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022 삶과 믿음 모음
>>> 삶과 신앙 (3/27/2022)
하나님과 붙어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시간’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가 두 가지 있는데,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이다. 크로노스는 흘러가는 시간을 의미한다. 즉, 하루 24시간 쭉 흘러가는 시간이다. 카이로스는 직면하는 시간이다. 하나님의 때, 은혜의 시간과 같이 무언가와 직면하는 시간을 의미한다.
크로노스의 시간만 흘러가게 두면 카이로스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시간표를 작성하고 우선순위를 세워야 인생이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직면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채워진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시간 관리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것’이란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면 죽는다. 하나님과 붙어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가?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과 직면하는 시간을 빼두지 않으면 우리 시간 관리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입는 시간》을 쓴 켄 시게마츠는 균형 잡힌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삶을 살라고 한다. 즉, 세상이 말하는 균형 잡힌 삶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모든 일의 중심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살아 있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요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균형’이다. 균형 잡힌 먹거리, 균형 잡힌 쉼, 균형 잡힌 라이프 스타일, 일과 여가의 균형 등 모든 영역에서 균형을 추구한다. ‘웰 밸런스, 워라밸’ 같은 말들이 익숙하게 들리고,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취미를 갖고 좋은 쉼을 누리며 여가를 즐기는 균형 잡힌 삶을 살라고 종용한다.
하지만 하나님과 떨어져 있는 모든 순간은 진정한 평안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균형이 아니라 진정한 주인이다. 진정한 주인을 알 때 다른 무언가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시간에 끌려다니지 말고 시간을 지배해야 한다. 분주하게 쫓아다니고 끌려다니는 시간 외에 우리가 컨트롤하고 지배하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바라봐야 한다. 무언가에 끌려다니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자.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균형 잡힌 삶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인생을 살자.
따라서 생활수칙을 세우는 목적과 원칙도 균형 잡힌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든 일의 중심에 두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핵심이 되게 하는 것이다. 생활수칙이란 단순히 시간을 아끼고 쪼개서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사용의 우선순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에는 균형이란 게 하나도 없으셨다. 오직 하나님만 계셨다. 오로지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뜻밖에 없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내가 얼마나 균형 잡힌 삶을 누리고 내가 시간을 얼마나 잘 나누어서 균형 있게 사용하느냐가 내 인생 시간표의 핵심이 아니다. 생활수칙의 핵심은,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가느냐,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알아가느냐에 있어야 한다.
크리스천에게 시간 관리의 의미는, 아침에 일어나서 30분 동안 큐티를 하고, 균형 잡힌 식단으로 아침을 먹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는 자기 계발을 위해 책을 읽고, 체력을 위해 운동하겠다고 하는 시간표 빈칸 채우기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인생을 살아보려고 버둥거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시간표를 잡고 영적인 일에 핵심을 두고 시간 관리를 시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청지기이기 때문이다. 물질만 청지기로서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니, 청지기로서 잘 관리해야 한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생활 리듬을 가져라. 세상에서 살지만, 영적인 패턴을 가지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도록 우리의 시간을 관리해야 한다. 매일의 시간표를 세밀하게 체크하고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자신의 스케줄을 관리하라.
자신의 영성을 매번 ‘돌아오는 탕자’의 이야기로 만들지 말라. 특별한 집회나 예배 혹은 단기 선교여행 때는 큰 은혜를 받았다가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버리는 삶을 살지 말라. 매일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생활 리듬을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면서 신앙의 연수만 늘릴 수는 없다.
– 홍민기 『계속 이대로 살 수는 없다』 –
>>> 삶과 신앙 (3/20/2022)
왜 그는 유혹 앞에 무너졌는가?
고난이 우리에게 몰락을 가져오는가?
우리를 쓰러지게 만드는 것은 고난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그것을 예상하고 준비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극심한 고난은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다가온다.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고난을 만나면, 몰락한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힘이 약한 이유는 기도가 거의 사라지고 침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를 많이 하고 강건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은 고난이 와도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미리 앞서가는 기도는 어떠한 유혹에 대해서도 영혼을 준비시켜준다. 다윗이 수치스럽고 비극적인 유혹에 빠진 것은 그가 옥상에 올라갔던 그날이었을까?
아니다! 역사학자들은 중간에 다윗에게 긴 공백 기간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때 다윗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다윗이 하지 않은 것 한 가지를 알고 있다. 즉 그는 그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 밖에 나가 별들을 바라보며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합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그러한 일들을 했지만, 하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다.
따라서 다윗은 유혹이 다가오기 전, 그가 허비했던 시간들의 무게 때문에 쓰러진 것이다. 당신이 기도함으로써 유혹을 미리 예측했다면 유혹은 당신을 해칠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유혹은 틀림없이 당신을 넘어뜨릴 것이다.
예수님을 세번 유혹한 후에, 사탄은 잠시 동안 그분을 떠났다. 왜 그랬을까? 당연히 그 의도는 예수님이 방심하시게 하려는 것이었다. 마귀가 한동안 당신을 내버려둔다면 당신은 큰 어려움이 없고 무척 행복하며 상당히 영적인 사람으로 지내면서 이렇게 말하기 쉽다. “그래, 다 잘되고 있어.” 그리고 당신은 기도 생활을 소홀히 하며 깨어서 기도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귀는 항상 당신을 노리고 있다. 따라서 기도하고 깨어서 하나님을 앙망하라. 그러면 당신은 사탄이 올 때를 대비할 수 있다.
항상 승리를 거두는 유일한 방법은 단 하루도 당신에게 몰래 다가오지 않게 하라.
출근길에 뉴스나 뉴스를 읽는 대신 신약성경을 읽고, 그 다음에 고개 숙여 하나님과 대화하라. 싸울 준비를 하라! 아침에 기도를 아예 건너뛰기보다는 어딘가에서 기도를 부여잡으라.
기도의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시를 읊고 계신 게 아니었다. 그분은 “깨어 기도하라”라고 하셨고, 그것을 몸소 실천하셨다. 그리고 그 때문에 승리하셨다.
절대 기도의 힘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기도하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고, 기도하면 실패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주님은 우리에게 미리 대비하는 기도의 본을 보여주셨다. 즉 정해진 시간에 깨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함으로써 어느 사건이든 대비하신 것이다.
기도하라.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처럼, 다니엘이나 엘리야나 혹은 다른 믿음의 사람들처럼 당신은 의기양양하게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 기도가 언제나 이기기 때문이다. – W. 토저, 『기도』 –
>>> 삶과 신앙 (3/13/2022)
우리의 기도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편 27:1)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출애굽기 15:1)
우리의 생명이 되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으신 크신 사랑으로 늘 동행해 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 죽을 저희를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셔서 거룩하고 복된 주일, 믿음의 백성들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자의 자리로 나오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한 주간을 보내면서 Covid에 겹쳐 전쟁의 소식까지 전해져 전 세계가 슬픔에 잠겨 힘들어하는 혼돈의 세상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며 살지 못했던 것과 나의 이기심 때문에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는지 나를 돌아보며 회개합니다. 이 지구상에 더이상 전쟁의 아픔이 없기를 바랐지만, 강한 자들의 완악함과 탐욕으로 인해 참혹한 전쟁 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 있는 우크라니아 땅과 국민들을 긍휼히 여겨 주시기를 원하며, 그들의 아픔에 우리 모두가 함께 아파하며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악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하루 속히 전쟁이 중단되며 모든 인생에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주실 분은 참 구원과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으심을 온 세상이 깨닫게 하셔서 주님 주시는 참 평화와 회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또한 간절히 바라고 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로마서 12장 2절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기억해봅니다. 광야와 같은 이땅에서 저희와 저희 자녀들에게 삶의 우선 순위와 세상과 구별되는 분별력을 허락해 주셔서 예배와 일상의 삶이 분리되지 않고 매일의 삶 전체가 영적예배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가정에서부터 말씀으로 양육받고 말씀에 순종할 때 세상을 온전히 이기고 승리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선교주간을 맞이하여 새해에 주님께 드렸던 새 각오와 열정으로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겨주신 사역들을 잘 감당하는 섬김의 교화와 각 가정과 개인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주의 종의 가정이 이사를 무사히 잘 마치도록 도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영육간의 강건함을 허락해 주시고 이시간 단 위에서 하나님의 말씅르 대언하실 때 갑절의 성령 충만을 더해 주셔서 능력의 말씀이 선포되기를 원합니다.
말씀을 듣는 저희들의 갈급한 심령 위에 영적 귀와 눈을 열어 주시고 성령의 단비를 내려 주셔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 하나님의 임재만이 가득한 예배로 은혜와 회복의 시간으로 하나님 홀로 영광 받아주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구은강 집사 –
>>> 삶과 신앙 (3/6/2022)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면 기도밖에 없다!
낳은 지 3일 된 첫아이를 두고 죽을 뻔했다.
새벽 2시, 금요 철야예배를 마치고 분당의 한 산후조리원에 가는 길이었다. 거기에 아내와 첫아기가 있었다.
판교IC를 막 빠져나가는데 역주행 차량과 정면충돌했다. 나는 잠깐 정신을 잃었다.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들것에 실려 가면서 사고 현장을 보았다. 중앙선을 넘어온 상대 차량은 바퀴 하나만 떨어져 나갔는데 내 차는 엔진룸 부분이 거의 없어졌다.
전신 엑스레이부터 찍었다. 다행히 뇌와 장기들, 신체 중요 분위는 멀쩡했다. 뇌진탕과 오른손 복합골절이 있을 뿐이었다. 조리원에 전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응급조치가 끝났다.
아내에게 다녀오겠다고 했더니 의사가 만류했다. 내가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날이 밝는 대로 손을 수술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안 죽었고, 당장 수술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음 날부터 문병이 이어졌다.
그런데 내 첫아이의 엄마는 남편의 팔을 붙들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죽다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났는데
가정도 주시고, 새 생명도 주시고,
오늘은 사고 가운데 무사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평안할 때나 아닐 때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이 사고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당신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죽다 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니 감사했다. 천국 가도 좋았겠지만, 가다 만 것도 괜찮았다.
그러다 문득 크리스천 존재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떠올랐다. 많지는 않지만 드물지도 않은 일. ‘죽다 산 경험’이 사람들에게는 간혹 있다. 무용담이 되기도 하고 인생 전환점을 맞기도 하는 ‘요단강 건널 뻔한 경험.’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어중간하게 ‘죽을 뻔’한 인생을 살지 않는다. 오히려, 아예 죽는다. 확실히 끝장난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다.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된 인생은 기도 호흡이 필요하다.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Marthin Luther)는 기도를 새 생명의 호흡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기도 없는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호흡 없이 살아있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새 생명을 얻으면 새 호흡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바로 ‘기도’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인생에서 제 기능을 하도록 하는 생명의 불꽃이다. 시체는 숨 쉴 필요가 없고, 불신자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신자라면 기도 호흡은 필수다.
새 인생의 생사가 달린 문제다. 내 생명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생명도 포함이다. 그래서 기도자들은 생명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생각해보라. 인생 최후의 15분 기도시간이 주어진다면 누구를 위해, 어떤 기도를 하겠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이며,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며 내 소명이 그들을 지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최후의 15분이 되기 전에 미리 기도하겠다. 매일 새벽과 밤에 이들을 위해 기도하겠다. 또 어느 날 어떤 사고 현장에서 ‘죽을 뻔’보다 더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오늘부터라도 시작해서 매일 차곡차곡 기도해 두겠다.
혹시 죽을 뻔했던 때가 있었는가? 그때 누가 가장 생각났는가? 당신은 지금 그를 기도로 지켜주고 있는가?
– 송준기, 『지키는 기도』 –
말씀을 알아가면서 신앙이 자라가는 만큼 기도와 삶의 구분이 사라지기 기도합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께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삶이 날마다 더욱 거룩해지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가 무거운 숙제 같은 말이 아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 행동하는 것이 기도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 싶습니다.