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021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9/26/2021)
아… 진짜. 내가 어떻게 했는데
우리가 실족하고 원망하고 용서하지 않고, 불평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한 만큼 상대의 보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했을 뿐이다. 쉽게 말해서 할 일을 한 것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했으면 그냥 베풀고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 자주 만나고 부딪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내가 이렇게 했는데…’라는 생각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가’ 드러나지 않아서 불만이 나온다.
주님이 주라고 해서 주었는데, 마음이 틀어지면 자꾸 ‘내가 한 것’을 내세우려고 한다.
목사가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그래서 나를 부르셨다. 따라서 나는 전달하면 그만이다. 열매에 관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시키신 것에 충성하고 끝내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을 감당하는 싸움을 해야 한다. 잘 감당하면 천국에서 갚아주실 텐데,우리가 이 땅에서 받으려고 하니까 불평불만이 생기는 것이다.
주님이 주실 것을 믿으며 넘겨라. 그것이 천국을 준비하는 자의 중요한 자세이다.
– 김남국 『준비하고 있으라』
오늘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습관은 무섭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를 잘할 수밖에 없는 습관이 있다.
집중하고, 잠시 쉴 때도 작은 책이라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공부 못하는 친구들은 모처럼 마음먹고 공부하려는 날 책상 치우고 정리하다가 힘들어서 잔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영적인 사람에게도 더욱 깊이 하나님을 붙잡는 삶의 모습이 분명히 있다. 반면 악의 사람은 지속적인 악행의 습관으로 악이 깊어진다.
악한 것도 늘고, 선한 것도 는다. 영적인 것도 깊어지고, 세상적인 것도 깊어진다. 둘 다 는다. 당신은 오늘, 어느 쪽이 늘고 있는가? 한 번 잘못은 실수라고 한다. 하지만 계속하면 습관이 되고, 습관은 라이프스타일이 된다.
영적으로 민감하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가장 우선하는 모습이 우리의 습관이 되고, 라이프스타일이 되어야 한다.
신앙의 생명은 변화에 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화이다.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가? 주님을 향해 가고 있는가? 구체적인 변화가 있는가?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삶에 드러나 주변 사람들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작은 변화들이 쌓이고 쌓이면 변혁이 된다. 작은 변화들이 쌓이지 않으면 어떤 변혁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먹고 한 일주일 동안 열심히 영적인 생활을 했다 한들, 그 변화는 자신도 잘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한 주의 삶이 10주가 되고, 50주가 되고, 500주가 되어 쌓이고 쌓이면 변화는 변혁으로 이어지고, 그 영적 깊이는 귀한 능력이 될 것이다.
성경을 보고, 기도하며, 감사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오늘부터 시작하라.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적 깊이가 깊어질 것이며, 그 삶에 영적 능력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신앙의 생명은 변화에 있다.
우리는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
– 홍민기,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 삶과 신앙 (9/19/2021)
아무리 기도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요
기도하면 문제에서 자유해지고 평안해져야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도를 해도 평안함은 잠깐뿐이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아무리 기도해도 안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게 무슨 믿음인가, 난 정말 믿음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믿음은 문제 해결이 안 되고 평안해지지 않아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께 꼭 붙어서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것은 평안함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열심히 예배해도 고난이 여전할 수 있다. 말씀대로 살아도 상황이 바뀌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평안해지지 않을 수 있다.
삶이 그렇다. 그게 삶이다.
그런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 자체가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다. 진짜 믿음은 평안함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다.
– 신재웅, 『페이지처치2 쓰러진 김에 엎드려 하나님을 만났다,』
>>> 삶과 신앙 (9/12/2021)
말씀이 내 안에 들어오자 능력이 되었다.
코로나19로 다들 삶이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이 근신하며 말씀을 가까이하기 좋은 환경이다. 지금처럼 기도할 수 있고 또 예배드릴 수 있는 시간이 또 언제이겠는가? 그동안 못 읽은 성경을 읽고, 더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제대로 살지 못한 부분을 준비해서 다시 잘 살아갈 기회를 주신 것 같다.
영적으로 깨어 있는 분별력은 눈과 귀에서 시작한다. 어떤 삶이 미혹되겠는가? 말씀이 아닌 다른 것에 눈과 귀가 향해 있을 때 우리는 미혹에 빠진다. 신자는 성경이 말하는 징조 외에 다른 것을 너무 많이 알아서도 안 된다. 그렇게 아는 것이 도리어 사탄이 미혹하는 도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가? 그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말씀에 눈을 두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영적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싸움이다. 사탄은 계속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한다.
내가 힘든 청년의 때를 어떻게 이겨냈는지 돌아보니 사실 아주 간단했다. 나는 20대 초반, 환난이 닥쳐왔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성경을 미친 듯이 보았다. 온종일 5,60장 넘게 본 적도 많다. 그렇게 하루이틀이나 며칠만 본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말씀을 보았다. 그러면서 성경의 능력을 경험했다.
그런데 환난이 다가오면 우리는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가기가 쉽다.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나는 환난이 오자 습관을 좇아 다시 담배를 피웠다. 하루에 두 갑을 피우면서도 아예 끊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을 때였고 교회 갈 때는 피우지 않았지만, 내가 담배를 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이 내게 물으셨다.
“남국아, 나 믿니?” “그럼요, 믿죠!”
“그럼 내가 준 이 말씀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봤니?”
나는 순간 당황했다. 성경을 많이 읽기는 했지만, 그냥 넘어간 부분도 있어서 다 읽었다고 말하기에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웠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기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일독하고 끝낸다는 심정으로 성경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레위기는 정말 읽기 힘들었다. 레위기를 읽기 전에 담배를 피우고, 읽고 나서 피우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나오면 또 피우면서 힘겹게 레위기를 읽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시편 말씀을 읽으며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시 119:103)라고 고백하며, 어느 순간 담배를 피우지 않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그 길로 담배를 끊었고 말씀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럴수록 예전에 끊지 못한 것들이 끊어지기 시작했고, 예전에는 할 수 없던 것을 하기 시작했다. 내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온 말씀의 능력 때문이었다. 나는 은혜 안에서 강해졌고, 내 안에 여러 가지 변화가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식이 아니라 능력이다. 성경을 보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그러나 너무 힘들 때는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나님과 교제하기도 어렵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은혜받은 말씀, 읽기 쉬운 말씀, 청년 때 은혜받고 줄 쳤던 말씀을 계속해서 본다. 그 말씀이 다 은혜였고 읽다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 회복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한다. 분별력이 생기고 은혜가 생긴다.
– 김남국, 『준비하고 있으라』
달콤한 말씀
삶과 분리된 신앙은 힘이 없다.
기도를 하고, 말씀을 읽고
훈련을 받고, 모든 예배를 참석하고
신앙의 활동을 아무리 많이 해도
삶과 분리된 신앙은 힘이 없다.
신앙은 주술도
인간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도 아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에
삶과 분리된 신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삶과 신앙이 같이 할 때
주의 임재가 항상 내 삶에 가득할 때
주의 말씀이 달콤해진다.
– 임정남 작가
>>> 삶과 신앙 (9/5/2021)
폭풍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기
우리 삶에 늘 평안하고,
좋은 일만 가득했으면 좋겠지만
폭풍 속을 지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고,
앞이 캄캄할 때
기도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낙망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왜 저는 이렇게 약한가요?
왜 남들처럼 평탄하지 않나요?’ 하면서 울다가, 한가지를 깨닫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주님이 나를 업고 걸어가고 계셨기 때문이란거.
믿음 있는 척 애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구하며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 믿음이 없습니다. 제게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이 얼마나 저를 돌보시는지 깨닫게 해주세요.’
괜찮습니다. 그렇게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왜 우리 삶에 폭풍의 시간이 있는지 다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은 좋으시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힘들때 더 가까이 붙드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말입니다.
교회와 사역
어제의 기억을 신앙새활하면 안된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보디발의 안내에게 유혹 받은 요셉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 앞이 아닌 곳이 어디 있는가? 죄는 유혹 때문에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나의 태도 때문에 짓는다. 죄를 선택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다는 뜻이다. 죄를 정당화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매일 다가오는 유혹에 매번 이길 수 없다.
유혹은 매번 더 강해진다. 오늘의 유혹은 어제보다 강하다. 보디발의 아내도 더욱 강한 유혹으로 요셉에게 다가갔다.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 창 39:10
여기서 키워드는 ‘날마다’이다. 대단한 권력을 지닌 주인의 아내가 날마다 강하게 유혹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요셉이 뿌리치기 쉬운 유혹을 견디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요셉이 그 유혹을 이겼다는 것은, 매일의 유혹보다 날마다 하나님과 함께한 동행이 더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함께함이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중요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죄악의 유혹이 아주 강하게 찾아와도 그것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면 절대로 오늘의 유혹을 이길 수 없다. 오늘의 은혜로, 오늘의 동행하심으로, 오늘의 함께하심으로 살지 않으면 오늘의 유혹을 이길 수 없다.
어제는 어제의 은혜가 있어서 이길 수 있었다면, 오늘의 유혹은 오늘의 은혜가 있어야 이길 수 있다. 우리가 어제 이겼다고 오늘도 이기는 것이 아니다.
어제 영적인 양식을 먹었다고 오늘 괜찮으면, 영적으로 병든 것이다. 어제의 기억으로 신앙생활 하면 안 된다. 오늘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붙잡아야 한다.
– 홍민기,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