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18 삶과 믿음 모음

>>> 교회와 사역

찬양의 세대차이 극복하기
1892년 미국 감리회에서 우리나라 인천으로 파송된존슨 선교사와 로즈와일러 선교사에 의해 편집된 ‘찬미가’는 27편의 찬송을 모아 악보 없이 가사만 실어서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찬송가로 알려져 있다.이후 찬양가(1894년)에 이어 찬미가의 개정판들이 계속 만들어지면서, 우리는 모든 예배에서 찬송가로 함께 찬양해 왔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교회의 핍박 속에 찬송가를 부르며 순교 신앙으로 교회를 지켰다.

이후에는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잠시의 평안도 없이 남북이 분단되고 찾아온 보릿고개는 광야의 인생을 묵상하며 오히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등을 찬송하며 매일 새벽을 깨우게 했다. 교회는 1970년대를 지나며 서서히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찬송가는 우리 60대 이상 어른들에게는 숱한 인생의 흔적이 묻어 있는 삶의 고백이 되었다. 이것이 어른들이 교회 예배에서 찬송을 좋아하며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젊은 세대는 찬송가에 대한 이런 삶의 흔적이 없다. 옛날 곡조와 삶의 벼랑 끝에서 부르는 것 같은 진지함이 너무 무겁게 느껴진다. 나름 어른들과 함께 호흡하려고 현대적인 음악으로 편곡도 해 보지만, 사실 서로의 공감대가 너무 멀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편곡된 찬송가마저 어른들은 잘 따라 부르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찬송가에 대해 어른 세대와 젊은 세대가 서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필자는 어른 세대에게 찬송가의 곡조를 절대화하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고, 젊은 세대에게 찬송가 가사에 대한 깊은 은혜를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먼저 어른 세대가 찬송가 곡조를 절대화하면 안 되는 이유를 살펴보자. 찬송가의 일부는 그 곡조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세상 나라의 국가나 이성 간의 사랑을 노래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곡들이 있는데, 이는 교회에서 쓰는 가사는 있지만 곡조가 없는 찬송들에 대해, 세상 노래 곡조를 차용하여 가사를 붙여 불렀기 때문이다.

‘시온성과 같은 교회’는 현재 독일 국가이고, ‘피난처 있으니’는 영국 국가이며, ‘하늘 가는 밝은 길이’는 이성 간의 사랑을 노래한 스코틀랜드 민요 ‘애니 로리’의 곡을 가져온 것이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는 영화 ‘애수’의 주제곡이었고,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미국 소방대원 행진가였다. 이처럼 찬송가에서 사용되는 곡조는 세상 곡조를 차용한 것들이 있으므로, 지금 불려지는 현대의 찬양곡에 대한 곡조만을 일방적으로 ‘세상 곡조’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반면 젊은 세대는 찬송가 가사의 깊은 의미를 알아야 한다.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의 작사가인 벤자민스몰크 목사는 당시 유럽의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 사이의 종교전쟁이었던 ‘30년전쟁 (1618-1648)’이 끝난 후 전쟁 후유증으로 흑사병이 돌았을 때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았다. 열심히 심방을 돌고 집으로 돌아온 스몰크 목사의 집에는 불이 났고, 이미 죽은 두 아들의 시신만 남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라고 고백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젊은 영혼들의 가슴에 새겨질 때, 찬양을 부르는 태도와 은혜가 달라질 것이다.

필자는 찬송가학을 학교에서 강의하며 이런 찬송가의 배경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수업이 처음 시작될 때 소극적이던 학생들이 수업 끝날 때쯤에는 이를 눈물로 부르던 모습이 생각난다. 분명 젊은 청년들은 의미를 잘 모른다. 가르쳐주지 않았고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들에게 찬송가의 역사적 가치와 전통적 권위만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한 장 한 장에 담겨 있는 의미를 말해 주는 것이 더욱 마음을 열게 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 백성훈 목사, 『팀사역의 원리』 저사

신앙과 삶

미국의 가정사역자인 데이브윌리스(David Willis) 목사는 최근 처치리더스닷컴에 ‘남편이 아내를 향한 존중감을 표현할 수 있는 8가지 방법’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1. 오직 아내만을 바라보라
남편은 머리를 멋있게 손질한 모델이나 지나가는 여성들과 아내를 비교하지 않음으로써 아내에 대한 존중감을 보여줄 수 있다. 남편들이 오직 아내만을 바라볼 때, 아내는 안정감과 더불어 내가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2. 아내의 꿈을 격려하고 지지하라
남편은 아내의 꿈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존중감을 보여줄 수 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남편은 아내가 꿈과 희망을 성취해나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지지해주어야 한다.
3.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열심히 일하라
남편이 열심히 일할 때, 이는 아내에 대한 존중감을 전달한다. 게으른 남편은 아내(또는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존중감을 전달할 수 없다.
4. 집안일을 도우라
집안인들은 각각 다르다. 아내가 집안일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남편도 이를 도울 수 있다. 설거지나 빨래개기 등은 아내를 향한 존중감을 보여줄 수 있는 단순한 방법이다.
5.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그녀의 말을 들으라
남편이 아내와의 부부관계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아내와의 소통이 필요하다. 남편은 휴대폰이나 TV를 잠시 꺼두고, 아내와 의미있는 대화를 나누고, 항상 아내에게 진실을 이야기함으로써 아내에 대한 존중감을 보여줄 수 있다.
6.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지라
주기적으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아내에 대한 존중감을 보여줄 수 있다. 남편은 취미생활과 경력을 위한 시간 외에는 아내에게 최고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한다.
7. 끊임없이 그녀를 좇으라
대부분의 남성은 데이트 할 때에 굉장히 많은 정성을 쏟고, 결혼한 이후에는 게을러지고 일관성이 없어진다. 남편이 끊임없이 삶의 모든 여정에서 더 나은 모습을 유지함으로써 아내에 대한 존중감을 보여줄 수 있다.
8. 그녀를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
사랑은 누군가가 스스로를 믿기 어려운 때에도 그를 믿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의 말, 행동, 그리고 존경을 통해 그녀를 세워주라. 당신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고 흔들림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라. 이것이 그녀에게 자신감을 줄 것이다.

>>> 교회와 사역

“음악은 나처럼? ‘음악의 교리화’가 빚어낸 상처부터 회복해야”
대한민국 교회는 ‘송리스트(Song List) 전쟁’ 중이다. 예배팀과 예배자 사이에 서로가 원하는 찬양이 다르고, 그 안에는 기성세대와 젊은세대 간의 세대 차이가 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기성세대는 오직 찬송가를 기준으로 옛날부터 부르며 은혜를 누려왔던 복음송을 좋아하고, 젊은세대는 점점 발전하는 음악의 흐름에 적용된 현대적인 찬양을 좋아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예배팀이 젊은 세대 위주로 구성됐고, 자신들 세대에 맞는 현대적 찬양을 들고 나와서 부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예배의 예배자들 분포를 보면, 기성세대가 더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젊은세대 중심의 예배팀과 기성세대 중심의 예배자들 사이 세대 차이가, 찬양 선곡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가장 먼저 질문해야 할 것은,  ‘과연 찬양의 세대 차이가 단순한 시대 상황에 의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만 할 수 있는가’ 이다. 왜냐하면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시대적인 상황을 넘어 이 세대차이를 촉진시키는 이유가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찬송가와 복음송으로 찬양사역을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바로 음악의 ‘교리화 현상’이다. 이로 인해 예배자들이 마치 교단과 교회의 신학적 교리가 달라서 각자의 신앙을 인정해 주지 못하고, 서로를 비판하는 것처럼 음악을 정형화해온 것이 교리화 현상처럼 되어 버려, 음악인들끼리 서로의 음악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일들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는 예배자들도 자신들이 속한 교회와 좋아하는 예배단체 또는 아티스트의 영향 때문인지, 그런 음악이 아니면 문제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어떤 교회에 가면 이런 음악을 해야 되고, 다른 교회에 가면 저런 음악을 해야 되고 하는 식으로, 음악을 신학처럼 교리화시킨 교회와 단체들, 아티스트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이런 현상이 계속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사실 아직도 몇몇 예배음악 사역자들이 지금까지 음악의 스타일, 장르, 사운드의 톤 등을 교리화시키는 아주 큰 실수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찬양을 하는 사람이면 자기 음악이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최고의 예배를 드리고 최고의 가치를 드려야지. 배워서라도 음악성을 기르고 잘 하라”고 한다. 그런데 자기보다 더 잘하고 자기보다 더 현대 대중에게 맞으며 유행하는 음악을 하면 갑자기 신학적으로 비판을 가한다. “어떻게 예배 안에 그렇게 세속적 코드를 가져올 수 있어? 어떻게 저렇게 전자 음악을 쓸 수 있어? 어떻게 음색과 톤이 저럴수 있어?”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결코 올바르지 않다.

한편으로는 더 많은 찬양 사역자들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래서 찬송가를 현대적 음악 스타일로 편곡하거나, 전체 송 리스트 중 일부를 기성세대에 특화시켜 준비하거나, 새로운 찬양이나 어려운 찬양을 1곡씩 선곡하되, 몇주간 반복하여 불러서 모든 세대에 익숙하게 만드는 등 여러 방법으로 대안을 찾아왔다. 이런 대안의 고민이 계속되어, 더욱 적절한 방법들로 발전되고 개발되도록 힘써야 한다.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예배 음악은 음악의 시대적 변화에 발을 맞춰왔고, 언제나 과거와 현재의 음악적 추구가 변해왔다는 점이다. 그 중에 찬양은 특별히 ‘함께’부르는 것에 최적화된 특별한 영역의 음악이었고, 음악성의 추구보다 신앙의 고백을 담는 것에 더욱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런 음악의 스타일에 대한 스스로의 고집보다는, 함께 공감하고 함께 부르며 함께 고백할 수 있는 예배음악이 선호돼야 한다. 아울러 예배팀은 먼저 이 찬양을 함께 불러야 할 예배자를 보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이들과 함께 부를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 우선된 고민아래 변화되는 음악의 흐름을 담고 세대를 품어야 한다.
–  백성훈 목사 『팀사역의 원리』 –

>>> 묵상 에세이

주님을 만난 내가 행복할 수 밖에 없는 20가지 이유
내게 힘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왜 내가 할 수 없겠는가? (빌 4:13)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나의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고 했는데 왜 내가 부족하겠는가? (빌 4:19)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인데 왜 내가 두려워하겠는가? (딤후 1:7)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분량만큼 믿음을 주셨는데 왜 내가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는데 믿음이 부족하겠는가? (롬 12:3)
여호와는 나의 생명의 능력이시며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휘할 것인데 왜 내가 약하겠는가? (시 27:1, 단 11:32)
내안에 계시는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신데 왜 내가 사탄의 지배를 허용하겠는가? (요일 4:4)
하나님께서 항상 나를 이기게 하시는데 왜 내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하겠는가? (고후 2:14)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지혜가 되셨고 내가 지혜가 부족하여 구할 때 꾸짖지 아니하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데 왜 내게 지혜가 부족하겠는가? (고전 1:30, 약 1:5)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신실하심과 소망이 있는데 왜 내가 우울해져야 하는가? (애 3:21-23)
나를 돌봐주시는 그리스도께 나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데 왜 내가 염려하고 두려워하겠는가? (벧전 5:7)
주의 성령이 계시는 곳에 자유함이 있는데 왜 내가 멍에 속에 있겠는가? (갈 5:1)
그리스도 안에 정죄함이 없다고 했는데 왜 내가 정죄받은 것처럼 두려워 하겠는가? (롬 8:1)
그리스도께서 항상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떠나거나 버리시지 않는다고 했는데 왜 내가 외로워하겠는가? (마 28:20, 히 13:5)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저주를 받으사 율법의 저주에서 나를 속량하시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는데 왜 내가 저주를 받았거나 불행한 희생자라고 느끼겠는가? (갈3:13-14)
내가 모든 환겨에서만족하는 법을 배웠는데 왜 내게 불만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빌 4:1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는 그리스도를 나 대신 죄로 삼으셔서 나를 의롭게 하셨는데 왜 내가 무가치한 사람처럼 느끼는가? (고후 5:21)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 아무도 나를 해할 자가 없는데 왜 내가 박해를 받는 것처럼 픠해의식을 갖겠는가? (롬 8:31)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 내주 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나에게 지식을 주시는데 왜 내가 혼란에 빠지겠는가? (고전 2:12, 14:33)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일에 이길 수 있는데 왜 내가 실패할까 두려워 하겠는가? (롬 8:37)
예수께서 세상과 세상의 환란을 모두 이기신 것을 알고 나니 담대함이 있는데 왜 생활의 어려움으로 고민하겠는가? (요 16:33)

교회와 사역

교회 팀사역의 건강성
하나님께서도 ‘사람(남성)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서(창 2:18)’ 여성을 만드셨듯이 교회에서도 홀로 사역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리 규모가 작더라도, 팀이나 조직으로 움직이게 돼 있다. 그리고 아무리 구원받고 변화받은 크리스천들끼리 사역을 한다 해도, 갈등과 문제는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각 교회에서는 이러한 여러 갈등에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모두들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를 내세우기에, 조정과 화해도 쉽지 않다. 그런 이유로 사역이 흔들리거나 결국 중단되는 경우도 있다. 특히 교회 안팎의 찬양팀 내에서 갈등이 적지 않고 그로 인해 해체나 분열이 잦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팀이라는 것은 사람이 모였다는 뜻이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생각과 개성 또는 고집이 있기에 의견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문제 발생의 요인은 상존한다. 첫째, 관계로 인해 표출되는 문제이다. 신뢰가 깨지거나 오해가 생기기도 하고, 뒤에서 비난하거나 때로는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둘째, 서로가 생각하는 팀의 정체성 차이에서 드러난다. 찬양팀의 경우 사역팀인지, 양육팀인지 정체성을 혼동하다 보니 사람이 자주 바뀐다거나 연습을 자주 못해서 발전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밖에서 볼 때 불안하거나 팀이 오래 가지 못하는 일이 있다. 마지막으로 리더에 대한 불신이다. 팀 사역 문제는 대부분 리더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찬양팀 리더들이 리더십이나 팀 사역의 실제에 대해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보니 관습적인 절대 권위와 카리스마로 해결하려 한다. 그들은 음악적 자질로 리더가 됐지만 의사소통이나 문제해결 능력이 없다 보니 사역에서 드러나는 문제들을 성숙한 방법으로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카리스마 또는 그들이 가진 실력으로 누르려 한다. 자연히 리더에 대한 불신이 생기게 된다.

어떤 교회의 조직과 부서보다도 찬양팀의 90% 이상은 그 어떤 공동체보다 조직적으로 팀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조직은 만들었지만, 조직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의사소통도 힘들고 운영이 힘들어진다. 많은 리더들이 관계성이 부족하고, 본인이 무대의 중심에 서기 때문에 맡은 팀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가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때 음악성만으로 해결하려 한다거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성만을 강조함으로는 해결이 힘들게 된다. 구체적으로 조직인 찬양팀에 의사소통과 리더십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이다.
  백성훈 목사 『팀사역의 원리』 –

>>> 묵상 에세이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고난을 싫어한다. 고난이 온다면 불길한 징조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정반대로 고난을 일부러 찾아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예컨대, 에베레스트 같은 산을 등반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등반하다가 동료를 잃기도 하고, 동상에 손과 발을 절단하기도 한다. 어느 삶이 더 풍요로울까? 우리 삶의 모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자. 복음은 말한다. “그리스도는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웠다(히 5:8).”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이다. 주님이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웠기에 우리도 그래야 한다. 즉, 고난의 학교에 입학해야 한다. 이 학교에서는 단 한 가지 과목만 가르친다. 순종이다. 순종을 배우지 못할 때의 부작용이 크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순종을 배우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는 자신의 영을 소멸하는 법만 배운다. 곧, 고단한 삶 속에 있는 온갖 낙담, 절망, 분노, 우울 등과 같은 영을 갉아먹는 ‘구더기들’을 얻게 된다.

이 학교에 입학하여 고난을 당한 대표적인 예로, 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조차 자신이 왜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때는 순종을 배울 수 없었다. 그는 “나의 영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기다리는구나(욥 17:1).”라고 고백했다. 욥도 고난의 학교를 통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자칫 잘못하면 욥의 고백처럼 자신의 영을 소멸하는 법만 배운다.

고난의 학교의 특징은 우리를 안으로 향하게 하는 내면의 수업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학교 수업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디자인돼 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인재가 되기 위한 방법을 가르친다. 하지만 이런 수업의 큰 단점은 많이 배우나 정작 자기 자신은 수수께끼 상태로 있다. 내가 누구인지 이 근본적인 물음에는 답을 못한다. 반면 고난은 사람을 안으로 향하게 한다. 그래서 이 수업은 속사람’의 수업이다. 이 학교에서는 고난이 가르치고 있고, 하나님은 수업을 참관하는 분이시고, 순종은 요구되는 시험이다. 고난이 밖에서부터 속사람 속에 들어오고 나서야 수업이 시작되는데, 문제는 보통 고난이 속사람 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우리가 막는다는 점이다.

생각해 보면 세상의 지혜는 고난에 대처하는 많은 방법을 개발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치료법은 몸을 구원해도 영혼을 죽이는 우울한 특징이 있다. 또한 고난 당하는 자를 격려하는 많은 치료법도 알고 있다. 고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또한 우리의 정신을 잠깐 활력을 돋게 해도, 영혼을 갉아 먹는 우울한 특징이 있다.

오직 고난 중에 자신의 속사람을 돌아보고 그 속사람이 가르칠 때, 이런 영성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주님이 하셨듯이 고난을 통해 기꺼이 배우기 원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한 것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만을 지속적으로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고난으로 인해 세상과 젖을 떼게 된다. 세상의 사랑하는 일로부터, 세상에 의해 쓰라림을 당하는 일로부터 젖을 떼야 한다. 영원을 위한 배움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고난의 학교는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을 배우는 ‘조용한 수업’이다. 오직 단 한 가지 순종만 배우니까. 학생의 관심은 방해를 받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홀로 하나님 앞에 있으니까.
– 이창우 목사 –

교회와 사역

우리교회 예배팀, 경배와 찬양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우리가 ‘예배하다’ 라고 말할 때 생각나는 흔한 이미지는 목사의 설교와 성도의 찬양, 그리고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예배/찬양팀일 것이다. 그만큼 ‘예배’와 ‘찬양’은 분리될수 없는 관계이다.

흔히 예배의 뜻을 생각한다면, 가장 먼저 영어 ‘worship’ 을 생각할 것이다. worship 은 worth(가치)+ship(배)의 합성어로 ‘가장 가치있는 것을 드린다’ 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배의 자리에 갈 때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가야 한다는 아주 단순한 적용부터, 예배팀이 미리 리허설(연습)로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전문적 적용까지 다양한 적용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용어상 의미보다 더 중요한 개념상 의미도 알고 적용해야 한다. 개념상 의미는 예배를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예배는 경배와 찬양의 두 가지 개념으로 구분된다. 흔히 찬양을 중심으로 예배할 때, ‘경배와 찬양’ 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찬양은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 성품, 사역, 약속, 말씀 등을 노래, 춤, 몸짓 등으로 높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것이다. 때문에 찬양할 때는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마음과 동시에, 노래하고 외치고 박수를 치는 등의 적극적인 외적 표현도 있어야 한다.

경배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높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릴 때, 성령님이 임재하셔서 우리의 영혼을 만지시고 깨우시는 일이 경험되면, 비로소 찬양을 넘어 경배를 드리게 된다. 이 때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노래뿐 아니라 기도하거나 침묵하면서 그 말씀하심에 집중하게 된다.

이 두 개념을 예배/찬양팀이 찬양 시간에 적용한다면, 찬양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적극적인 의지로 노래하고 춤을 추고 손을 들고 박수를 치다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데, 여기서 흔히 ‘합심기도’ 로 이어진다. 이렇게 예배는 경배와 찬양의 두 가지 개념이 함께 공존하며 경험되고, 예배/찬양팀은 이 개념을 명심하며 찬양 시간을 준비해야 한다.
– 백성훈 목사, 『팀사역의 원리』

삶과 믿음

Top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