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21 삶과 믿음 모음

>>> 교회와 사역 (8/29/2021)

예배
은혜받기 위해 예배드리는 자가 은혜 못 받는 이유
예배는 은혜받기 위해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드리는 것이다.

은혜받는 예배의 조건이 많다.

나에게 딱 맞는 말씀,
가장 좋아하는 찬양,
마음의 위로, 꽉 찬 예배실.

하지만 예배 성공의 조건은 단 한 가지다.

‘하나님 높이기’

창조주 하나님, 구원자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왕이신 하나님,

주권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
나아가는 것이다.

예배는 컵이 주전자의 물을 받아 내려고

주전자 아래에 놓여 있는 것과 같다.

나는 낮아지고 하나님을 높여 드릴 때
은혜가 채워진다.

예배는 낮아진 하나님과 그를 높이는 성도의 만남이다.

그래서 겸손한 사람은 언제나 예배를 성공시킨다.

삶과 신앙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배자의 필수 자세
우리는 흔히 진심이 담기면 괜찮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위험한 함정이다. 진심이라고 해서 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배는 아니다. 또 하나, 흥분과 감동과 은혜를 체험하면 괜찮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도 마찬가지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배의 원칙은 아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예배는 진심과 감정이 아닌 온전한 자세이다. 그러면 진심과 감동보다 더 중요한 예배의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일까?

먼저 하나님은 감정보다 깨진 심령을 원하신다. 우리는 찬양 부르며 조금 감동 받고, 내 안에 있던 문제에 대한 확신이 조금 생겨서 위로 받고 눈물 몇 방울 흘리면 예배를 잘 드렸다고 생각한다. 그게 은혜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삼하 6:13).

참 기가 막힌 장면이다. 이제 드디어 언약궤를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출발하는데, 여섯 걸음 가서 제사를 드린다. 감사해서 언약궤를 옮기다 말고 감격하여 그 앞에 고꾸라져 엎드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 이것이 회복을 경험한 사람들의 감격이고,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의 간증이며, 이것이 깨어진 심령(broken spirit)이다. 그래서 예배는 그냥 감정적으로 흥분하는 것, 눈물 몇 방울 흘리는 것이 초점이 아니란 것이다.

예배의 기반은 아무런 자격 없는 내가, 예배드릴 수 없는 내가 예배의 자리에 와 있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흘리는 은혜의 눈물이다. 깨진 심령의 소유자는 예배가 시작되기도 전에 가슴을 찢으며 운다. “나는 죄인입니다. 여기 있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하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은가? 정말 은혜가 넘쳤던 예배를 돌이켜 보면 예배 전체가 화려하고 진행이 수려하게 잘 이루어진 예배가 아니라 힘든 길을 돌파하여 예배의 현장에 왔을 때, 예배가 시작되기도 전에 혼자 조용히 기도하며 울던 때다. 하나님은 예배가 시작되기도 전, 바로 그 순간 이미 우리의 예배를 받으셨다.

‘상한 심령’(broken spirit)은 파산한 영혼, 부도난 영혼을 말한다. 섬기게 하심도 주님의 은혜요, 드리게 하심도 주님의 은혜요, 깨닫게 하심도 주님의 은혜임을 기억하는가? 예배는 내 능력껏 펼치는 것이 아니다. 바닥에서 시작되는 것이 예배다. 있는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없지만 그 자리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가슴을 찢는 것이 예배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진심이나 감정보다 참된 겸손을 더 귀하게 여기신다. 진심보다 참된 겸손이 우선이라는 말에 놀라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진심만 전해지면 된다고 배우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심이 전해질 수만 있다면 방법론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한번 생각해보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하는 것은 진심은 전할지 모르나 절대로 겸손의 모습은 아니다. 결국 상대방을 불쾌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만든다. 진심이 중요한가, 아니면 배려가 중요한가? 배려가 있고 마음이 통하면 진심이 전해진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심정이나 주님의 요구, 주님의 생각은 둘째 문제고 내 진심만 전해지면 된다고 착각한다. 이런 교제는 주님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종종 큰 어려움을 초래한다.

‘예배’가 정말 주님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이라면 나의 의도와 본심이 무엇인지보다 우선 예배의 대상을 존중해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없어지고 주님의 필요와 그분의 반응을 존중하는 것이 예배의 자세란 말이다.

내 경험을 내려놓고, 내 주장을 포기하고 내 삶을 주님의 권세 앞에 굴복시키는 것이다. 이 시대에 가장 안타까운 것은 예배가 무절제와 개인주의로 변질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예배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진심만 전해지면 되지’의 폐해이다. 그렇다 보니 겸손이 없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예배자의 자세로, 겸손의 자리로 돌이키는 은혜가 있으면 좋겠다.
– 다니엘 김, 『완주자』

>>> 삶과 신앙 (8/22/2021)

“너 아니면 안 된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그 어떤 것으로 대치할 수 없이 사랑하셨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은 즐거운 감정’이라는 상식을 파괴한다. 사랑은 ‘기술’이기에 사랑의 지식과 사랑을 배우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한다.

실상 대부분의 현대인은 사랑이 중요하다고 믿지만 정작 배워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은 감정이나 느낌을 넘어, 의지이고 결심이자 신성한 약속이라는 것이 에리히 프롬의 선언이다. 따라서 사랑도 기술을 익히듯이 익히고 배워야 하며, 사랑에로의 배움이야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배움이라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꽃을 아름답게 키워가는, 물을 주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러한 ‘사랑의 과정’이 ‘사랑의 기술’이다. 사랑의 기술이 없는 사랑, 즉 배려와 예의와 희생이 없는 사랑은 구속과 폭력이 될 수 있다.

프롬은 한 미성숙한 사랑의 대표적인 오류를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첫째, 사랑을 ‘사랑하기’가 아니라 ‘사랑받기’로 이해하는 점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성공하여 돈과 권력을 장악하려고 한다. 여성들은 몸치장에 몰두한다. 마치 그것만 갖춰지면 사랑은 절로 굴러온다는 듯이 말이다. 많은 사람이 사랑에 실패하는 이유가 사랑받기 위한 ‘조건’에 목숨 거느라 정작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랑을 ‘대상’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점이다.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인데,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대상을 만나는 것’이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이다. 다시 말해 좋은 사랑의 대상만 만나면 그 사람과 사랑하는 일은 쉽다는 착각이다.

셋째, 사랑을 감정으로만 생각하는 오류이다. 사랑에 속는 것은 그 강렬한 감정 때문일 것이다. 뜨거운 감정이 있을 때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감정이 희미해질 때는 사랑도 식었다고 생각하는 오류이다.

사랑의 시작도 중요하지만, 사랑의 과정은 더욱 중요하다.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과정이 바로 ‘사랑의 의지’이다. 즉, ‘감정의 사랑’을 넘어 ‘책임 있는 사랑’으로 가야 성숙한 사랑이다. 책임 있는 사랑이 바로 의지적인 사랑이다.사랑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한 평생을 희생하며 섬기는 것이다.

분명 ‘사랑의 설레임’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때부터는 ‘사랑의 깊이’를 추구해야 한다. 약속이 있는 사랑, 배려하고 희생하고 책임을 다하는 사랑의 의지가 바로 사랑의 깊이이다.

그렇다면 제일 좋은 사랑의 모델이 무엇일까?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가 여기 있다. 하나님은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 원수가 된 그때 우리를 사랑하셨다(롬 5:8).

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마치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죄에 빠진 우리를 포기하고 새롭게 창조하면 되는데, 수많은 선지자를 보내시고, 마침내는 아들 예수까지 보내 십자가에 죽게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 했다. 마치 “너 아니면 안 된다”라는 마음으로 사랑하신 것이다. 그리고 변함없는 사랑의 의지와 책임으로 지금도 우리를 주목하고 계신다.

이 세상에서 수없이 흩날리고 있는 사랑의 시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랑의 약속이 여기 있다. 우리가 배워가야 할 사랑의 샘플이 여기 있다. 사랑은 계속 배워가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야 한다.


진정한 깨달음은
삶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많은 말씀 양육을 받습니다.

예배로, 묵상으로,
제자훈련으로,
그리고 그 안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많은 관계들속에서
나의 모습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나”
“말씀에 순종하는 나”
“이웃을 사랑하는 나”
그리고 그 깨달음은
삶으로 나타날 때에
비로소 ‘깨달음’이 됩니다.
 – 이정한 작가

>>> 삶과 신앙 (8/15/2021)

당신이 속한 교회의 담임목사를 위해 기도하라
일꾼을 달라고만 기도하지 말고 잘 사역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19세기 중반 수십만이 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던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 목사님의 놀라운 능력의 근원은 기도였다. 피니 자신도 대단한 기도의 용사였지만, 그를 위해 기도하는 기도의 동역자가 많았다.

특히 피니는 각지를 여행하며 부흥 집회를 인도할 때마다 클러리와 내쉬라는 두 분의 연세 많으신 동역자들과 동행했다. 싼 가격에 빌린 어둡고 축축한 지하실 방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무릎 꿇고 기도에 전념했다. 그들은 바로 피니 목사의 중보기도 동역자였던 것이다.

같은 시대 영국 최고의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 목사님 뒤에도 엄청난 중보기도 사역자들이 있었다. 이미 22살의 나이에 런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된 그의 설교를 들으러 매주 만 명이 넘는 성도들이 몰려들어 메트로폴리탄 태버내클을 가득 메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고 했는데 스펄전의 설교가 바로 그랬다.

만 명이 넘는 성도들이 예배 때마다 모이게 하는 그 엄청난 기름부으심 넘치는 설교의 비결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이 스펄전 목사님께 그 비결에 대해 물어보러 오기도 하고 또 교회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목사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사람들을 데리고 한 조그만 성전 지하로 내려가셨다. 그 문을 여니 거기에 몇백 명의 중보기도단이 모여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다고 한다.

큰 능력을 일으킨 것은 주님 뜻대로 이뤄지길 구하는 기도였다!

이 내용을 교회사 책에서 읽었을 때 너무 부러웠다.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공을 들여서 현재 중보기도팀을 우리 교회에도 만들었다. 주일 1부에서 4부까지 네 번의 예배를 감당할 네 팀으로 나뉘어서 날마다 예배 전후로 1시간 이상씩 중보기도한다.

형식적으로 시간만 때우는 기도가 아니라 한 번 참석해본 사람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진실하고 뜨겁게 합심기도를 한다. 그들의 불같은 기도가 얼마나 설교와 예배 전체에 성령의 힘을 실어주는지 모른다.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뒤에는 이렇게 기도의 짐을 나눠 지는 기도의 용사들이 있어야 한다.

항상 힘써 중보기도하는 기도 동역자들이 있는 지도자나 교회, 선교단체는 축복받은 것이다. 거기에는 성령의 특별한 기름부으심과 은혜와 열매가 가득할 것이다.

기도는 일꾼들이 뿌린 말씀의 씨앗에 물을 댄다. 예수님은 뿌려진 씨앗이 어떤 땅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추수에 큰 차이가 난다고 가르치셨다. 씨앗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실한 일꾼들에 의해서 아무리 많이 뿌려져도, 뿌려진 마음밭이 좋은 땅이 되도록 충분한 물이 공급되어야 한다.

성경에서는 물을 성령의 상징으로 사용한다. 심령에 성령의 생명수가 흘러들 수 있게 하는 가장 주된 방법이 기도이다. 영적으로 메마르고 건조한 심령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의 물이 흘러들게 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기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성령의 강물이 더 풍성하게 흐른다.

지금은 기도를 통해 일꾼들이 뿌린 씨앗에 물을 대야 할 때이다. 스펄전이 설교할 때 후방을 지킨 중보기도팀들의 기도는 설교를 듣는 청중들의 마음에 성령의 생명수를 끊임없이 공급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 말씀의 씨앗이 엄청난 추수를 거둘 수 있었다. 당신도 당신이 속한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해주길 바란다.
 – 한홍 목사, 『내게 힘을 주는 교회』


하나님의 구인광고가 떴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대하7:14)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재난.
불법이 판치는 세태.
하나님을 대적하는 배도의 물결.
자기가 주인되어 살아가는 우상숭배.
교회의 미래가 염려되는 현실. ​

이제는 기도밖에 살 길이 없습니다.
마음을 찢고 회개하며 함께 기도합시다.
– 윤홍진 작가

>>> 삶과 신앙 (8/8/2021)

하나님. 기도하는데, 지쳐요.
왜 빨리 안 건져주실까요?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건지실 거야.’
하지만. 점점 상황은 나빠지고,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소망까지 사라져갑니다.

기도하지만, 힘이 없어집니다.
“…주님…”  “엉엉엉….주님…제 기도 듣고 계세요?”

왜 그럴까요? 기도하면, 환난에서 건지신다고 했는데 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거짓말하신 것일까요? 아니요. 하나님은  약속을 어기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실망하는 이유는 구원의 때와, 시간을 예상하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셔서, 이건 이렇게 해주실 거야.’
‘이 때쯤에는, 저렇게 해주실 거야.’

요셉도 노예생활에서 풀려나게 해달라고 많이 기도했겠지요.
그런데 만약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셔서, 요셉이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서, 형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면 형들이 그냥 뒀을까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과 형들은 엄청나게 싸우고, 형들은 정말 이젠 완벽하게 죽여버리자. 했겠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요셉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는 그곳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셔서 계속 돕고 계셨습니다. 학대를 피할 수 있는데도, 머물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고 지혜를 구하다가,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것이 다 막혀 있다면. 이렇게 기도해보기 원합니다.

‘주님. 제 뜻 아닌 주님의 뜻대로 되길 원합니다. 정말 이해가 안되고,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 저는 미래를 알지 못하오니. 좋으신 주님 뜻대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실망하지 마세요. 주님 뜻대로 되길 구하는 기도는 그 한숨 하나도, 그 눈물 한 방울도, 그 기도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쌓이고 있으니까요.

구원의 시간과, 방법은 주님께 맡기십시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일에 합당한 기도의 분량을 쌓기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힘들면 웁시다. 주님 앞에서 괜찮은 척 하지 않아도 됩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씀 드리면서 많이 웁시다.

그러나, 울면서도 계속 기도하며 노력하며 씨를 뿌립시다.
주님이 그런 우리를 돕고 계시니까요.

반드시. 기쁨으로 소리치며, 거두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요셉과 야곱이 다시 만나서, 부둥켜 안고 울었던 그 시간처럼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우리 주님은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니까요.

 -이정한 작가

>>> 삶과 신앙 (8/1/2021)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고 있나요?
그분은 매일 당신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크신 분이라면 나는 그분을 일상 속에서 만나고 싶었다. 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만나면서 끊임없이 생기는 질문이 있었다.

함께 예배하며 찬양했고, 주님의 은혜를 나누는 기쁨의 눈물로 흘렸던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들이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보았다. 누구보다 신실했던 친구가 취업 후 반년도 되지 않아 교회를 떠났고, 함께 임원으로 섬기던 친구가 무신론자가 되기도 했다.

만일 하나님이 정말 크신 분이라면 일상에서 만나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교회가 아닌 일상에서 수많은 시간을 산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이 교회에 한정된다면, 컨퍼런스나 집회, 수련회에서만 주님을 만나고 일상 속에서는 만나지 못한다면 다시 내 힘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내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하나님을 일상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내가 기도하자 하나님은 그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하나님이 내가 드린 기도에 응답하셔야 한다면 그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분은 내 아버지이며, 아버지는 자녀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적인 조건을 빼고도 내게 응답하셔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나님이 침묵하셔도 우리는 마땅히 할 말이 없지 않을까? 내 기도에 응답하셔야 할 이유를 찾아보면, 그분을 만나는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약속”이라는 말은 ‘지킨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내가 드린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이유와 일상 속에서 그분을 만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주님의 약속에 열쇠가 있다. 주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신 약속 위에 우리의 삶을 올려놓으면 된다.

하나님은 성경 전반에 걸쳐 우리에게 많은 약속을 하셨다. 주기도문만 보아도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시며,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은 일용할 양식과 용서에 대해서도 말씀하신다.

그것은 대단히 멀리 있거나 우리가 순종할 엄두도 내지 못할 만한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기를 원하시지만 처음부터 지레 겁을 먹을 만큼의 순종을 요구하지는 않으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분량만큼 이끄신다.
 – 이요셉, 『오늘, 믿음으로 산다는 것』

코로나로 온라인예배가
익숙해진 요즘,

문득 다가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예배를 보고있니?”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다시금 던져봅니다.

그리고 너무나 잘 ‘알고’있는
그 답에 대하여
내 삶 가운데
예배의 모습가운데
그 답이 나타나고 있는지
돌아 봅니다.
 – 이정한작가

<삶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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