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021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11/21/2021)
하나님, 죽을 수 없다면 ‘제발’ 사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미국의 다이빙 선수였던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는 17살에 다이빙 사고로 목이 부러져 전신마비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삶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고, 심한 좌절과 분노에 휩싸여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죽을 방법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마지막으로 드린 기도가 “하나님, 제가 죽을 수 없다면 ‘제발’ 사는 법을 가르쳐주세요”였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녀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녀는 대중 연설가와 저술가, 구족화가가 됩니다. 그리고 ‘조니와 친구들’(Joni and Friends) 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수많은 장애인에게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됩니다. 죽기만 바랄 때는 비참한 삶을 살았는데 기도가 달라지니까 삶이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제, 하나님의 뜻을 구합시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아니면 어떻게 해결하겠습니까?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주님께 두십시오. “주님, 제가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게 하소서. 제가 된다 안 된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주님은 “되니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해 주소서.”
각자의 문제와 형편은 달라도 우리의 살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기도가 바뀌면 삶이 바뀌고 운명이 바뀌고 역사가 바뀝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의 인생 전체가 바뀌기를 축복합니다.
– 유기성,『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라』
한마음, 한 입
우리 모두 각자의 목소리가 있지만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습니다
우리 소리뿐 아니라 우리 삶이 다 함께 어우러져서
주님을 더욱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롬15: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 삶과 신앙 (11/14/2021)
날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하라
바울은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분별하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 빌 1:10
이 구절의 ‘분별’ (dokimazo) 이란 단어는 위조 화폐를 구별할 때, 혹은 당시에 유행하던 도자기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구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 사랑이 건강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분별의 삶이 필요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분별해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당시 그리스 철학자들은 ‘최고의 선’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견해는 달랐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하나님의 뜻’, 곧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게 우리가 건강한 인생을 사는 데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빌립보서에서 그 중요성을 다시 강조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면 마음에 새로운 소원이 생깁니다. 그것은 그냥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한 소원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야말로 최고의 선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보고 붙들고 살아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또한 10절에는 ‘진실하다’, ‘허물이 없다’라는 두 단어가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분별하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가 진실하여 허물없는 인격으로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분별을 통해서만 우리의 인격은 진실하고 허물없는, 주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화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진실하다’라는 말은 ‘내적으로, 섞이지 않은 단순성’을 의미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속이 복잡하지 않습니다. 단순합니다. 또한 ‘허물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외적 행동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즉 외적으로도 다른 사람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행동해야 함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 즉시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은 완전한 인격에 도달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적어도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다른 사람에게 시험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날마다 주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분별을 통해 주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은 멈추고 정리하면 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열중하면 됩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서지 않겠네.
I have decided to live according to your will.
No turning back.
이 찬양의 가사처럼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달란트의 크기
티가나고 어느 누구도 알만한 큰 일사역이라고 하나님께 더 잘하였다고 여김받는건 아니랍니다.
아주 사소한 작은일, 적은일이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해주실 꺼에요.”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할수 있는 최선으로
그분의 일을 하는것이 은혜이고 충성된 일입니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지 열매가 아닙니다.
>>> 삶과 신앙 (11/7/2021)
지금 다시 중보기도 할 때…
처음 중보기도에 대한 마음을 받았을 때,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큰 감동이나 마음의 부담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하는 중보기도를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해서 중보기도와 공동체에 대한 마음을 부어주셨고, 곧 걷잡을 수 없는 부담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저는 하나님께 도대체 어떤 중보기도를 원하시는지 묻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못 찾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단순히 공동체를 위한 중보기도의 중요성에만 매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성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 전체가 중보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닌, 공동체 전체가 이타적인 기도를 하는 중보기도 공동체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왜 하필 중보기도 공동체가 되라고 하셨을까요? 우리 한 사람은 너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잘 지내다가도 불현듯 두려움이 찾아오고 순간 자신감이 사라지는 이유도 숨어 있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최대한 빨리 인정할수록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7-29
하나님의 개입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나의 연약함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고백하고, 모든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어렵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방법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에 문제와 어려움 앞에서는 세상의 방법에 먼저 시선을 돌리고 마음을 빼앗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세상보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내 방법과 선택보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을 요청하십니다. 내 자아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방법과 개입하심도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만 합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을 찾으시고, 그 연약한 자들을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를 찾으시고 그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해 보이는 자들, 그러나 절대 그 내면은 연약하지 않은 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기도의 끈으로 묶어 기도의 공동체를 만드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간절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중보기도’라는 영적인 씨앗을 심어주시고, 그 씨앗이 조금이라도 자라서 싹을 틔우는 이들을 공동체로 묶어주시는 듯합니다. 이런 작은 변화들이 모일 때, 더 큰 힘을 얻게 됩니다.
– 이진황, 『지금, 다시, 중보기도』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잠시 머물러 생각합시다.
교회의 이전은 우리에게 새로운 도전과 과제를
주지만 우리가 부족하다고, 연약하다고 기 죽지 맙시다.
힘 내고 힘을 합칩시다.
다른 도약과 변화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손 모아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