는’ 힘든 일은 안하고 싶고… 아직도 갈 길이 멀고 신앙의 먼지투성이의 나지만, “주님만 계시면 행복합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내 삶의 기도와 호흡이 되는 날까지 전진해야 합니다. 오늘의 찬양 속에 우리 옆에 계시면서 위로하고 힘이 되시는 주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삶과 믿음

Top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