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20 삶과 믿음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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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사역

나 뭔가 이상한데
그녀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날부터 그렇게 은혜스러웠던 설교가 너무 지루하고, 예배하기 싫고 기도하기 싫고, 말씀 보기도 싫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을 저의 주인님으로 모시며 저를 드렸는데…그렇게 거듭난 이후로 처음 일어난 일이었어요.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주님을 만나고 있었는데…당황스러웠죠.

‘아. 나 뭔가 이상한데?’
그런데 번뜩 드는 생각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는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기도하는데 토저 목사님께서 예배가 지루하다고 느낄 때, 진실하게 주님께 말하라고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 생각나서 진실하게 주님께 제 이런 상태를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성경을 평소보다 더 읽었어요.성경 말씀이 영혼의 양식인데, 말씀이 없으면 능력이 없다는 조언이 생각나서요. 그렇게 평소보다 더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런데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나는 왜 이럴까? 남들도 이럴까? 마귀의 공격일까?’ 그러다가 지루하게 느껴졌던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팍 깨달아지는 거예요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오늘은 예배드리고 싶지 않아. 기도하기 싫어요. 라는 마음이 들 때가 있죠. 그런데 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하면 그 기분이 안 오거든요. 다윗처럼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하나님을 송축하리라 하고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나를 강력하게 만지시는 시점이 옵니다.

‘난 예배하겠다.’ 라고 의도적으로 계속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만나주십니다. 성령님은 그런 우리의 상태를 아십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향해 간구하십니다.”

이런 저의 상태를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어서 혼자서 몸부림치고 있었는데, 성령 하나님께서 이미 이런 저의 마음을 아시고 이런 저를 위해 중보하셨음을 알게 되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그리고 결단했어요.
‘그래. 내 상태와 상관없이 나는 주님께 나아갈 거야. 그래도 주님을 예배할 거야.’ 예전에 박해를 받으며 감옥에 갇혔던 크리스천들은 쇠사슬에 묶인 손으로도 땅을 조용히 두드리며, 그 쇠사슬 박자에 맞춰서 주님을 찬양했잖아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맞아요. 주님께 계속 가면, 주님은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회복시키시니까…”

혹시 마음이 돌처럼 굳어졌나요?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도, 하나님을 예배하겠다고 의도적으로 계속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만나 주실 것입니다.

나의 상태를 주님께 진실하게 말씀드리며, 주님께 더욱 나아가세요. 그분은 살아계시며,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며, 불쌍히 여기시고, 위로하시며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니까요.

마귀는 말씀을 빼앗아가고, 기도하지 못하게 막으려하지만 주님은 마귀와는 비교도 할수 없게 크시고, 우리의 견고한 피난처가 되시며 우리를 채우실 수 있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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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사역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
우리 집안의 DNA 속에는 싸움꾼 기질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내게도 있는데, 그것이 목회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때도 있고 방해가 될 때도 있다. 그래서 잘 분별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큰 문제가 일어나기도 한다.

싸움이나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보통 세 갈래로 나뉜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거나 도망가서 지는 사람이 있고, 싸우다가 지는 사람이 있고, 싸워서 결국 이기는 사람이 있다.

창세기 26장 말씀을 읽다가 굉장히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이삭은 이 세 유형에 들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삭은 싸우지 않았지만 이겼다. 26장 후반부를 보면 이삭을 시기하여 쫓아다니며 괴롭히던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발로 찾아와 평화조약을 맺자고 한다. 자기들이 이삭의 우물을 메워서 이삭이 망할 줄 알았는데, 이삭이 옮겨가는 곳마다 우물이 터지는 것이다. 생존과 직결되지만 평생 한두 개 파기도 힘든 우물을 이삭은 가는 곳마다 일곱 번이나 터뜨렸다.

그 이유가 궁금했던 블레셋 왕은,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 주심을 알게 되었다.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창 26:29). 그래서 자기 종족을 해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최상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 아닐까?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줄 것 다 줬는데도 이기는 것이 최고의 싸움꾼 아닐까? 그래서 나는 ‘싸우지 않고 늘 이긴 사람’이라고 이삭을 정의하고 싶다.

그런데 세상에는 싸우다가 지는 한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워야 할 일들이 있다. 그 싸움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지혜와 축복이 아니라 비겁한 것이다. 할 일은 하고, 할 말은 하는 것이 분명 필요한 때가 있다. 그러나 본문이 가르쳐주는 것은 싸움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양보하고 손해 보고 져도 이기는 싸움이 있다. 이삭이 그랬다.

싸워서 이겨야 할 싸움이 있고, 싸우지 않고 져야만 이기는 싸움이 있다. 싸워서 이겨야 할 싸움은 싸워야 한다. 하지만 싸우지 않아도 되는 싸움까지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운 처사가 아닐 것이다.

이삭은 왜 싸우지 않았을까? 비겁해서? 연약해서? 아니면 성격이 너무 좋아서?

이삭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나는 다른 우물을 파도 돼. 네가 이 우물을 가져. 하나님이 복 주시면 나는 다른 곳으로 가도 잘 살 수 있어.’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땅을 먼저 선택할 수 있도록 양보했던 것과 같은 그런 믿음의 바탕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늘 이기는 것만 생각하며 살았다. 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해서 질 줄을 잘 모른다. 사실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이제 좀 나이가 들고 보니 지는 것에 대한 마음이 조금씩 넓어진다. 그냥 져 줘도 되지 않을까? 좀 양보해도 되지 않을까?

질 줄 모른다는 것은 내가 약하다는 뜻이다.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가? 조금 양보할 수 있는 것은 양보하고 손해 볼 줄 아는, 이삭처럼 넉넉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질 줄 모르는 사람이기에 이삭을 닮아가야겠다. 지는 것도 연습해야겠다. 그러나 싸워야 할 것까지 포기하는 어리석음은 범치 않겠다. 싸워야 할 것은 싸우고 싸우지 않아도 될 것은 양보하여 도리어 이길 줄 아는 그런 근사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
– 김동호 목사, 『날마다 기막힌 새벽』

삶과 신앙

“이 우주에 중립적인 것이라곤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뼘의 땅, 1초의 시간도 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사탄은 그것을 공격하고 있다.” C.S. 루이스

배려, 존중, 봉사, 희생…
심지어 똑같은 선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중심에 전혀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
자기만족, 이미지 관리, 이미지 관리
사랑의 마음, 순종의 기쁨, 예수님 닮기
나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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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사역

쇼인가? 예배인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이라는 국가적 재난 속에서 우리 가슴을 찢는 가장 큰 고통은 성전 문이 닫히고 예배가 축소되며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없게 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 이래 처음으로 성전 문이 닫히고 교회가 폐쇄되어 성도가 함께 모여 예배 드리지 못하는 전대미문의 영적 위기와 영적 재난을 목도했다. 마지막 때가 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편하게 드렸던 그 예배가 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그러한 시간을 준비해야 할 수도 있다.

코로나19 사태뿐만 아니라 언제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도 우리는 주님과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먼저 지난날 우리의 신앙과 예배 모습은 어떠했는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지금껏 예배를 습관적으로 드려온 모습이 있다면 회개하여 다시 진정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한다.

쇼하지 말고 진정으로 예배하자!

쇼는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만 예배는 온전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향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려는 위선적 행위와 형식적 종교의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진실한 교제가 회복된 진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공연하지 말고 진정으로 찬양해야 한다. 공연은 사람을 향하고 나를 드러내고 내 솜씨를 뽐내는 것이지만, 찬양은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공연단이었는가 찬양단이었는가?

연설하지 말고 설교해야 한다. 연설과 강연이 사람을 향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설교는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시대와 회중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욕을 먹고 인기가 떨어져도, 때로는 말씀 때문에 일시저으로 인간관계가 틀어지고 누군가가 큰 도전을 교회를 통해 받더라도 그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강연자인가 설교자인가?

말라기 말씀처럼 훔친 것, 흠 있고 병들고 온전치 않은 제물로 형식적으로 예배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셔서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말 1:10) 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무너진 예배로 인하여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슬픔을 느끼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한다.
– 안호성,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

삶과 신앙

1.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가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생각하라

일상의 모든 선택들은 중심을 깊이 파고들면,
결국 둘 중의 하나였다.
중간은 없었다

2. 말씀을 읽지 않으면 능력을 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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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신앙

내 말이 아닌 성경 말씀으로 기도합시다
‘말씀 기도’는 ‘내 말’이 아닌 ‘성경 말씀’으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매주 성경의 한두 구절을 정해서 일주일간 암송하며 기도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으로 기도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주일에 말씀을 정하고 평일의 삶이 시작되는 월요일부터 그 구절을 하루에 일곱 번씩 읽는다. 반복해서 여러 번 읽으며 자연스레 암송한다. 이사야 53장, 우리의 죄를 담당하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암송할 때였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사 53:4-5)

며칠째 반복해서 읽었기에 자연스레 외워진 말씀을 또다시 읽고 또 읽었다(이것이 곧 기도다). 세 번쯤 반복했을 때, 갑자기 마음속으로부터 울음이 왈칵 올라왔다. 네 번째 소리 내어 말할 때부터는 눈물이 똑똑 떨어지기 시작했고, 일곱 번째는 흐느끼며 말씀을 암송하게 되었다.

말씀으로 기도하면 이런 경험을 종종 한다. 말씀을 소리 내어 말할 때, 그것도 암송해서 마음속에 새겨 넣듯 말할 때 내 영혼에 말씀이 불현듯 빛처럼 비취는 것을 느꼈다. 눈으로 읽고 머릿속으로 이해할 때와 차원이 달랐다. 뜨거운 예배 자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찬양으로 마음이 달궈진 상태도 아니었다. 집에서 혼자 말씀을 소리 내어 몇 번 읽은 것뿐인데 몇 분 만에 내 영혼이 주님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야말로 말씀이 ‘살아서’ 내 마음을 두드리는 느낌이었다.

내 말로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과 소통하는 소위 ‘임재’를 느끼는 기도로 들어가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린다. 육적인 생각들의 잔재 때문에 하나님께로 시선을 옮기고, 내 영혼이 주님께 집중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그런 씨름을 하다가 결국 겉으로만 기도하는 ‘속 빈 강정’ 같은 기도로 끝날 때면 속이 상한다. 하지만 말씀으로 기도하면 예열 시간이 줄어들고 잡생각이 잘려나가, 속히 마음의 시선이 하나님께로 옮겨간다.

내게는 ‘말씀 암송’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암송은 어릴 때 참가하는 말씀 암송대회나 교회 특별 프로그램에서 하는 것으로만 여겼다. 또 신앙이 아주 깊은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암기를 잘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지, 암기라는 말만 들어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스트레스가 올라오는 사람은 절대 할 수 없어.’ 솔직히 귀찮고 따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러분도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암송이라는 말 대신,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 읽기’라고 하자. 기도 시간에 성경 구절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며 그 자체로 기도하는 것이다. 결코 어렵지 않다. 오히려 내 말을 늘어놓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력 있는 기도가 될 수 있다.

기도가 안 되고 소망의 불씨가 꺼지려 할 때, 말씀을 반복 선포하며 기도해보라.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다. 자신의 마음을 쥐어짜내는 것이 아니다. 말씀은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권위 있는 하나님의 언약이기에 의심 대신 믿음이 자란다.

사실 일주일에 한두 구절을 여러 번 읽는 것(암송)은 전혀 어렵지 않다. 하루에도 여러 번 무심코 들여다보는 스마트폰에서 10분만 눈을 떼어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암송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귀찮은 마음을 뒤로하고, 소리 내어 말씀으로 기도해보자.

 –유예일 『당신을 위한 기도 시작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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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사역

예배와 사역의 정상화를 위한 과정에 지혜를 모읍시다. 이런 목적에서 참고할 만한 글을 정리해 소개합니다.  

교회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8가지 팁
코비드19가 가져온 도시의 락다운은 실로 엄청난 파괴력으로 사람들의 심리까지 다운시키기에 충분했다. 앞으로 교회가 예배를 다시 시작한다하더라도 이전의 상태 수준으로 회복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까지 교회들은 지난 몇 주 동안 교회의 재오픈을 잘 수행하기 위한 전략에 대해 고심해 왔다. 법적인 행정명령이 풀리게 되면 이후로는 행동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과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배당이 이전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성도들에게 다가설 수 있을까?

오클라호마 시티의 게이트교회 토니 밀러(Tony Miller) 담임목사는 “이제 사람들은 누군가와 너무 밀착되어지는 것에 불편함을 느낀다. 옮겨서 거리두기를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제한되어 있는 교회에서는 그것이 어렵다”며 교회로 돌아가는 것과 관련 해 중요한 포인트를 짚었다.

1. 야외에서의 예배를 시도하라.
야외예배는 다양한 출구, 편안한 간격, 개방적 느낌 등 이점을 제공한다. 사람들은 건물에 갇혔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방법을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2. 교회 건물을 청소하라.
모든 목회자들과 자원 봉사자들은 교회 안과 밖을 닦고 청소하라. 교회가 열리면 성도들에게 위생적인 마스크와 물티슈를 제공할 수 있도록 준비도 하라. 교회의 모든 문에 있는 손잡이를 닦고, 소독제도 뿌려라.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 이상으로 청소하라.

3. 놀고 있는 방을 적극 활용하라.
행정 명령에 따라 단일 방이나 건물에는 제한 인원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교회당에 50명만 수용해야 할 경우 초과하는 인원은 친교실로 식당으로 또는 기타 시설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준비하라. 이 경우 오디오 및 비디오 연결이 작동하는지 확인하라.

4. 수용한계를 체크하라.
일부 주에서는 인원 수가 아닌 공간 수용력을 따진다. 팬데믹 이전에 예배당의 50% 밖에 운영되지 않았던 교회들은 정상화가 빠르겠지만, 3분의 2가 가득 찬 교회라면 예배 시간을 한차례 더 추가해서 정상화하는 방법도 고려해볼만 하다.

5. 온라인 사역에 계속 집중하라.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커뮤니케이션 팀은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성도와 연결하는 훌륭한 일을 해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접어야할 시간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한정된 인원만 그 건물에 들어갈 수 있다면, 여전히 미디어를 통해 복음의 큰 영향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또한 강단에서 볼 수 있는 신자들 뿐만 아니라 직접 대면은 못하지만 온라인 시청자들도 엄연히 신자라고 생각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6. 안내 봉사자들을 재훈련 시켜라.
예배를 전후해 전통적인 만남의 시간을 계속 유지할 것인지 고민하라. 또한 교회 입구의 안내자나 헌금 봉사자들이 신도들과의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혹여나 신도들 중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들이 한 두명은 꼭 있게 마련이다.

7. 젊은이들을 잊지 마라.
장년 예배 회복을 위한 노력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젊은 층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긍정적인 측면에서 젊은이들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 재오픈을 준비하는 동안 학생·청년부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어떤 보고에 의하면 젊은층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8. 누군가를 당황케 하거나 부끄러워할 때가 아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다시 교회에 오도록 격려하려는 열정이 있지만,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꽤 오랫동안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다른 사람들보다 집에 오래 있는 것에 대해 의도치 않게 그들을 기분 나쁘게 할 때가 아니다. 민감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민감하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모두가 여전히 교회의 한 가족임을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 크리스찬 투데이 (5/23/2020)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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