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22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6/26/2022)

하나님, 저는 못 합니다. 못 해요.
상담 중 한 청년에게 말실수를 한 적이 있다.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영혼에게 질타와 대안을 던지며 상처를 남겼다. 그는 ‘곧장’ 교회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곧장’ 그를 찾아갔다.

뇌를 거치지 않은 말들이 나왔다.

의분에 사로잡힌 정답들을 화살처럼 쏘아 맞혔다. 예수님이 아닌 궁수를 만난 양은 깜짝 놀라 교회를 떠났다.

이 일이 오랫동안 후회가 되어 조심하기로 했다. 그러다 너무 조심해서 또 문제가 되었다.

교회 리더십에게 돈 문제가 생겼는데, 일방적으로 답을 쏘아주면 안 될 것 같아서 3개월이나 숨죽여 기다렸다. 그때 나는 해야 할 말을 제대로 전하지 않았다. 그가 쉽게 상처받고 떠날까 봐 조심했다.

회개를 요청했다가는 상처받을까 봐 심방을 차일피일 미뤘다. 가끔 문자로 위로와 격려 속에 우회적 조언을 담아 보내며 회개를 요구했다.

그러나 임시방편은 오래가지 못했다.

예수님이 아니라 언 발 위의 오줌을 만났던 그 역시 얼마 뒤 교회에서 사라졌다. 또 후회되었다.

기도 골방에 엎드린 나는 홀로됨에 서러웠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외로웠다. 이런 일화는 이 두 개가 전부가 아니다. 200개도 넘는다. 후회투성이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최선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할 정도다.

하여간 내가 나서면 일만 커진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행한 일이 더 큰 문제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문제를 향해 뛰어다녔던 일들이 후회된다.

두 팔, 두 다리를 다 걷어붙이고 문제 해결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신 기도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그랬다면 문제의 핵심이 문제에 있지 않다는 단순한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을 것이다.
 — 송준기, 『나 홀로 예배』 —


요즘 저를 보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동안 기도하며,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뜨겁게 준비했던 열정이 점점 사라지고, 부담되고, 하기 싫고 식어가는 것입니다.

‘이러면 안 돼!!! ㅠㅠ 삼손처럼 되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어떻게 꺼져가는 불꽃을 살려야 할지, 상한 갈대 같은 저를 어찌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안되겠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겠다.’

매일 시간을 정해 기도하긴 했지만 어느덧 식어버린 제 마음.

‘주님. 저 이런 상태인 거 아시지요.
저도 뜨겁게 잘하고 싶은데, 왜 이렇게 하기 싫은지… 마음이 식어버리는지 모르겠어요…그냥 내버려 두시면, 주님이 맡기신 소중한 일들 다 망가뜨릴 것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으면서 앞에만 서는, 눈속임하는 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마음 한편에서는 과연 이런 나를 회복시키실수 있을까? 하는 의심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의심하는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합니다. (마16:24) 주님이 이 선택을 받으시고, 일하시기 시작하실 것이니까요.

그래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마음으로는 못합니다. 주의 마음을 주소서. 내버려 두시면, 분명히 망칠 것입니다. 놀라운 회복을 주시옵소서. 꺼져가는 등불의 희망을 내버려 두시지 않는 주님이십니다. 첫사랑을 뛰어넘는 전심의 마음을 부으소서.”

제가 흔들리는 부분들, 약한 부분들을 다 말씀드리며 도와달라고,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주님이 마음을 잡아주시며 눈을 열어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식어가고 있습니까? 너무 바빠서 지쳤습니까?

남들은 모르지만, 언제 들통날지 몰라 껍데기로만 가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회개하며 진심으로 나아갈 때 정죄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주님께 진실하게, 겸손하게 다 말씀드리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를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탕자같은 모습이라도, 삼손처럼 눈이 뽑혀 다 망가뜨린 비참한 최후라도, 예수님을 부르십시오. 기도로 뚫고 가는 힘도 구하며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기도가 안된다고 포기말고  찬양이라도, 말씀이라도 틀어놓고 주님 앞에 엎드려 진실히 말씀 드리면 됩니다. 내 모든 것을 드리며, 회복을 요청하며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은 달려와 우리를 온 맘으로 뜨겁게 안아주실 것입니다!

반드시. 놀라운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 삶과 신앙 (6/19/2022)

홀로 주님만 원하는 시간 가져보기
너무 놀라지 말자.
누구나 문제를 만난다. 그리고 홀로된다.

우리는 누구나 어떤 어려움이든 홀로 맞게 된다. 누군가 대신 당해줄 수 없다. 군 입대를 앞둔 청년을 대신해서 입대해줄 사람이 있겠는가? 누가 나 대신 병에 걸려 아파할 수 있겠는가?

외롭다는 것은 고통을 전제한다. 누군가 홀로된 이유는 고통과 관련 있다. 그런데 한번 주위를 둘러보라. 세상은 홀로선 사람들로 가득하다. 고통은 도처에 있다. 고통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현상이다.

개인적인 문제가 전혀 없는 사람조차 사회적 문제 때문에 불안해한다. 시대의 변화상은 너무 빠르다. 마치 급류에 휘말린 해변의 여행객 같다. 거센 물결에 갑자기 휩싸인다면 누구든 허우적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려면 미리 연습을 해두어야 한다.

홀로 있는 시간이 이와 같다. 앞으로 닥칠 인생의 급류를 미리 준비하는 시간이다.
만약 당신이 나처럼 목회자라면 더욱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사역 현장에 들어가 처음 만나는 문제들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하면 허우적대기 십상이다. 그러나 모든 지혜를 다 가지고 계신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다져진 마음은 쉽게 방황하지 않는다.

여기까지의 말에 동의한다면,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에 당신도 답해보길 바란다.

언제 하나님을 독대하겠는가?
하루 중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언제인가?

혹 새벽은 어떤가? 내가 홀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대부분의 경우 새벽뿐이기에 나는 주로 새벽에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갖는다.

예수님을 생각해보자. 예수님은 홀로 있는 일에 먼저 모범을 보이셨다. 그분은 아무도 없는 새벽에 일어나,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홀로 기도하시기 위함이었다. 참 하나님이신 그분이 혼자만의 시간과 장소로 피신하셨다. 새벽뿐만 아니라 밤에도 그러셨다. 나는 이 말씀이 너무 좋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 마 14:23

왜 그분은 홀로 계셨을까? 홀로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홀로 묵상해보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우리는 친밀한 인간관계에 항상 목말라 하는 연약한 존재다. 어떤 사회에 소속되어 함께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시다.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홀로 완전하신 창조자이시다(욥 9:8,9). 그분은 우리와 전혀 다르신 분이다. 무엇에 집중하기 위해 애쓰거나, 군중에 휩싸여 스트레스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이다. 그런 분이 일부러 혼자만의 시간과 장소로 가셨고, 거기서 기도하셨다. 하나님과 독대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모범이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친밀한 공동체성을 정기적으로 간직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아무것도 의지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 하나님만 의지하기 위해 피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처럼 사역하려면 예수님처럼 행하면 된다. 우리도 정기적으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면 된다. 아무도 없는 시간과 장소에 찾아 들어가 하나님과 홀로 기도하며 예배하면 된다.

우리의 목양자 되신 주께서 새벽에 자신만의 광야를 준비하셨음을 기억하자. 종일 제자들과 동행하며 군중에 휩싸여 계시기 전에 홀로 계셨음을 묵상하자.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하자. 목양자라면 더욱 그래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양 떼를 만나기 전에 하나님을 먼저 독대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농부의 하루가 새벽에 시작되듯, 영적 농부인 우리도 홀로된 시간에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고전 3:6). 목양할 만한 사람이 되도록, 또한 영혼의 밭을 일구는 일꾼이 되도록 홀로 주님만 원하는 시간을 드리자.
 – 송준기, 『나 홀로 예배』 –


많은 어려움 속에 기도에 대한 말씀들을 듣습니다.
그 말씀 가운데 ‘아멘’으로 답하여 온 우리들의 삶을 뒤돌아봅니다
기도의 자리에 우리는 얼마나 있어 왔는지.
‘현실’이란 단어에 우선순위들을 앞세워 기도의 자리를 뒤로 한 채 ‘아멘’의 고백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들.
주님은 당신이 드렸던 ‘아멘’의 고백을 잊지 않으심으로
당신의 기도자리를 ‘아직’ 남겨 놓으셨습니다.

>>> 삶과 신앙 (6/12/2022)

중학교 2학년 때 학교에서 스케이트를 배웠다. 그 당시 신설동에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실내스케이트장이 생겼는데, 학교에서 그곳에 단체로 가서 스케이트를 배우도록 한 것이다. 나는 보기보다 운동 신경이 발달한 편이다. 그래서 그날로 스케이트를 배웠다. 코너를 도는 것까지 마스터했다. 스케이트 타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집에 돌아와서도 온통 스케이트 생각뿐이었다.

스케이트 타는 것이 너무 좋아서 어느 날 나는 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하나 사달라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에게 스케이트를 사줄 여유가 없었다. 머뭇머뭇하시더니 머리를 긁으시면서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들이라고 너 하나밖에 없는데 스케이트도 하나 사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나는 그날 아버지께 너무나 죄송했다. 아버지에게 그만한 돈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철없이 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사달라고 하여 아버지를 난처하게 만든 것 같아 참으로 죄송했다.

다른 부모 같았으면 다 큰 자식이 철없이 집안 사정도 모르고 스케이트 사달란다고 아마 야단을 치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그렇지 않으셨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무능하여 가난한 것을 자식에게 정말로 미안하다 여기시는 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가는 수학여행을 가보지 못했다. 잘못하면 사춘기에 마음의 상처로 남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어린 시절 가난의 흔적이나 상처가 거의 없다. 가난이 주는 부정적인 영향을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다행히 나에게는 그런 것이 별로 없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뭘까? 아버지가 내게 미안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자신의 부족함을 미안해할 줄 아는 마음은 자녀교육을 위하여 매우 중요한 자세가 된다. 일단 그런 자세가 되면 교육은 누구나 가능하고 언제나 가능하고 어디서나 가능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사과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자녀들에게 솔직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잘못된 자존심과 권위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부모의 권위는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나온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뉴질랜드의 어느 집회에서 만난 장로님께 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장로님의 큰딸은 자기 주관과 고집이 센 자녀였는데 어느 날 장로님이 화가 나서 그만 딸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그러자 그 딸은 눈을 똑바로 뜨고 “아버지는 장로님이라고 그러시지만 저는 아버지에게서 전혀 예수님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나는 무조건 아버지에게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때리시려면 더 때려보세요.”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그 말에 너무 충격을 받은 장로님은 잠시 자기 방에 가서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딸에게 가서 딸의 말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사과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정말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보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러자 딸도 즉시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아버지를 부둥켜안았다고 한다. 그 후로는 부녀 사이가 좋아져서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때는 장로님과 딸 사이의 아주 큰 위기였다. 만일 그때 장로님이 딸에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지 않으셨다면 딸과 아버지의 관계는 좀처럼 회복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주 적절한 때에 자기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여 벼랑 끝에 선 것같이 위태위태하던 관계를 다시 회복하게 된 것이다. 부모가 자기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자녀들도 자기의 실수와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녀를 교육하려고 하는 부모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자기의 부족과 실수에 대해 미안해 하고 사과할 줄 아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녀를 교육하려고 하는 부모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자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자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가? 자녀에게 잘못했다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 김동호, 『자식의 은혜를 아는 부모』 –


속도는 상관 없죠.
누구와 함께
어디를 향해 가는지가 중요한 거예요.

>>> 삶과 신앙 (6/5/2022)

자꾸 두렵고 불안해요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셨다.

긍정적인 감정은 인정하고, 부정적인 감정은 무시해버리면 결국 육체와 영혼 전체에 병이 난다. 모든 감정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돌아보고 인정해줘야 한다.

‘아, 그랬구나!
상황이 이러해서 내가 화가 나는구나,
슬프구나, 두렵구나, 우울하구나….’

늘 긍정적인 감정만 가질 순 없다.
삶은 다채로우니까!

스스로 나의 감정을 존중해줘야
다른 이의 감정도 돌봐줄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 그 상황에서 가진 그 마음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유가 있어서 느끼는 감정인 거다. 그냥 무시하지 말고 하나님께 들고 나가자!

“하나님!!!
저 너무 서러워요!!!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잘 안돼서 속상하고, 그래서 이제 다른 일조차 자신이 없고 두려워요!!! 하나님, 제 감정이 지금 이러해요….

하나님 듣고 계시죠….
제 상한 마음을 만져주세요.

제 마음에 찾아와 주세요.
주님이 너무 필요합니다….”
 – 최세미, 『젠틀위스퍼_최세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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