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20 삶과 믿음 모음

>>> 신앙과 삶 (10/25/2020)

살아 있는 예배를 드립시다.
어떻게 예수님과 입을 맞추는 것처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있을까요? 바로 영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냥 예배당에 앉아 설교를 듣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누가 그 사람에게 예배를 안 드렸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과 입을 맞추는 것 같은 시간을 보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는 예배에 관해 잊을 수 없는 경험이 있습니다. 제가 군목훈련을 받을 때인데, 군목훈련이지만 처음 한 달은 사병훈련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첫 주 수요일에 훈련생은 저녁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훈련 목적상 첫째 주는 모든 종교 행사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수요일 아침에 그 통보를 받고 군종 장교 후보생인 목사들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수요예배를 좋아하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요예배는 드려야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수요예배를 꼭 드려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절대 안 된다고 했지만 또 찾아가 꼭 가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저녁에 타협을 해왔는데, 예배에 가도록 허락해주는 대신에 저녁에 쉬는 시간도 없고 씻을 시간도 없고 예배가 끝난 다음 곧바로 내부반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요예배에 안 가겠다는 말이 나올 만한 조건이었지만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 예배만 드리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군인교회 예배당에 들어가는데 그때부터 어찌나 눈물이 흐르는지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같이 갔던 목사님들이 다 울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감격입니다. 어설픈 군인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려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뛰어가서 땀범벅으로 앉았는데, 그냥 그 자체가 감격이자 감사였습니다. 저는 그런 예배를 드려본 적이 없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예배에 대한 열망이 달랐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려도 다 똑같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배 시간에 앉아 있다가 갈 뿐이지만, 어떤 사람은 예수님과 입맞춤을 한 것 같은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주님이 거하시고 하나님이 ‘나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믿음이 있으면 예배가 달라집니다

입맞춤은 사랑과 감사를 뜻합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탕자의 냄새 나는 몸을 그대로 끌어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이런 모습으로 와서 주님과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그저 앉아서 설교를 듣는 것이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준비한 감사 예물을 드리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경외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어릴 때 이렇게 예배를 드리라고 배우지 못했습니다. 오직 예배 시간에 떠들지 말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떠들지 않았으면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도 진짜 예배를 몰랐을 때는 그저 설교를 통해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교회에 오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일이었지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렇게 드리는 예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예배 시간에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향하는 예배를 드리려고 마음을 다하고, 군목 시절에 경험했던 예배의 감격을 항상 떠올립니다. 예배 순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 설교가 어떻고 성가대 찬양이 어떤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자체는 주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의 기쁨을 예배드리는 것에 두어보기 바랍니다. 교회에 찬송하고 싶어서 가고, 헌금을 드리고 싶어서 가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올 때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세상은 아주 작아지고 하나님은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너무 크고 사람이 두렵고 여러 가지 시험 때문에 마음이 상했을지라도 예배를 제대로 드리고 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 고민했었네. 걱정 안 할 문제를 걱정했네. 사람을 왜 그렇게 두려워했을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면 세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그런 예배를 드려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이렇게 믿으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지 삶에서는 전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입 맞출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을 절대로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 유기성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 신앙과 삶 (10/18/2020)

하나님 앞에서는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되어요.
친구와 식사를 하다가 친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 그때는 친구들을 만나고 막 웃고 그렇게 어울리다가 집에 돌아와서 문을 탁 닫으면, 참았던 눈물이 막 나는 거야. 내가 정말 기뻐서 웃거나 즐긴 것이 아니라. 견딘 거였거든.”

내 모습 그대로 다가가면, 받아들여지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어른이 되면서 배웠어요. 늘 괜찮은 모습으로 포장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시간들.

그래서 저 역시 힘들어도 괜찮은 척했었지요. 하나님 앞에서도요.

많이 힘든 상황인데도 기도하면서 어떤 말을 해야 하나님이 감동하실까 생각했어요. “주님.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기 원합니다.” 이런 말들을 해야 하나님이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힘든 마음을 숨기고, 저렇게 기도를 하고 있는 저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지요.

“진실하게 말하라. 그것이 기도다. 힘들면 힘들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너를 변화시키는 것은 나지. 내가 아니다”

주님의 마음을 받고 나서 얼마나 울었던지요. “주님. 저 실은 그때 힘들었어요. 그때 있잖아요….”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주님께 아뢰면서, 주님과 막혀있던 벽이 무너지고 빛이 비취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마음을 나눠도, 나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아니니까요. 그리고 오히려 나를 오해하거나 내 삶의 무게를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주님은 나를 아시고, 나를 만드신 분이세요. 정말로 내 마음을 이해하시는 분이시며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주님은 주님께 피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다. (나훔 1:7)

한나처럼 당신을 괴롭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한나처럼 더 주님께 마음을 토하며 나아가세요.

다윗처럼 주님과 사이를 가로막는 죄가 있다면, 마음을 살펴달라고 겸손히 기도하며 진실하게 마음을 토하며 주님께 나아가보세요. 정결한 마음을 창조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보세요.

주님은 이미 당신을 위해서 중보하고 계시고, 괜찮은 척 감췄던, 당신의 숨겨진 울음소리도 다 알고 계시니까요.

주님 앞에서는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사실은 힘들다고. 실은 너무 슬프다고. 다윗처럼 외롭고 괴롭다고 진실하게 겸손하게 말씀드리며 지금 이시간 주님께 마음을 드려보세요.

계속 주님께 나아갈 때,
주님께서 반드시 회복시키시기 시작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좋으시니까요. 그모습 그대로 받으시지만,
결코 망가진 그 모습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시니까요.

주님. 우리의 구원자. 피난처. 우리의 아버지.
주님앞에 엎드립니다. 주님 나의 맘 만져주소서.
주님 뜻대로 빚어주소서. 주님 뜻대로 회복시키소서.

>>> 신앙과 삶 (10/11/2020)

미스터트롯의 한 수’와 ‘신의 한 수’
지인에게서 동영상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미스터트롯’ 경연자 중 한사람의 노래였습니다. S본부에서 고딩 파바로티로 소개된 후, 삶이 영화로 만들어졌고, 독일에 성악 유학을 다녀온 김호중이 부른 가수 진성의 노래 ‘태클을 걸지마’였습니다.

“어떻게 살았냐고 묻지를 마라 / 이리저리 살았을꺼라 착각도 마라 / 그래 한때 삶의 무게 견디지 못해 / 긴긴세월 방황 속에 청춘을 묻었다 / 어허허 어허허 속절없는 세월 탓해서 무얼해 /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인 것을~ / 지금부터 뛰어 / 앞만 보고 뛰어~ /내 인생의 태클을 걸지마”

원곡자 진성의 인생고백이 담긴 노래라고 생각됐습니다. 청아한 성악 음색에 맛갈나는 목소리는 노래를 잘 표현해 냈고 감동이었습니다. 김호중은 성악에 실증이 나서 ‘미스터트롯’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는 사람으로 불리고 싶어 참가했다고 했습니다. 노래를 몇 번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트롯의 끌림에 빠져 자꾸 듣고 싶었습니다.

굳이 따지면 기도한다는 권사가 “매주 목요일 밤, ‘미스터트롯’을 보는 게 낙이예요”라고 말한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심 강한 제자가 “일제 잔재라며 경멸(?)했던 트로트. 그것을 TV 앞에서 두 시간 넘게 ‘뽕끼’ 가득한 노래를 들으며 울고 웃고 박수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라고 말한 마음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미스터트롯’의 여러 참가자 노래를 들어보았습니다. 9살 홍잠언, 13살 정동원, 트롯 신동출신 김지찬과 이찬원 등의 트롯 노래가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리고 현역부 임영웅, 영탁, 장민호 등 여러 가수들의 무대가 대단했습니다. 트롯에 대한 묘한 매력을 느꼈고, 흥겹기까지 했습니다. 특히, 9살 홍잠언 군이 어느 교회의 노인잔치 행사에서 “솔로몬의 지혜가 담긴 책을 이름으로 가진 홍잠언입니다,”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 동영상을 보고, 더 홍잠언 군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미스터트롯’.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녀노소를 뛰어넘어 재미와 통쾌함에 빠져 웃고, 노래를 따라 부릅니다. 트롯맨 노래 중, 집에 있다던 여자 친구가 ‘교회 오빠’와 클럽에 나타나자 “니가 왜 거기서 나와~ 너네 집 불교잖아~”하며 뒷목 잡고 호통치는 넉살은 세대를 넘어 웃겼습니다.

어떤 트롯맨은 점잖은 척, 고상한 척하지 않고 앞뒤를 재고 망설임 없이, 직설을 날렸습니다. 변절을 의심하는 애인에게 “니가 봤냐고, 봤냐고~” 하며 삿대질을 하고, “첫눈에 뿅 갔다더니 그 사랑 깊이 자로 재보니 1m도 못 되더라”며 팩트로 폭격했습니다. 배꼽 잡고 웃게 합니다. 그렇게, ‘해학’(humor)이 으뜸입니다.

그리고 ‘버라이어티’했습니다. 트로트라는 하나의 형식에 연연하지 않고 다채로운 포맷과 내용을 담은 내용이 압권이었습니다. 노래만으론 모자라 태권도 품새 세계 1등 태권맨의 태권트롯, 마술사의 ‘마술트롯’ 등자기만의 특별한 무대를 죽을 힘 다해 창출하려는 노력이 감동을 주었습니다.

‘꿈과 희망의 메시지’도 있었습니다. 1세대 아이돌 그룹 멤버의 ‘제기트롯’, 가정의 희망을 구하는 아버지들의 ‘대디트롯’, 어린친구들의 끼와 재능을 펼치며, 선배가수들을 향한 ‘성장트롯’이 있어 보는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포기할 게 없는 사람은 무섭습니다. 1세대 댄스그룹 출신 가수, 인기가 시들어버린 게그맨, 어린 시절 ‘신동’이라는 소리 들었지만 지금은 무명인 가수들의 절실한 무대, 재기할 마지막 무대라 믿고 땀 한 방울까지 짜내 열창하는 트롯맨들의 열정. 그리고 팀미션을 하며 서로 격려하는 ‘우정의 무대’가 있어 절절한 울림을 줍니다.

중요한 것이 또 있었습니다. ‘미스터트롯’이 숨은 진짜 실력자가 얼마나 많은지 ‘트롯강호’의 세계를 드러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한결같이 “정말 노래 잘하는 사람들이 많네”라고 말합니다. 나이와 경력 불문하고 ‘진짜 트롯맨’들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해학, 버라이어티, 꿈과 희망의 메시지, 우정의 무대 그리고 숨은 실력자 찾기 등 ‘미스터트롯의 한 수’를 통해 시청자들이 가슴으로 진지하게 노래를 듣고, 삶의 메시지를 깨닫고 웃고 울게 되는 이유와 진짜를 알아봐 주고 찾아내는 눈이 생긴다면, 분명 ‘뭔 일이 나도 날 것’같습니다.

이런 것들을 ‘신앙인의 눈’으로 재평가하고 대입시켜보았습니다. ‘미스터트롯의 한 수’처럼 ‘신의 한 수’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목사들의 설교에 ‘해학, 꿈과 희망의 메시지’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버라이어티’하고 서로 돌보는 ‘우정의 무대’가 풍성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나아가 ‘교회강호’에 숨어 있는 진실하고, 정직하고, 순결하고, 우정있는 숨은 실력자들이 인정받고 사랑받으며 교회와 세상에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야고보서 2:2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디모데전서 6:12)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6)

사람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도 나타나져 있지도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마음’입니다. ‘미스터트롯의 한 수’나 ‘신의 한 수’의 공통점은 ‘마음’에 대한 공략입니다. ‘신앙생활’은 결국 ‘믿음생활’입니다. 마음에 믿음에 가득해야 합니다. 그러면 ‘게임오버!’

— 나관호 목사 /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

>>> 신앙과 삶 (10/4/2020)

이제는 결정해야 한다

가룟 유다 이야기는 거의 2천 년 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때처럼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셨다.

그 당시 어떤 랍비가 누군가를 제자로 불렀다는 것이 곧, 제자가 스승의 모든 것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제자로 부름 받은 자는 그야말로 ‘배우는 자’로 존재하며 진짜 믿고 따를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지금 당신도 그렇다. 예수님의 인내와 은혜가 있었기에 선택받았다. 이렇게 크리스천이 되었다. 문제는 ‘지금’이다. 정말 예수님이 당신을 살리시는 유일한 분이신가? 가룟 유다와 같은 상황, 예수님의 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신의 방법을 좇아 그분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있지는 않은가?

성경은 겟세마네 기도를 보여준다. 예수님이 거기서 살리는 기도를 하시며 먼저 모범을 보이셨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겼다. 그 기도로 유다는 살릴 수 없었는가?

짧게 답하자면, 둘 다였다. 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살릴 수 없었다.

살릴 수 있는 분이 오셨다. 심지어 기도할 필요가 없는 능력자셨다. 그분께서 살리는 기도의 모범을 몸소 보이셨다.

하지만 유다는 살 수 없었다. 살리는 기도의 무능력이 아니라 죽을 인생의 죽겠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그를 보며 우리도 깨닫는다. 살리는 기도는 무능하지 않다. 목이 곧은 죄인이 죽음을 끝까지 선택하는 것이 문제다. 배교를 고집하고, 끝까지 회개치 않으면 살 수 없다.

가룟 유다 구원의 문제가 성경에 기록되어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크리스천에게 꼭 필요한 지식 중 하나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있는지가 제자 인생의 핵심이다.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 고후 13:5

어제 믿었다고 오늘 안 믿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이단들의 전유물이다. 예수님 계신 곳에 함께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날마다 믿고 또 믿어야 한다.

이에 걸맞지 않은 생각과 행위는 회개해야 한다. 자의적 뉘우침으로는 살 수 없다. 그리스도만이 용서의 능력이 있는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께 회개할 일들을 맡겨야 산다(고전 9:27; 15:31).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 이는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 말이다. 날마다 그 구원에 합당한 자 답게 믿음으로 일관할 때 산다.

송준기,『하나님께 드리는 절박한 기도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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