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18 삶과 믿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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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자라기 위해서”
고향을 떠나 직장을 옮겨 다닐 때 마다 접 근처 교회로 가게 되었다. 여러 교회를 다니며 교회 마다 같은 특징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큰 교회건 작은 교회건 도시에 있던 시골에 있던 비슷하다.
교회 성도 수와 관계없이 일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몇 사람이 찬양대를 하고 교사를 하고 다른 봉사를 한다. 교회당을 꽉 채우는 성도 수와 다르게 일할 때는 항상 손이 부족하다. 봉사하는 사람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배를 마치면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은 동일하다. 그렇지만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을 묵묵히 하는 성도들이다. 결국 교회공동체는 소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수 많은 사람 중에 믿음이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것 같지만 내 스스로 한 것이 아니다. 부모를 선택할 수 없듯이 그분이 나를 선택해서 하늘나라 백성 삼으셨기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법이다. 선택받았지만 그분 뜻대로 살지 않으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한다.
봉사한다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 법은 아니지만 봉사를 통해 믿음이 자랄 수 있다. 시계추와 같이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여전히 제자리이다. 믿음은 관심과 희생 안에서 조금씩 자라나기 시작한다. 교회공동체에서 교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말씀을 실천해 나갈 때 믿음도 앞으로 나가게 된다. 교회에 관심을 가질 때 봉사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교회공동체를 보면 크건 작건 해야 할 일이 많다. 교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금씩 관심을 갖다 보면 내 손도 필요할 것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 무명의 그리스도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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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단계씩 최선을 다하라
스키를 배울 때 초보자는 스키 코스의 가장자리를 올라가면서 슬로프의 맨 아래를 내려다 봅니다. 그러면 코스가 너무 가파르고 힘들어 보여 모두 겁을 집어먹고 뒷걸음치려고 합니다. 스키 강사들은 수강자들이 공포심을 극복할 수 있도록 언제나 한 가지를 강조한다고 합니다.

슬포프 전체를 한 번에 내려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오직 첫 번째 회전에만 신경 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몇 차례 회전에 성공하게 되고, 마침내 자신감을 회복해 끝까지 쉽게 내려가게 되곤 한다는 것입니다.

죄악을 버리는 작업도 이렇습니다. 완벽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목표이지 기금 당장의 목표는 아닙니다. 솔직히 우리에게 완벽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최선의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평생에 가져야 할 목표입니다. 한 걸음씩 죄악의 미끄럼에 빠지지 않도록 한 슬로프씩 제대로 내려오는 것이 바로 우리 삶을 견고하게 만들고 지키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죄악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죄악에 가까이 다가가 물드는 일이 없길 바랍니다. 오늘도 한 번에 하나씩 신앙의 한 계단을 올라가는 은헤가 넘치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비전을 품을 수 있는 사림이 되길 바랍니다.
 – 『들어가 그 땅을 밟으라』 황형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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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보통 차의 크기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경차를 타고 다니면 은근히 낫게 보곤 하는데, “스마트”라는 이름의 자동차가 있다. 이 차는 스포츠카도 아니면서 2인승이다. 그래서 정말 작고 꼭 장난감 같다. 크기로 본다면 옛날 티코 보다 작은, 무시당하기 딱 좋은 차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차를 무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차를 만든 회사가 메르세데스벤츠이기 때문이다. 크기도 작고 사람도 2명밖에 못타지만, 그래도 벤츠이고 가격도 무지 비싸다.

하물며 한낫 차가 이런데 자존감이 깨어진 우리의 모습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더라도, 이 세상 누구도 우리를 무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차지만 만든 회사가 벤츠이기에 무시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겉모습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기 때문에, 누구도 내게 손가락질 할 수 없다.

세상에서도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고 한다. 혹시나 내 안에 오랜 절망으로 인해 자존감이 낮아져 있는가?복음서에서 혈루증으로 12년을 고생한 여인은 믿음으로 예수님 옷에 손을 댔고 병에서 고침을 받게 된다. 예수님은 굳이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자를 찾아서 사람 앞에 공개적으로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저주받은 병자라고 생각하는 여인에게 그의 믿음을 높이시며 깨어진 자존감을 회복시키신 것이다. 자신을 더 이상 내려갈 곳도 없는 가장 밑바닥의 인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믿음의 여인으로 불려주신 것이다.

우리가 절망에 빠져있을 때 우리의 자존감 또한 바닥으로 추락한다. 내 잘못과 어리석음으로 이런 일이 발생되었다며, 자신에게 실망하고 자책하게 된다.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잉여 인간, 패배자라는 자괴감이 마음을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우리에게 주님이 찾아오셔서 내 이름을 따뜻하게 불러주시며, 사랑의 말로 격려하시고 위로해주신다.

한편으로 예수님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회복시켜 주신다. 예수님이 여인에게“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라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포심으로써, 율법에 의해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인 여인이 이웃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삭개오도 죄인으로 철저한 왕따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집에 방문해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임했다고 선포해주신 후, 삭개오의 대인관계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당연히 회복되었을 것이다. 재산의 절반을 이웃과 나누고 토색한 것을 4배로 갚으며, 깨어진 관계들이 회복되었다. 즉 철저히 혼자였던 삭개오에게 따뜻한 이웃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절망 중에 있을 때, 자존감이 사라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질 수 있다. 그리고 깨어진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회복시켜 주신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도 회복시켜 주신 예수님인데,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이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때,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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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의 소회
젊은 시절에는 “여전히 마음은 청춘인데…”라는 연세드신 분들의 안타까운 언급을 흘려들었건만 이제는 “몸도 말을 잘 안듣는데…”라는 푸념을 때로 하게 되니 시간의 무서움을 다시 느끼고 있다. 무엇을 했는지, 아니 하고 있는지도 잊고 그냥 주어진 일과를 따라 가는게 급급한 나를 볼 때 흉물스런 게으름뱅이가 버티고 서 있음에 작은 충격도 받는다. 때문에 가끔 ‘내가 희망을 잃은 건 아닌가?’하는 자기 점검을 하려고 애쓴다.
우리 교회가 세워진지 3년째를 맞으니 같은 생각을 해본다. 여섯 가정이 교회를 세울지 아니면 각자의 길을 가서 ‘조용히’ 교회 생활 – 진정한 신앙 생활을 꿈꾼건 아니었겠고 – 을 할지 고민하고 토론한 끝에 우리의 첫 예배는 눈물과 기쁨이 섞인 채 뜨거운 여름의 버팔로그로브 공원에서 시작됐다. 우리의 가장 큰 질문은 “왜 우리가 시카고 지역에 또 하나의 이민교회를 세워야하는가?”였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 꿈이 있는 교회, 상처받은 영혼이 회복되고, 사랑을 나누고 서로 섬겨 성장하는 그림을 기도로 그려왔다. 진정한 예배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모든 이가 ‘관람자’가 아닌 예배섬김이가 되도록 이리 저리 바꿔도 보고 지혜를 모아왔다. 삶에서 신앙이 실천되는 참 ‘신앙공동체’가 되기위해 잘못된 이민교회의 관행과 비성경적 고정관념을 버리느라 쉽지 않은 과정을 거치기도 했다.
당연히 이 기간에 많은 의견 충돌도 있었고 늘 그렇듯이 말 실수와 오해, 그리고 수습이 있기도 했다. 그 자체가 아픔 속에 성장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교회라고 해서 억지로 만들어낸 소위 은혜로운 일체감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 때로는 문제가 있으면 드러내고, 잘못이 있으면 과감히 용기내서드러내는 게 나을 수 있다. 사실, 일부 문제의 노출이 작은 우리 교회에 큰 부담이 되고 ‘이일로 교회에 큰 문제가 되면 어쩌나?’라는 두려움이 있기도 했다. 그런데 주님이 아픔을 만져 주셨다. 하나가 되도록 낮아지게 하셨다. 앞으로도각자의 다른 생각이 진리 안에 수렴되고 겸손히 마음만 열어 놓는다면 지나온 우리의 자잘한 충돌과 갈등은 건전한 교회의 미래를 위한 교훈적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한 교회를 만들기로 해 놓고 각자가 자신만의 고정관념에 묶여 있다면, 우리는 꿈을 버리고 그냥 주어진 일을 하기에 급급한 혹은 남의 시선 때문에 습관적으로 신앙 생활하는 ‘교인’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서 때론 두렵다. 섬김의 교회가 꿈을 잃고 타성에 젖을까봐. 눈물로 세운 우리의 목표와 비전이 슬그머니 ‘잘되는 교회’를벤치마킹하는 것으로 바꿔질까봐. 우리의 조바심 때문에 주님이 안타까와하실까봐.
그런 선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때로 나를 면박 주듯이 안수집사의 직도 버거울 때가 있다. 그러면 나는 가진 거 안 날리고 한 달란트를 지키는 종이라도 되겠다는 황당 논리를 내세우기도 했다. 청지기 사명감이 없는 종이라니! 다시금 나에게 청지기 의식이 바로 심어 주인을 신뢰하여 다시 셈할 것을 믿고 충성하는 종이 돼야겠다. 수시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신앙의 여정에서 함께 섬김의 짐을 나눌 형제들을 생각하니 다시 감사하게 된다.
설립 3주년을 기뻐하는 오늘, 하나님의 기준과 시각으로 살며 교회 공동체를 만들기를 소망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한 달란트는 그 종이 20년을 의지해 살 할 정도의 값어치 였다는데도 주인을 신뢰하지 않고 비교하고 불평했는데, 우리 교회공동체는 그러지 말아야겠다. 각자가 가진 달란트가당연히 다르니 서로 존중하고 감사하면서 일해야겠다. 내 한 달란트가 감사하니 서로를 위해 써야겠다. 서로 깨어있도록 권면함에 마음을 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쓴 소리도 공동체를 위해 기쁘게 받는 ‘공동체의 식구’가 되기를 작정한다. 왜냐하면 나를 사랑해야 쓴 소리도 해주는 거니까.
감사한다. 지금 함께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는 모두에게. 우리를 흩으시지 않으시고 묶어 주신 하나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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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온전한 교회로 성장하는 과정에는 혼란이나 실망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한 어려움이 싫다면 관게를 단절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다른 조직체와 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더 나은 방향으로든 더 나쁜 방향으로든 움직일 수 있다. 좋은 공동체와 생명력있는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성실한 노력이 만날 때 빚어진다.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새 형제자매의 가정인 교회를 제대로 실천하려 한다면 정기 예배, 임시 위원회, 선교 사업 등으로 꽉 짜인 오늘날의 교회 생활에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볼수 있는 교회는 사림들이 이끄는 친밀하고 깊은 관계와 공동생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개인의 자유와 자기실현이 중시되는 문화에서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허약한 상태이며 그중 대다수가 공동체를 열망한다. 여기에서 공동체란 나를 잘 아는 환경, 최소한 모든이가 내이름을 아는 집단을 말한다. 그러나 소속감이나 지속적인 관계를 간절히 원하면서 한편으로는 뭔가 책임질 일이 생기까봐 망설인다. 개인주의적 성향의 힘이다. 우리는 이 같은 세상 문화가 교회의 기대와 소망과 실천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주는지 잘 모른다. 자기실현, 성공, 소비, 자유의 가치 등이 교회 안으로도 스며든다. 드나들기 쉽고 선택권이 많고 뭔가 도움이 되고 책임질 일은 거의 없는 곳에서 영속적인 공동체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가족여행이나 단기 선교 여행 등에서 사람들이 가졌던 끈끈한 유대감은 일시적이고 감정적이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람을 성장시키는 공동체는 시간이 흘러도 쇠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충실하고 같은 목적에 헌신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멋지고 놀랄만한 깊은 유대감이 생기는 때도 있지만, 대체로 공동체 생활은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우리의 삶을 결합시켜 주는 것은 강렬한 감정보다 함께한 시간, 의무, 약속, 이야기, 희생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함께한 시간이나 의무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공동체 안에 은혜와 충실함과 진실함이 있을 때 사람들은 안전하게 성장과 변화에 필요한 모험을 할 수 있다. 또한 분열없이 의견 차이를 조정할 수 있고, 단순한 개개인의 힘을 모으는 것을 뛰어 넘어 더 값지게 세상을 섬길 수 있다. 감사가 중심에 있는 교회 공동체는 친구와 나그네를 대접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 크리스틴 폴, 『공동체로 산다는 것』pp. 10-12. –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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