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23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7월 2일 2023)

당신이 실패했을 때 해야할 한 가지
힘든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누릴 수 있을까요?

너무나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믿지 못합니다.

삶이 힘들기도 하고, 무엇보다 마귀가 우리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삶을 고해라고 말하는데요,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을 비관적으로 볼 수밖에 없고, 고통을 전제로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고민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다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인생이 고통스러워진 것은 맞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고, 반드시 함께하시고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은해, 은혜의 바다라고 표현했는데요,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지만,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넉넉히 이기게 하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은혜입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어려움이 있고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깊은 위로가 있고, 은혜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소망 가운데 기쁨으로 사는 삶입니다.

지금 어떤 인생의 때를 지나고 계십니까? 혹시 고난의 때, 낙심의 때, 절망의 때를 지나고 계신가요?

많이 어렵고 힘드시겠지만 꼭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와 같이 아파하시고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고,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내가 더 건강하고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책임지시고, 반드시 은혜 베푸실 것을 믿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 하시기를 바랍니다.
— 유성현 목사, [은헤의 선물] 중에서 —


 묵상
성령의 불

예수님을 믿고 성령이 내주하시면 반드시 ‘혀’가 변화됩니다.

거짓을 말하던 혀가 진실을 말하게 되고, 뒷담화하던 혀가 격려의 말을 하게 되고, 수없이 상처를 입히던 혀가 겸손와 온유로 덧입혀져 위로와 공감의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역이 대부분 말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제일 먼저 제자들의 혀를 새롭게 하셨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오늘도 불의 혀같은 성령의 불이 내 혀에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내게 맡겨주신 가정과 사역과 일터라는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말, 공감의 말, 격려의 말을 부지런히 훈련해야 겠습니다.

>>> 삶과 신앙 (7월 9일 2023)

겉과 속이 같은 신앙
어떤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로 일했을 때였습니다.
너무나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착해 보이고, 목소리도 부드럽고 다정하고요.

어느 날 회사에 전화가 왔습니다. 그분이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아, 고객님. 그건 아니고요. 아, 네..그러셨군요. 네… 이해가 됩니다. 말씀대로 알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따뜻하고 친절하게 전화를 끊더니 “아. 진짜 더럽게 말 많네. 아우 짜증나.” 이러는 것입니다.

너무 달라진 온도에 놀라서 저도 모르게 그 사람을 쳐다 보았습니다.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친절하게 전화를 끊고 나서는 꼭 한 마디 씩 중얼거렸습니다.

“진짜..아우…” “자기는 뭐 잘하나” “웃기고 있네” “하. 짜증나는 사람이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나중에 그분이 제게 오셔서 친절하고 따뜻하게 말을 거는데,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진심일까?’

예전에 저는 겉으로 따뜻하고 다정하면 마음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돌아봅니다.
‘나는 어떤가?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진심으로 축하해주고, 진심으로 기도해주고 기뻐해주는 사람. 나에게 좋은 마음이 없다면, 그런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빈털털이 그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며, 주님의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구하는 사람.

죄와 타협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진실하십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따뜻하면서 속으로는 ‘으휴 지겨워. 언제까지 같은 말하니?’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진심으로 우리의 마음에 귀 기울여 주시고, 진심으로 예쁘다고, 귀하다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어떠한가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마음의 묵상과 우리 입술의 말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처럼 남에게 잘 보이려고 기도를 길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남을 위해 기도하고, 주님의 사랑과 마음을 구하는 우리 되길 소망합니다.

>>> 삶과 신앙 (7월 16일 2023)

겉과 속이 같은 신앙
어느 날 새벽에 말씀 한 구절을 발견했다. 딱 나와 분당우리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로 들리는 말씀이었다.

“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또다시 우리 자신을 내세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를 자랑할 수 있는 근거를 여러분에게 주어 속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의 말을 반박할 수 있게 해주려는 것 뿐입니다.” 고후 5:12, 공동번역

“속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으면서도 겉만 가지고 자랑하는 자들”이라는 표현이 유난히 큰 글씨로 내게 다가왔다. 이 말씀은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었다. 과거의 일에 대한 칭찬의 소리에 귀를 닫아야 한다고. 이제 과거는 다 잊고 분당우리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고.

그날 새벽에 주신 말씀을 계기로 나는 성도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했다. “분당 우리교회를 이대로 내버려 두면 현상유지적인 교회로 전락했다가 결국에는 생명력을 다 잃고 박제된 박물관 교회로 굳어져 버릴 것이다. 정말 정신 차리고 교회를 창립할 때 가졌던 ‘사명 중심 교회의 정신’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라 고 호소했다.

이것은 교회 공동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박물관 교회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에서 ‘강권하다’는 헬라어로 ‘쉬네코’ 라는 단어이며, ‘무언가에 사로잡히다’라는 뜻으로 쓰였다. 어떻게 변질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로잡힐 때, 그리스도의 사랑에 견인될 때, 우리가 변질 없이 끝까지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라고 할 때 ‘붙잡혀’가 ‘쉬네코’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던 말이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의미하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란 말을 내뱉으면 신상에 위협이 가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증언하고 있다. 이런 담대함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말씀에 붙잡히니까 온갖 협박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에 끌려가지 않는 담대함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예수를 몇 년 믿었는지,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받았는지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있는지, 그리스도의 말씀에 붙잡혀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말씀에 붙잡혀 있는가? 아니라면 무엇에 붙잡혀 있는가?

고린도후서 5장 13, 14절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사도 바울이 우리가 붙잡혀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을 강조하면서 그중에서 특히 어떤 것을 더 강조하고 있는지를 보게 되었다. 14절 말씀을 보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닌 ‘십자가 사랑’이었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붙잡혀야 하고 견인당해야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십자가 사랑’이다. 삶의 현장에서 패배하고, 꺾이고, 의욕을 상실하고, 걸핏하면 초라하게 살아갈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이기에 이런 비참한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견인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 중에서도 십자가 사랑에 사로잡혀야 한다.

초심을 지킬 수 없는 우리는 내버려두면 옆길로 새고, 방치하면 박물관 교회로 전락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위기를 막아낼 수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붙잡힌 우리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시 한번 꿈을 향해 가슴 벅차게 달려가는 사명 중심의 교회, 사명 중심의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  지금 변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이찬수 —

>>> 삶과 신앙 (7월 23일 2023)

겉과 속이 같은 신앙
말씀의 반석 위에 기초를 세우는 것이 왜 중요한가?
교회도 그렇고 우리 개개인도 그렇고 위기가 오고 흔들리는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이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우리 기초를 말씀의 반석 위에 든든히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 마 7:24-27

나는 여기서 중요한 두 가지 법칙을 깨달았다. 첫째로는, 평상시에는 반석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의 차이가 잘 안 난다는 것이다.  성경 한 구절 안 읽어도 별 어려움 없이 살아갈 수 있다. 성경 한 구절 안 읽
고도 장로 될 수 있고, 권사 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다음 나오는 두번째 법칙이다.

둘째로, 평상시에는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살아가다가 맞닥뜨리게 될 인생의 위기가 찾아오는 순간에, 이 둘의 차이가 확 드러난다는 것이다.

25절과 27절에서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말씀을 가까이하고 묵상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에게 인생의 어려움이 찾아온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찾아온다.

말씀 묵상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런 위기가 찾아올 때 말씀을 가까이하며 묵상하는 사람의 인생은 반석 위에 지은 집처럼 견고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요하다. 비 오고 바람 부는 것은 똑같지만, 그 위기에 굳게 버틸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진 반석 위에 지은 집이라는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말씀이 교회를 살린다. 그리고 말씀이 가정을 살린다. 우리 각자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때 평소에 쌓아둔 말씀 묵상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경험하게 된다.

말씀 묵상은 사탄의 공격을 막아내는 능력이다. 사탄이 이렇게 공격하면 이 말씀이 나오고, 저렇게 공격하면 저 말씀이 나오면서 막아내는 인생은 복되다.

위기가 올 때, 사탄이 공격할 때, 대응하며 막아낼 말씀이 한 구절이라도 있는가? 지금부터 말씀으로 무장하기 바란다. 말씀의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자. 위기가 오기 전에,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기 전에 말씀을 쌓자. 말씀을 묵상하자. 위기가 찾아올 때를 대비해서. 말씀의 반석위에 있으면 안전하다.

말씀으로 무장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의 변질을 막는 용사가 된다. 모두들 위기라고 하는 교회의 현실에서 절대로 현상유지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 오히려 부흥을 맛보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되기를 바란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주님이 약속한 성령 간절히 기다리네.” 그러려면 주님이 약속한 성령을 간절히 기다려야 한다. 주님이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린다는 것은 말씀 묵상과 기도로 무장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말씀 묵상도 안 하고 기도도 안 하면서 “성령의 단비를 기다린다”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제 좀 지쳐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 행동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 먼저 행동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행함 있는 믿음으로 바뀌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말씀의 견인을 받을 때, 영적인 무기력이 떨쳐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넘치리라고 믿는다. 말씀 묵상하는 데 집중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며 기도한다.
 —  지금 변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이찬수 —

>>> 삶과 신앙 (7월 30일 2023)

말씀에 붙들리면 위기를 이긴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 청년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년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이 아팠던 것이, 하나같이 살기 참 힘들다는 말을 쏟아 놓는 것이다.

“목사님, 이것도 힘듭니다. 저것도 아픕니다.”

아직 젊은 청년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기성세대보다 마음이 여리다. 그래서 상처도 잘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격려와 가르침이 필요하다. 그날, 이런 저런 일들로 아파하는 청년들을 격려하며 내가 해준 이야기가 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터널이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산이 많기 때문에 터널을 뚫어서 기찻길을 많이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가려면 꽤 많은 터널을 지나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서울역에 앉아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하나님, 오늘은 터널 만나지 않게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이 기차에 탄 모든 사람들이 다 터널을 만나도 저는 절대로 터널을 만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만약에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부산에 안 가겠다는 소리다. 부산역으로 가려면 누구나 예외 없이 터널을 지나가야 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기도할 때 고난이 찾아오지 않게 해달라고, 인생에서 터널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은 옳은 기도가 아니다. 그 기도는 응답될 수가없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설계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이 말씀을 떠올린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전 7:14 하나님은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셨다. 왜 그러셨는가? 형통한 날에는 기쁨을 맛보게 하시려고, 곤고한 날에는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시려고 그러신 것이다.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형통한 날에는 최선을 다해 기쁨을 드러내고,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형통한 날에 하나님이 주신 지침이다.

그런가 하면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고 하신다. 되돌아보라는 것이다. 인생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잘 가고 있는 길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아프고 괴로운 일이 왜 일어났는지, 하나님께서 이런 아픈 과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기 원하시는지를 민감하게 살펴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삶에 때로 곤고한 날을 주시는 이유이다. 이런 이유로 형통한 날과 곤고한 날을 병행해서 주신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헤아린다면, 기도할 때마다 터널 없는 인생이 되게 해달라고, 밝은 태양만 보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생의 서울역에서 출발해서 부산역까지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그 터널은 돌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고마운 도구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터널을 없애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때때로 주어지는 인생의 터널을 ‘잘 통과하는 법’을 배우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  지금 변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이찬수 —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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