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개요: 로마서1:16-17 /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이중성, 최악의 범죄자를 사형하는 형틀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도였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자랑하며, 증인이 됩시다.
말씀요약: 로마서1: 16-17 / 복음의 능력
바울도 복음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마침내 예수님을 정죄하며, 제자들을 이단에 빠진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했던 바울이 그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고린도전서 1:22-24 말씀처럼, 복음에는 당시 부끄러워할 만한 요소들이 있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사형 틀이었고, 반란 범이나 최악의 흉악범을 사형하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그래서 복음은 첫째, 유대인이 거리끼는 것이었고, 둘째, 헬라인에게 미련한 것이었다. 심지어 신명기 21:23은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고 기록한다. 따라서, 당시 십자가는 저주와 패배의 상징이며 결코 승리와 영광이 될 수 없었다. 십자가에 달린 나사렛 예수를 통해 나타난 복음이 좋은 소식일 수가 없었던 이유이다. 거리끼는 것이 되기 쉬웠다. 또한, 헬라인에게는 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할 수 없으며, 패배한 신은 더 이상 신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바울은 복음을 자랑했다.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율법이나 헬라인의 고매한 철학에도 없는 능력(헬라어 두나미스)을 바울은 복음 안에서 선포한다. 복음의 능력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전체를 요약하는 표현, ‘이신칭의’는 하나님 나라에는 그 무엇으로 갈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간다는 선포이다.
이제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완벽하게 이루어졌고,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의롭게 된다. 이제 성도는 초보적인 믿음에서 성숙한 믿음, 성화되는 믿음으로 성장하도록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 모형은 유월절 사건에서 이미 예시된 바 있다. 어린 양을 죽이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칠하도록 명령을 받은 이스라엘은 완전히 믿어 실행함으로써 가정의 장자를 살릴 수 있었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알고, 그에 합당하게 따르는 것까지 포함한다.
종교개혁의 3대 모토 중의 하나가 오직 믿음, sola fide 였다. 그런데,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의 영향으로 변질된지 오래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질 것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자신과 자녀가 잘 되는 복을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를 위해 죽으셔서 구원받았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바울처럼 우리도 복음을 자랑해야 한다. 미국이 더 이상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 할지라도, 한국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손가락질을 받아도 우리는 복음을 자랑해야 한다. 복음의 자랑이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믿음으로 성숙해 지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복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복음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성도가 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